2025년 2월 19일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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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있는 자가 되라
지혜있는 자가 되라
에베소서 5:15-21
에베소서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서론
서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지혜있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혜있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과 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먼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경외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신적인 존재에 대해 드는 깊은 존경심과 두려움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너무 무서워서 두려워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다.”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존경하다’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사상, 행위 등을 받들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제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고 한다면,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놀라워하기만 할까요?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정신,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나아가는 자세,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고 묵직하게 밀고 나아가 사람들을 지키고 살리는 그 정신을 닮고자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매우 존중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군인이 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변할까요? 그들은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삶을 바쳐 평생을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변화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존경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서워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닌,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고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공경하는 어른들 앞에서 어려워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무서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공경심에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분의 정신과 가치를 닮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묵상하고 따른 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세상 만문을 다스리시는 그 분의 말씀을 따르며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과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이라는 단어는 첫 번째 혹은 시작을 말합니다. 무언가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을 닮고 따르는 것입니다.
본론
본론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여기서 ‘주의하다’라는 의미는 ‘신중하게 지켜보다’입니다. 신중하게 지켜봄으로 경계하고 살펴보며 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할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아끼라’는 ‘속량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우리의 삶을 우리는 흥청망청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존귀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신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하다’라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16절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들이 있지만,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기준도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지적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그저 지적 이해인가요? 관계적 이해이고 배려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한다는 것도 지적 이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이방숭배와 관련된 의미입니다. 로마의 디오니소스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이름은 포도주의 신입니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의식은 술과 음악 그리고 춤을 통해 진행됩니다.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계층은 여성, 노예, 이방인, 하층민과 같은 소외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숭배의식을 통해 스트레스를 광적으로 해소합니다. 이는 무절제하고 음란하며 광란적인 의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예배는 광란의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광란할 수 있을까요? 예배에 대한 인식은 먼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언가 경험되어지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특별해야한다는 인식은 자칫 자신중심의 예배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로마서에서도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을 드리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예배, 바울은 예배가 어떤 특정한 시간-특정한 날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모든 시간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자의 삶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영적 예배’에서 ‘영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로마서 12장 1절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는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이 되고 상식에 맞는 합리적 예배, 분별있고 논리적인 예배란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도, 성전이 무너지고 드려지는 제사도, 그리고 교회에서 드려는 예배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 광적인 모습은 없었습니다. 광적인 제사는 가나안의 이방종교에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와 예배의 모습은 진중하고 엄숙하며 기쁨이 넘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제사였고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예배를 우상숭배의식처럼 광적인 의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무엇가 특별한 의식과 경험을 통해 광란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예배들을 분별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에 맞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월을 아끼고 분별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18절의 두번째 의미는 신명기와 누가복음이 말하는 방탕한 자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신명기에서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가 살아있음에도 유산을 요구하고 받은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소비한 후 돼지 여물을 먹다가 살기 위해 돌아온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부모와 자녀에 대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방탕한 삶은 물리적으로는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죽었다 여기고 하니님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술 취한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떠난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이 하나님으로 충분할 때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삶이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속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삶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18절에서부터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종교과 같이 광란적인 의식,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의식을 경계하고, 우리의 삶을 분별하며, 성령님이 함께하심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삶, 그러한 삶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뒤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에 관한 구절과 연결됩니다. 성별, 나이, 계급에 관한 말씀은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구절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닮아가며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만족하며, 그 분이 구원하심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란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종으로서 상전으로서 권리를 찾으라는 말씀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작하는 삶,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실천되어지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닮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무언가 특별한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며 따르는 삶,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려는 삶, 그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삶은 지적 이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은 삶을 소홀히 사용하지 않고, 신중하게 분별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생활도 예배도 이방종교와 같이 방탕하며 광란적인 모습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예배, 하나님께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듯 우리도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따뜻한 온정을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삶.
이것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삶이 우리를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