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2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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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새 시대, 새 언약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눌 때, 주께서 말씀을 통해 큰 은혜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새로운 성경이죠? 바로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죠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했던 동역자로서 이방인이었고, 또 의사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이 담긴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두에 모두 데오빌로 각하라는 사람을 위해 기록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시작과 초대교회의 설립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누가복음의 특징은 그러다보니 매우 역사적으로 하나하나를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예수님의 사역 이전의 내용들, 세례 요한에 대한 것들과, 예수님의 출생, 어린 예수의 이야기들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죠.
또 다른 특징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부분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인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여인에 대한 이야기 등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집중하고 있는데요,
오늘의 본문도 그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세리가 그 대상인데요, 오늘 이 본문을 함께 보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러한 이들에게 관심을 두셨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보이고자 하셨던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첫 구절인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로 레위라는 세리였죠. 예수님은 그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28절에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레위라고 불린 세리는 바로 신약성경 첫 성경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라는 제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복음서를 자주 읽어보신 분들은 마태의 반응이 익숙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제자들은 비슷한 반응을 하였죠. 어부였던 베드로도 자신의 배와 그물 등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이 레위, 즉 마태의 반응이 특별한 것은 그가 세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세리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아시나요?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즉 요즘으로 치면 국세청 직원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실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국세청 직원이라고 해봅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해서 국세청 직원 그만두고 나온거에요.
그런데 혹여나 만약에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었어서 안 따르고 예전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니죠. 다시 공무원 시험치고 국세청 면접보고 해야하죠.
어부야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물론 배랑 그물들을 다시 구해야 하긴 하지만, 어디서 구하기만 하면 다시 언제든 그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거에요.
하지만 세리는 다릅니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거에요. 미리 준비하고 그만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단으로 때려치고 나왔기 때문에 다시 채용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만큼 이 마태가 행한 결단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마태가 결단한 후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마태를 비롯한 여러 다른 세리들, 그리고 아마도 제자들도 함께 자리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식사하며 교제를 하고 있는데, 그 주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나가다가 보고 그들을 비방한거에요.
30절에 보면 어떻게 비방하죠?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왜 이들이 이렇게 세리를 죄인과 같은 취급을 하면서 비방했던 것일까요.
이것은 당시 세리라는 직업이 가졌던 특수한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당시는 이스라엘 나라가 어떤 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일까요?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있었지만, 거의 로마의 보호국같이 여겨지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걷는 것이 이 세리들이었죠.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세금을 지불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지불했을까요? 그렇지 않겠죠. 왜냐하면, 자신들의 조국을 무너뜨리고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렇게 즐겁지 않았을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죠.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와 백성을 무너뜨리고 이렇게 취급하는 것 자체를 참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줄 세금을 걷는 세리들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마치 로마의 앞잡이처럼 여긴 거에요.
우리 역사로 보면 이해가 쉽겠죠? 일제강점기에서 총독부에 속해서 일하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 백성들의 시선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겁니다. 매국노, 친일파 이런 딱지가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게, 그렇게 지배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꼭 부도덕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우들도 있었죠.
세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시킨 대로 그 만큼만 걷어서 로마에 보내면 되는건데, 어차피 그것을 확인할 사람도 없으니 더 큰 금액을 걷어버리는거에요.
예를 들면 1인당 50만원을 세금으로 내라고 지령이 내려왔는데, 150만원을 걷으라고 발표하는 것이죠. 그리고 50만원을 보내고 나머지 100만원은 자기 주머니로 챙기는 일들을 많은 세리들이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다보니 세리에 대한 인식은 아주 밑바닥까지 떨어졌겠죠.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진거에요? 나름 선생이라고 평가받던 예수님이 그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여겼겠어요? 아니 저 사람은 나름 선생이라더니 어떻게 저런 자들하고 자리할 수가 있어? 바로 이렇게 나오는 것이죠.
아마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31절에 나타나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
무슨 이야기에요? 모든 사람이 건강하면 의사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없죠. 그러니 의사가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건강하지 못한 사람, 말 그대로 병든 사람이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자리에 있어야 의사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라는거죠. 예수님은 마음의 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이들의 마음 깊숙히 자리한 죄라는 병을 없애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질병을 가진 병자들인 죄인들과 함께 그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32절에 등장하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크신 사역의 방향, 그리고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죄인들, 사회가 바라보지 않는 낮은 자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무리를 향해 왜 죄인과 함께하냐고 비방했던 것은 방금 보았던 역사적 맥락 이외에 한가지 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율법에 그렇게 하지 말도록 되어있기 때문이죠.
율법에서 여러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정결한 상태, 더러움이 하나도 없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레위기를 한번 보시면, 여러가지 정결 규례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지면, 빠르게 그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정결 예식을 행해야 했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그 율법에 빠삭하고, 그것을 목숨과 같이 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죄로 물든 저 세리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나의 정결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선생으로 생각했던 예수님께도 그러한 비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가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왜 그렇게 율법을 어기느냐! 이런 뜻도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가졌던 이전의 체제, 구약 율법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구약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모두 싸워 이기고 불태워야 했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졌던 승리의 방식은 무엇이냐, 유대인으로서 순수하게 자리를 지키고, 다른 이들을 유대인으로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 유일한 승리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선택받지 못한 다른 자들은 다 패배하여 지옥에 가야할 자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시선과 방향은 안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거룩하게, 더 깨끗하게, 조금이라도 뭐가 묻으면 배제하고, 더욱 순결한 자들만 모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죠.
그러니 어떻게 되었나요? 북이스라엘 지역의 형제들, 즉 사마리아 인들을 이방 민족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완전히 배제하고 배척했죠. 이방인들? 말하나마나죠.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도 오직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수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죠. 율법을 더 연구하고, 더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순결하고 거룩할 수 있다! 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그렇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의 구원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곳곳을 통해 유대인들 뿐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구원의 계획에 속해있음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인물들, 나아만과 같은 이방인들도 주님께서 택하셨던 것을 확인할 수 있죠.
그랬기에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해 그들에게 나아가셨습니다. 오랫동안 배척당했기에, 오히려 말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그들에게 나아가시며 놀라운 복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체제, 새 언약의 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시선은 바깥으로 향했습니다. 더 많은 이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죠.
예수님의 시선에는 세리나 죄인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치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태초의 죄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리 마태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내던져서라도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오는 이들을 주님은 맞아주시고 함께 교제하시며 그들을 회개토록 인도하십니다.
자.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겠다는 말씀을 하자,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다른 내용으로 딴지를 걸기 시작합니다.
바로 자신들의 제자와 심지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지금 금식하는데, 왜 너희는 이렇게 먹고 마시느냐.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금식이라는 것 역시 정결함을 나타내는 방식중에 하나였습니다. 금식하여 기도함으로써 다른 세상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만 기도하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간절히 기도가 필요한 순간에는 여지없이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이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나라가 로마에 압제하에 있고,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 적어지는 상황에서 더욱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금식기도를 통해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섬긴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들도 있었겠죠.
이들의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34절부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때가 이르면 신랑이 빼앗길 것이니 그때는 금식을 할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보통 결혼식에는 어느 나라나 문화나 상관없이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쁜 때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지금이 바로 그렇게 즐거워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랑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자 메시야 구원자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함께하시는 때는 우리에게는 기쁜 때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기 때문이죠.
하지만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가 이를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간절히 기도하며 금식할 때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행해야 할 일들, 또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 계획을 다 알고 실행하고자 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어서 또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포도주에 대한 비유이죠.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새 옷도 상하고, 붙인 낡은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다. 그러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며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못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자들은 묵은 것에 익숙해 새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들은 다 같은 것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옛것과 새것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냐, 예수님이 이루실 새로운 체제,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이전의 율법 체제를 가지고서 지속적으로 내부로 향하는, 자신들만이 구원받고자 하는 옛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서는 옛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마태는 이전의 자신을 규정하던 세리의 모든 직무를 버려야 했고, 바리새인들은 이전의 자신을 규정하던 율법의 체제들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바리새인들은 버리지 못했죠.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구원자이시고 그들이 그렇게 찾던 메시야이심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옛 것으로는 새것을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로 돌아와봅시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 새로운 복음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그러면 우리도 오늘 말씀의 마태와 같이 옛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옛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규정하던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전의 마태도, 바리새인들도 결국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세상에서의 것들이었습니다. 마태는 세상에서의 수많은 재물들을 원했고, 바리새인들은 세상에서의 명예를 원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마태는 수많은 세금을 걷고자 했고,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금식하고 죄인들을 배척하면서 사람들 앞에 보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바로 세리와 바리새인들이 세상에서는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들은 아마도 서로를 욕하고 자신들이 정의이고 선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무엇이었나요? 둘다 똑같은 죄인이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죄인으로 여겼을 세리 마태가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진정한 선과 악은 세상의 지식과 시선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말씀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인간 스스로 그것을 정할 수 있고, 그것이 무조건 정답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세상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들은 죄인들, 나는 그들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을 규정짓고,
올바른 신앙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 저런 모습은 나쁜 신앙의 모습들이라고 신앙의 표준을 규정짓고,
모든 것들을 세상적인 시각과 상식에 맞추어 판단하고 규정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상의 상식과는 다르게 움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온전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 자신,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고,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것들을 이뤄왔고, 많은 능력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어쩌면 여러분들의 대단한 지식과 경험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마태와 같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완전하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 내어놓고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마태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회개케하시고, 온전한 주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우리에게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랑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함께함의 행복이, 그 평안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이자리에 함께하신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 여러분들이 그것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옛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과 함께 새 언약에 참여하여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판단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의 잔치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귀한 하임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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