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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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롬 1:16

오늘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 신약 249페이지입니다.
찾으신 줄 알고 함께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아멘-
도입
샬롬!
삶교회 첫 번째 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 할까요? 행복 하십니까?
다시 한번 인사 할까요? 행복합시다.
2019년에 장한이 2집에 “행복” 하니 라는 찬양이 발표됐습니다.
“행복”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에 행복이라오/
눈물 날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지만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뜻대로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에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어떤 단어가 중량감 있게 작용 하는지 알 수 있는 찬양입니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께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복음”입니다.
복음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복음 때문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이 아니면 제가 이곳에 없을 것이며,
복음이 아니면 이곳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지만
이 복음이라는 명제 앞에 철저하게
처절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늘 이 시간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단어설명
복음이란 단어를
김세윤 박사님은 그의 저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이 약속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또는 그 한 측면만을 왜곡된 채로 이해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망과 실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및 윤리를 정립하지 못하여, 결국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제자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맙니다.
복음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죄를 위한”, 곧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그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 곧 신적(神的) 사건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태(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킨 사건이므로, 그것은 어떤 자연 현상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가 생명을 빚은 사건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하나님이 복음이다.”
책에서 그는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중심성과 복음에 대한 충실성을 테스트하는 기준은 당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중시하시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하셔서 당신이 그분을 중시하는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인가?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당신의 가치에 대한 증거로 보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치를 영원히 누리는 한 방법으로 보기 때문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분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신부를 위한 수업이 많은 축복을 사셨다는 소식을 선포한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의 가치에 대한 증거인 한 기꺼이 십자가를 자랑하려 한다.
김세윤박사님과 존파이퍼목사님은 복음의 핵심을 꾀 뚫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단편적으로 생각한 복음은 설교의 대가들
또는 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먼저 고백하며 “복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 되신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신이 이것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구원과 연관시켜서 로마서 전체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구원은 오직 이 복음,
즉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세가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복음을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복음은 부끄럽습니다.
현재 코로나 이후로 기독교는 더욱 더 부끄럽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비난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조롱합니다.
뉴스의 사회면에 교회의 모습이 봉사와 헌신으로 나왔던 때가 있지만
이젠 교회의 부도덕한 모습으로 인해서 사회면을 장식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표출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욱 더 부끄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복음
그저 복음이 부끄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왜요?
복음을 전하면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 말을 했을까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노니’는
실제로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제이스 스튜어트가
이 구절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합니다.
“어떤 것을 부끄러워하려는 유혹을 받은 적이 없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결코 패배를 모르는 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언젠가
예수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부끄러워 할지 모른다고 예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 75절에
베드로는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그분의 예견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고전 2장 3절에는
바울도 고린도에 도착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실로 자신의 구세주를 결코 부끄러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족, 랍비들, 통치자들 그리고 폭도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구인가는 그에게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한 번 더 여쭤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두 번째는 복음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죄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것은 죄악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상태를 소유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걸쳐 계속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소테리아로 구원 혹은 안전, 건강을 말합니다.
악에서 건지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결국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복음은 우리를 악에서 건져 내십니다.
악에서 건져내면 그걸로 끝일까요?
우리에게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그전 처럼 산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은혜의 구원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악에서 건져냄을 받은 우리가 악함 속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을까요?
저는 결혼을 생각 했을 때 배우자의 가정을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배우자의 가정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배우자의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내의 가정은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아내는 가정복음화와 위해서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녀를 볼 때 머리로는 이해는 됐지만 감정적으로는 많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이유는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복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 불편한 마음을 들게하는 분들이 생각난다면
기도하시고 실행에 옮기십시오.
성령께서 임하시면 몇 십년 동안 기도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복음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복음의 원어의 뜻은 유앙겔리온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자랑이어야 하며
나아가 우리는 이 복음을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연구
본문 마지막 부분은
로마서를 통틀어 핵심적인 모티브로 거듭 나오는 주제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모든 믿는 자에게”임할 수 있습니다.
믿다”와 “믿음”은 로마서에서 키워드들입니다.
3장 21절~ 4장 25절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믿다 뒤에 명확한 목적어가 없는 것 역시 로마서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믿음의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는 데
소극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언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워낙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상술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방편 삼아
“경건치 아니한자를 의롭다 하시는”(4:5)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지적인 동의가 배제될 수는 없지만,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의지의 행위에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일차적으로 일련의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한 인격의 신뢰입니다.
그렇기에 초점은
믿음이 결코 행위가 아니라
단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란
믿는 일이 발생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극단으로 흐르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는 역시 믿는 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내미시는 선물을 받은 응답이라고 해야 합니다.
칼뱅은 말합니다.
믿음은 “일종의 그릇”으로
우리는 그 그릇을 “비우고
우리의 영혼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것이다.
이와 같이
믿는 일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활동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든 우리에게 보상하실 의무가 있는
어떠한 공로나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로마서에서 거듭 나오는 또 하나의 모티브를 끌어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혜택을
믿는 자 모두”가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적이 있나요?
제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아내가 배속에 사랑하는 딸이 생겼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태명을 만나로 지었습니다.
중의적 표현으로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의 뜻과 우리 나중에 아빠 엄마랑 만나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 할 때부터 태어날 때 성장하는 과정을 알리고 싶어서
딸바보 소리를 들으면서 인스타에 페북을 연동시켜서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지인들이 그 만 좀 올리라고 했죠.
너의 생활을 너의 삶을 보고 싶다.
하지만 저는 딸에 관련된 사진과 정보만 올렸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타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말 소중하고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고 싶어서 어찌 할 줄 몰라서
하루 빨리 전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똑같은 것 같은데
자신은 매일 매일 다릅니다.
왜!!! 만나는 모양 자체와 시간과 행동 등
매일 만나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매일성경으로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주님께 아뢰이며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것과
상황을 찬양하는 그런 매일의 모습이 되고
삶의 모습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복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간다면
그 복음이 역동적으로 움직여 그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환경을 걸어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적용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올 수 있게 하고,
살아 갈 수 있는 원동력과 저의 정체성을 이끌고 가는 말씀 중
힘들 때 지칠 때 붙잡는 말씀입니다.
저를 지금까지 지탱하고 이곳까지 이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선교한국대회에서 김용의 선교사님은
수많은 청년들에게 이 말씀을 합니다.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은
그 누구도 변화 시킬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부끄럽다면,
복음이 불편하다면,
복음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면
오늘 당장 움직이십시오.
마지막으로
WEC 선교단체를 만든 C.T. 스터디는
비록 학교 규정상 교회는 출석했으나,
단지 의무감에서 교회마당만 밟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신앙은 주일에 입는 옷과 같아서 월요일에는 벗어도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주일은 주중에 가장 지루한 날이었다.
그것은 내가 신앙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C.T. 스터디는 복음이 자신을 변화시킨 후 가장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습니다.
“ 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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