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21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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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크신 은혜로 가득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함께 디모데전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가 지난주까지 함께 나누었던 내용들은 직분들에 관련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구요, 그 전에는 과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이끌어가야할 디모데가 이렇게 다양한 성도들에게 말씀대로, 올바로 대하며 교회를 은혜롭게 이끌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강하게 엄히 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사랑했기에, 그를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죠.
그런데 이 디모데전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들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죠. 바울이 지속적으로 본인의 서신에서 언급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말이죠.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의 권면과는 반대로,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강조하는 주장들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그 무리들이, 자신이 떠난 에베소에서 디모데에게 동일한 공격을 수행할 것을 염려했죠. 그랬기에 서신에서도 여러번 그 거짓 선생, 거짓 사도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말씀도 이에 대한 내용인데요, 특별한 것은 그전까지는 공격의 초점이 거짓 가르침 그 자체에 있었다면, 오늘은 그로 인한 좋지 않은 파급 효과에 대한 것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거짓 사도들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 부정적 파급 효과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함께 말씀으로 살펴봅시다.
오늘 말씀 3절을 보면,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다른 교훈을 말하고, 바울이 전했던 바른 말, 즉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행실이 아닌 마음이 먼저 경건함으로 몸이 따라 행하는 그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 바로 그 반대자들을 이야기하죠.
그리고 4절에서 그들의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전에 함께 나누었던 1장 말씀에서도 등장했던 내용이었죠.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것을 아는 것마냥 가르치려하고 싸우려 하지만, 실상 그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소피스트들의 논쟁과 비슷한 말싸움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죠.
결국 그러한 가르침의 결과는 말씀의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싸우고 분쟁하는 것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5절에 등장하는 것처럼 마음이 부패하고 그 마음에 진리를 향한 마음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 중에는 어떤 이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경건, 즉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자체를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흔히 말하는, 우리의 신앙을 가지고서 세상의 이익, 즉 돈을 벌고 무엇인가를 얻고 하려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6절에서 그것이 절대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자족하는 마음, 즉 새로운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큰 이익을 준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5절의 이익과 6절의 이익이 다른 이익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그냥 읽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5절에서 경건은 이익의 방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어지는 6절에서 큰 이익을 준다는 말이 되니, 그 자체로 모순이 되겠죠.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표현하는 이익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이지만 그것이 실제 가리키는 대상은 다릅니다.
바로 이어지는 7절과 8절을 보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텐데요, 해당 본문은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말그대로 공수래공수거를 말합니다. 물론 공수래 공수거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결국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표현에서는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결국 그 격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아무리 남겨봤자 그것을 죽을때 가져갈 수도 없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당장의 양식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겠죠.
자, 그러면 5절과 6절의 이익이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나요? 5절에서 말하는 거짓 사도들이 얻고자 하는 이익은 세상적 재물, 명예와 같은 것들이겠죠.
하지만 6절의 이익은 그러한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이익, 즉,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이익을 말하는 것이겠죠.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5절에 나타난 세상적 이익이 가지는 약점을 언급합니다. 세상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곧 시험과 올무에 빠지고, 여러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결국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
예수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예화를 들어서 하신 적이 있죠. 바로 부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을 많이 거둡니다. 너무 소출을 많이 거두어 창고에 쌓을 곳이 없자, 부자는 근심하죠. 그리고 결심합니다. 더 큰 창고를 지어 더 많은 곡식을 저장해야지.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부자를 꾸짖으시죠. 내가 지금 너의 생명을 가져간다면, 그 모든 곡식과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해당 예화에서 부자는 이미 충분한 만큼을 거두었음에도, 더 많이 갖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려 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당장 그 부자가 죽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자 했던 모든 것들은 쓸모 없어지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인 것이죠. 흔히 떠도는 이야기처럼, 인간의 욕심을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찌보면 이 한 문장이 인간의 모든 역사를 정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세상에서 발생한 수많은 전쟁들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더 많은 땅, 더 많은 자원, 더 많은 돈을 갖고자했던 인간의 욕심 때문이었죠. 분명 인간의 지식이 발전하면서 이전보다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고, 더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인간의 욕심은 그 모든 노력을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두번의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9절의 본문이 이 역사를 미리 드러내 보여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부자가 되고자 하고, 더 많은 것을 남보다 더 얻고자 하는 자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함정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파멸과 멸망뿐이겠죠.
바울은 마지막 10절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이것을 탐내면 결국 믿음에서 떠나 오히려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고자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살기 위함이겠죠. 여러분들이 학창시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결국에는 이후의 삶을 더 나은 자리에서 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돈을 많이 얻게 되면 삶은 더욱 나아지고 편안해질까요? 여러분들이 부러워 하는 부자들의 삶, 어떨까요?
삼성의 이재용회장? 얼마전까지 법정 왔다갔다 하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 돈도 많은 사람이 재판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 돈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죠. 아버지의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고자 하다보니 법의 테두리를 어긋난 행위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요즘 유행하는 인플루언서? 연예인들? 그들 모두 행복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경에 나타납니다. 바로 솔로몬이죠. 여러분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솔로몬은 지혜와 명예, 부까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누린 그의 말로는 행복하지 못했죠.
그의 고뇌는 그의 인생 후반에 기록된 전도서를 보면 나타납니다. 시작부터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죠.
그리고 그의 사후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죠. 나라도 반으로 쪼개지고, 그의 아들은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성전의 수많은 보물들은 이방 나라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것을 탐내는 욕심이 얼마나 비참한 말로를 불러오는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여러 부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야기한 자족하는 마음의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그 예도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여기에 나온 양식이 무엇일까요? 바로 만나입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늘로부터 내려주셔서 먹게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하게 등장한 것이 무엇이었나요? 그것을 저장하지 말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말씀을 어기고 저장한 이들은 어떻게 되었죠? 만나가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었죠.
왜 하나님께서 저장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내일도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 만나를 저장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내일 만나를 주실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 되겠죠.
믿지 못하고, 그 안에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니, 혹은 저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먹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니 저장이라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족하는 마음은, 오늘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처럼, 내일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의 것에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결국 자족하는 경건을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하겠어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늘 제가 디모데전서를 나누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국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것에 감사함으로,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그 내일 내려주시는 은혜로 또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일생을 지켜주신다는, 인도해주신다는 그 믿음은 6절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 세상에 어떤 것들도 주지 못하는 평안이라는 큰 이익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말씀 처음으로 돌아와봅시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것은 무엇이었죠?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교회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의 헌금을 통해 내 뒷주머니를 배불리려 하거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내가 세상에서 이름을 높이려 하거나 이런 모습들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모습들,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특히나 부끄럽게도, 우리 주변의 여러 교회공동체에서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죠.
어떤 이들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유명세를 자랑하려 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이들의 시도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인해 결국에는 드러나 비판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모습만으로도 교회 공동체를 향한 수많은 세상의 비난, 또 우리 스스로의 무너짐들이라는 아주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이러한 모습들을 절대로 좋게 보시지 않고 비판하는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비판하시고자 하셨던 만큼, 가슴의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자구요.
‘나는 과연 교회 공동체를 내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지 않았나?’
과연 떳떳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그런 규모의 일들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기회 조차도 사실은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실 어쩌면 우리의 마음 안에도 비슷한 마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이 하임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단 한번도 나의 세상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신 적이 없나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열심히 헌신하는 만큼, 나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주셔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 사랑하는데, 저한테도 이만큼 주셔야 하지 않나요? 이런 생각들. 아마 한번쯤은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아주 전형적인 교회를 나의 이익에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거짓 사도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모습이 모두 여러분들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까지 우리 할아버지 세대, 혹은 부모님 세대까지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지배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기복신앙의 모습이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세상적인 복을 가득 내려주신다.
그래서 열심히 부모님들은 자녀의 입시를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도 좋은 학교 가기 위해 교회 빠지지 않고, 헌금도 하고.
겉으로만 보면 좋은 모습이죠. 열심히 교회생활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문제점은 뭐냐, 오늘 본문 9절에 나온 것처럼 시험과 올무에 빠졌을때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떤 거에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시험에 들고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분명 내가 열심히 하나님 섬기고 기도했는데, 왜 제 입시 안이루어주세요? 하나님 저 사랑한다면서요?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어떤 이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신앙에서 떠나버리고 마는 이들도 있죠.
그럼 어떻게 되요? 말씀 그대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복신앙의 모습, 신앙을 나의 이득을 얻는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은 절대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우리의 신앙이 도구가 아닌,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향해 달음박질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길을 열어주셔서 그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자족하는 경건의 삶을 산다면, 그의 삶은 감사와 평안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신앙을 도구로 삼고 나의 세상적 목적을 가지고자 나아간다면, 그의 삶은 어떨까요? 그 목적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조건적으로 해나가면서 조건을 채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혹여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그 자체로 시험에 넘어져 자기 자신이 자신을 찌르는, 말그대로 스스로 멸망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불안과 멸망만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 가운데도 혹여나 이러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신앙하는 이유는 내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믿음생활을 통해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잘살기 위해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늘 군대를 부르셔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세상의 왕이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적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닌 그 이후의 세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낮아지시고 끝까지 낮아지셔서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버리셨고, 세상에서 넘어져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살리신 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피를 땅바닥에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만드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시기를 또한 원하십니다.
저는 우리 하임 공동체야말로, 그것을 너무나도 잘 실행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세상적 가치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여러분들이잖아요.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가서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기 위해 노력했던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주님은 여러분들을 택하여 부르셨고,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놓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지금도 이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듣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여기까지 이끄신 것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이득이 아닌, 이후에 주님께서 인도하실 하나님 나라에 그 소망을 두기 위함입니다.
그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를 향한 믿음을 갖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이시는 그 길을 따라, 두렵고 무서울지라도, 주께서 함께하시고 승리케하실 것을 믿으며 모든 삶을 내던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은 세상의 욕심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주님이 내려주시는 샬롬을 누리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으로 현재에 만족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행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