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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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 말씀입니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할렐루야~ 우리 앞 뒤 옆사람과 인사합시다.
“지혜롭게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은 신앙에센스 마지막 시간.
전도와 선교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서론
여러분, 전도에 지혜가 필요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보면,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무식하게 전해도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실테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전도의 내용이 세상 지혜로 볼 때 미련해 보인다는 말이지
전도의 방법이 미련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말씀에서도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전도할 때 지혜로운 말로 설득하면 안된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전도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지
전도할 때 반드시 설득력 있는 말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이어트할 때
꼭 적게 먹는다고 해서 살이 빠지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다이어트 할 때 적게먹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다이어트 할 때는 무조건 많이 먹어야 합니까?
아니죠. 이 말은 다이어트 할 때 먹는 것보다
운동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말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위해 한 말들이
전도할 때 지혜없이 무조건 무식하게만 해야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전도의 지혜를 깨닫게 하셔서
각 사람을 가르치고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그래서 우리는 전도할 때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첫째, 무례히 행치 않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례하게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전도의 내용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 있찌만,
전도의 방법이 불편을 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선교단체에서 인도 불교 사원에서 ‘땅 밟기’를 하면서
통성 기도를 하여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큰 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하자 사원에 있던 사람들이
즉시 중단하고 떠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것뿐’이라며 당당하게 말해서
서로 불편한 시비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무례한 방식이 문제입니다.
어떤이는 이런 무례한 방식을 바울이 먼저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절대 무례하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의 관례대로 회당에서 강론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장의 요청에 따라 청중에게 말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읽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이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지금 교회의 모체가 되는 장소입니다.
그 곳에서는 회당장, 즉 지금의 담임목사가 성경의 뜻을 풀어
회중에게 가르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시간을 이용해 그들이 하는 것처럼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전도의 방법에 있어서 전혀 청중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무례하지 않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소동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시기했고,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를
이단이라고 여겨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아덴이라는 도시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덴은 주민보다 우상이 더 많은 도시였습니다.
마치 지금의 일본과 같습니다.
일본은 우상만 800만개가 넘습니다.
기독교도 800만 신 중에 하나로 함께 섬깁니다.
아덴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들은 아덴 사람들은
오히려 바울을 모시고 아레오바고, 즉 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
공적인 장소에서 말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바울은 안디옥에서도, 아덴에서도 절대
무례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종교심을 이용했고,
그들의 문화와 방식을 통해 접근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전도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는 절대 무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복음 담고 있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메시지가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게까지 전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지혜가 없는 전도입니다.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말하고, 들을 귀 없는 자에게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모두 잔소리로 들립니다.
그 잔소리를 거절하는데 계속 하게 되면,
그건 권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결국 폭력으로 느끼게 됩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잘못된 사랑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스럽게 전달될 수 있도록 전도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결국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풍성한 말씀으로 지혜롭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보라’ 이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말한 것은 복음을 들으라는 요청이지
복음 자체를 전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롭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와 인도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인도는 교회로 안내하는 것,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에는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고,
사람과 직접 성경에 관해 말하기엔 두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모두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성경을 잘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들음은 아무 들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성경을 아는 지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구약성경을 풀어 해석하면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예언되어 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반면에 아덴에서 바울은 성경을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속 시인의 글귀 2개을 인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철저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창조주 하나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자족하신 하나님)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나님의 주권)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하나님의 자존, 피조물의 의존)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십계명 1,2계명 / 나 외에 다른 신을 만들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인간의 죄와 회개)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심판)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부활을 통한 구원, 믿음의 요청)
바울은 이렇게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경의 핵심 내용을 모두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에는 복음의 내용이 듣는 사람에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을 듣는 사람에 맞춰서
부드럽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빚진 것으로, 심판은 불행으로,
구원은 자아실현으로, 구원의 목적은 자기 행복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덜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을 이런 요청에 맞춰서 수정하면
우리가 빚을 지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빚에 대한 부담이 없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예수 없는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하는 말이
이와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뭔가 깨끗하지 못해서 빚진 마음처럼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교회 다니면 예수님이
그 빚을 해결해 준 것처럼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마음껏 이루는데
전혀 부담이 없고, 그렇게 행복해 질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기 위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분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을 발견하고,
영원한 삶을 얻어,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귀하고 복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몇가지 감정은 비슷합니다.
마음의 평안, 자유, 행복.
그러나 그 목적과 의도, 궁극적인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 땅에서의 자아실현과 행복은 자칫하면
예수님 없는 자기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본인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서, 복음을 듣는 사람을 위해서
꼭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3월부터 이룸 바이블 아카데미를 시작합니다.
이번에 3개의 강의가 열리는데, 모두 성경에 관한 강의입니다.
성경의 파노라마는 성경 전체를 40개의 핵심내용으로 요약해서
40개의 내용을 율동으로 외우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룸성경학교는 성경의 개관을 좀더 깊이있게 다루면서
총 8학기에 걸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볼 것입니다.
구약 5학기, 신약 3학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첫번째 시간으로 율법서, 모세오경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배수진 간사님과 함께하는
매일성경읽기 입니다.
약 12주, 79일 동안 성경 전체를 1독하는 시간입니다.
이 강의는 특별히 온라인으로 진행합니다.
각자 집에서 저녁 10시에 함께 온라인에서 만나서
어떻게 성경읽는 습관을 만들 것인지
배우고, 실천해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익히고,
잘 알아야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유튜브를 보다가 ‘이국종 교수님’에 관한
영상을 몇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응급외상센터’라는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모티브로 했던 ‘이국종 교수님’의 영상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데.
제가 감명깊게 봤던 내용은, 그들의 헌신과 사명감이었습니다.
국가에서 지원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약 40명의 팀원들이 1년 12달 쉬지않고 일한다는 것을 보고,
너무 큰 감명과 함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으면,
일하다가 책상에서 과로사로 돌아가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왜 그렇게 열심이었을까?
그들이 일하지 않으면, 오늘 당장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삶과 가정보다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늘 제가 바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바빠야 할까. 내가 이것까지 신경써야 하나.
늘 일하면서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영혼 살리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마음속에는
‘목회자도 사람인데. 나도 가정이 있고, 내 삶이 있는데.
나도 쉬어야 할 권리가 있는데.
왜 교회는 나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일을 시켜도 제가 안하면 그만입니다.
정시 퇴근하고, 내일로 미루면 됩니다.
그럼에도 계속 일을 했던 것은,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명이라는 명분 뒤에 인정받고 싶은 교만,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 자기만족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내가 예수 만나고 이렇게 살 수 있음에 감사함으로
내 삶은 거저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헌신해도
사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이 되었고,
감사가 사라진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국종 교수님의 헌신과 열정를 보면서,
나는 영원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이렇게 불평 불만인데
저분은 이 땅에서 사라질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저렇게 수고하고 헌신하는구나.
왜 나는 더 중요한 것을 살리기 위해 일하는데
저분처럼 열심히 순종하지 못할까.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짜 영원한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그것이 지금 이땅의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전도의 지혜 세번째는,
복음을 믿는 지혜입니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보지 못한 곳을 설명하는 것과 가본 곳을 설명하는 것.
맛보지 못한 음식을 소개하는 것과 먹어본 음식을 소개하는 것.
이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진짜로 믿는 사람처럼 전했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소동을 일으켰지만,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결국 바다로 도망쳤지만,
그때도 바울은 담대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덴에서 수많은 우상들과 우상숭배자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바울은 늘 담대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확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이 굳건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정말로 믿는 사람처럼 전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누군가 우리에게 왜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냐고 물어볼 때에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봅니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지 궁금한 거에요.
그냥 말로만 하는줄 알았는데, 진짜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니깐
사람들이 결국 물어볼 거라는 거에요.
그러면 그때마다 온유하게,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담대하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시험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시험, 고난, 환난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믿음을 둔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 속에 소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물을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소망을 품을 수 있나요?’
그래서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을 표명하고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변화된 삶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깊은 확신과 진정한 기쁨이 우리의 삶의 특징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전히 전도의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나의 변화된 삶, 예수님을 향한 헌신, 복음에 대한 확신.
그로 인한 기쁨이 늘 충만한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특징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징’이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 특징이 뭐에요?
우리 옆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너는 특징이 뭐니?”
제가 특징의 의미에 대해서 AI한테 물어봤어요.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별한 성질이나 모양”이래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관해 물어볼 것입니다.
저 사람 특징이 뭐야?
아, 저 친구는 오로지 교회밖에 몰라.
맨날 예수님 얘기만 해. 근데 미친것 같진 않던데.
일도 잘하고, 똑똑하고, 성품도 좋고, 사람 괜찮아.
그런데 왜 그런걸 믿지? 바보가 아니고서는… 궁금하지 않아?
우리는 복음을 아는 지혜가 아니라 믿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지혜로운 질문으로 복음을 전할까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질문하도록, 소망에 가득찬 삶을 사는게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 소망이 없어 방황하는 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전도의 지혜는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전도와 선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전도는 같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다른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보통 국내에서,
선교는 해외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나라 사람끼리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고,
다른 나라 사람은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같은 나라에 살지만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청소년, 초등학생들과 대화 가능하십니까?
그들이 쓰는 언어 이해하시나요?
어떤 유튜브 보다가 알았는데.
무지컬. 피지컬도 뇌지컬도 없는 사람.
쟤 무지컬 쩐다.
손절미. 손절 치고 싶은 특징
쟤 맨날 지각하는거 손절미 있다.
테무인간. 일은 열심히 하는데 퀄리티는 별로인 사람.
쟤는 맨날 바쁘기만 하고, 은근 테무인간이야.
한플루언서. 한숨을 너무 크게 쉬어서 주변에 영향을 많이 주는사람.
아유~ 야, 한플루언서 또왔다. 또왔어.
랜선생님. 비대면으로 영상으로 만났지만 큰 가르침을 주는 사람.
유튜브 댓글 보다가 랜선생님 만났잖아.
수발새끼. 여행갔는데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수발들어줘야 하는 사람
야, 이번에 수발새끼 몇명이야?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내에서도 다른 문화권에서 전도할 때는
선교의 자세를 가지고 전도해야 합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전도할 때는 토착화 선교라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 문화에 적응해서, 그 문화의 언어, 관습, 생활양식 등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문화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선교, 의료선교, 미용선교, 학원선교, 직장인선교 등
다양한 선교회가 있습니다.
축구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그 문화에 적응해서 같이 친교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하늘의 문화권을 내려놓고, 이 땅의 문화권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지혜를 본받아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로 내려가야 합니다.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의 시간과 그들의 삶에
우리의 일부를 맞춰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중등부 사역을 할 때, 제일 효과적인 것은
학원 전도였습니다.
학교 앞에서 전도하고, 토요일마다 좋은 곳을 데려가도
결국 자신들의 삶으로 직접 들어오지 않으면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밤늦게 10시 11시까지 학원에서 늦게 끝나는
그들의 삶으로 찾아가서 떡복이 먹고, 국밥 먹으면
아이들이 정말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으로 찾아오지 않으면서
계속 우리들의 시간표에 맞춰서 교회에 오라고 하면
그들은 잔소리로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그들의 시간표에 우리의 삶을 맞춰야 합니다.
노숙자를 전도하려면, 노숙인 쉼터도 찾아가고,
직접 노숙도 해보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노숙인 전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노숙인처럼 살아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공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공감하셨듯이
우리도 그들의 삶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들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것을 그들의 관점에서 왜 필요한 것인지
진실성 있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찬양팀 준비해주세요.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목마름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화려한 말이나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전도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이룸청년 여러분,
우리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전도의 지혜로 그들의 삶에 다가갑시다.
우리가 이 고백을 담아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찬양 - 공감하시네
기도제목
무례하지 않는 지혜, 성경을 아는 지혜, 복음을 믿는 지혜, 예수님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변화된 삶과 복음에 대한 확신이 우리 삶의 특징이 되어, 이웃들이 먼저 우리의 소망에 관해 질문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 모이는 동기들의 만남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넘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귀한 교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전도팀과 올포단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통성기도
우리가 무례하지 않은 지혜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경을 아는 지혜를 준비하는데 더 깊은 열정과 헌신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복음을 믿는 지혜,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변화된 삶이 이웃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과 예수님을 향한 헌신이 삶의 특징이 되어, 주변 사람들이 먼저 우리의 소망에 대해 질문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입술의 고백으로만 그치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는 진실한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모이는 동기들의 만남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흘러넘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귀한 교제의 시간 되게 하시고, 이 만남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아직 동기들과 친밀함의 끈이 묶이지 않는 청년들이 동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서로 안에 지혜를 주시고, 연약한 자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교회의 전도팀과 올포단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파트 주민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공감하며,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마무리 기도와 헌금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전도의 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례하지 않은 지혜, 성경을 아는 지혜,
복음을 믿는 지혜,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변화된 삶과 예수님을 향한 헌신이 삶의 특징이 되어,
주변 사람들이 먼저 우리의 소망에 대해 질문하게 하옵소서.
또한오늘 모이는 동기들의 만남 가운데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넘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귀한 교제의 시간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교회 전도팀과 올포단을 통해
주민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공감하며,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전도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고,
영혼 구원을 위한 귀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헌금이 전도의 지혜를 배우는 데 쓰이게 하시고,
특별히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사역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예물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구원에 이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의 삶에 먼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광고
축도
이제는 우리를 공감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전도의 지혜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변화된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예수님처럼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복음을 살아내기 원하는
여기 모인 모든 이룸청년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