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2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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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구
지난 주 월요일에 제가 수원을 친구들과 함께 여행삼아 다녀왔는데요. 특이하게도 제가 뭐 어렸을 때부터 알던 친구라던가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아니고, 게임에서 만난 중국인 일본인 친구들 세명이 한국에 찾아와서 같이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이 친구들은 다 일본어만 쓰는데 한국어를 잘 몰라서 제가 통역도 해주고 이런저런 안내도 해주면서 수원 화성도 보고왔는데요.
아무래도 이 친구들이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다보니까 같이 게임을 할 때도 저는 중국어 일본어를 이 친구들한테서 배우기도 하고 이 친구들은 저한테서 한국어를 조금씩 배우기도 했습니다. 언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니까 언어에 대해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많이 느낀 친구들이에요.
저는 음악 쪽이나 아니면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처럼 남들이 보면 “아 저렇게도 친구를 사귈 수가 있구나”싶은 친구들이 주위에 많이 있는데요, 물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려고 하지만, 살다보면 알고보니 나쁜 친구였던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가령 음악 쪽에 종사하다보면 술 담배하는 사람들이 불량한게 아니라 굉장히 선량한 사람들이었구나 싶을 만큼 기상천외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때가 많이 있었는데요, 음악 쪽 지인들 중에는 불륜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렵겠구나 싶어서 멀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희가 친구를 사귈 때에도 어느정도는 가려서 사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할 때에는 사람들 가리면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죠.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크게 줄 수 있는 친구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을 굉장히 조심해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한2서
요한2서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인 요한2서의 말씀도 마치 친구를 가리는 것처럼 사람을 가르는 모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10절 말씀을 보시면요,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당시에 유대 문화권에서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주로 사막, 초원처럼 기본적으로 정착생활보다는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에게서 환대하는 문화가 많이 있는데, 이스라엘도 사막 지형이었고 또 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그네나 여행자를 환대해서 잘 대접하는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도 보시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이것이 가능한게 기본적으로 돈 한푼 안가지고 다닌다고 해도 어느정도 나그네를 환대해서 대접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어느정도 정착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극 초창기의 교회는 다들 나그네, 여행자의 행색으로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나그네로서 대접을 받으면서 또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널리 전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10절에는 오히려 환대하지 말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11절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건 굉장히 이상한 말이에요. 유대인들도 예를 들면 사마리아 인들은 절대 환영하지 않았거든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대하는 것처럼 문전박대 해버려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대체 누구를 문전박대 하라는 것이냐, 하고 보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미혹하는자,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자,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교훈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문전박대 해버려라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면, 오히려 환대해서 대접하고 예수님 잘 믿으라고 가르쳐서 보내면 되잖아요? 심지어 성경에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라고 할 정도로 성경은 나그네와 여행자를 대접하는 것에 힘쓰라고 말하는데 왜 문전박대 해야하는 사람이 있는걸까요?
이것은 차라리 예수님을 안 믿거나 모르거나 하는 사람이면 복음을 전하면 괜찮은데, 여기서 적그리스도, 미혹하는자라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왜곡해서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다시한번 읽어보시면,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쳤기 때문에,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에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짜 믿음이 아니라 지나쳐서 왜곡된 믿음을 가지고 전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가짜 믿음이 교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에 교회에 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종교가 다르면 나아요. 저희 교회에도 문에 보시면 “신천지, 이단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되어있지 불교 신자, 이슬람 신자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안 적혀있어요. 불교, 이슬람교에 있으면 적어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상한 교훈을 전하지는 않을겁니다. 애초에 믿음이 없으니까 저희가 복음을 전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신천지와 같은 믿음을 왜곡하는 이들은 어떻습니까? 안 믿는 사람한테 포교하는게 아니라 교회와서 포교해서는 이상한 믿음으로 교회를 병들게 하기 마련입니다.
이단에 대항하는 것은 사랑과 계명
이단에 대항하는 것은 사랑과 계명
그럼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4-5절 말씀을 보시면,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먼저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녀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 여자여, 부녀여 라고 하는 표현은 이 편지를 서로 돌아보면서 읽을 교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라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죠? 그리고 자녀는 그 교회의 성도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단과 거짓 믿음에 대항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보시면 이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구약에서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변한적이 없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씀이 어디 새로이 내려온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일은 어디 새로운 일을 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해주신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6절을 보시면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명하신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명에서 지나쳐서 말하는 교훈이 이상한 것이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해석은 필요하나 지나친 교훈을 삼갈 것
해석은 필요하나 지나친 교훈을 삼갈 것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해석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일단 성경이 쓰여진 시기가 아무리 빨라야 2천년 전이고, 또 한국의 문화와 언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중동, 특히 유대-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쓰여진 것이다 보니까 저희의 문화와 맞지 않거나 하는 부분이 생길 때 성경에 해석이 필요한 순간들입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헬로!”하면서 손 흔들고 인사하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랑 문화가 안맞고 한국에서는 그게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반대로 미국 사람들이 저한테 무슨 강아지 부르듯이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을 까딱이는게 또 저한테 받아들이기 힘든 문화였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손등이 위로가면 “비켜라 꺼져라”라는 뜻이 돼서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해요. 이처럼 문화가 다른 부분에 있어서 그 손짓과 말하는 것들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팔레스타인의 2천년전의 상황에서 쓰여진 것을 감안하고, 어느 정도 저희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해석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핵심 내용, 핵심 교훈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지만 오늘 날에 와서 성경에 이거 먹지 말고 저거 먹지 말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라는 그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아주 핵심 적인 가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 죽어가는데 일 하면 안된다고 지켜보고만 있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실제로 간음 안했다고 머릿속으로 온갖 간음하는 상상하고 있으면 그건 간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셨던 것처럼, 성경의 핵심 가치를 찾아서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필요합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두가지 핵심가치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셨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여기서 벗어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애쓰고 또한 형제자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애쓰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결론
결론
그래서 오늘 함께 기도하실 때에, 먼저는 교회 안에서 저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교회가 아닙니다. 내 형제자매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혹여 조금 삐질 수 있고, 조금 마음 상하는 일이 서로간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구요.
또한 저희 교회가 함께 이웃사랑하기에 힘쓰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못쓸 정도로 서로간에 누가 어디 사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개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한국도 옛날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어서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아주 큰 환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환대하기를 잊어가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통해 얼어붙은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구요.
마지막으로 저희가 하는 이웃사랑을 통해서 이 나라가 허구헌날 서로 싸우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정말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나라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엔 교회들이 막 정치적으로 메가폰을 잡고 “저저 나쁜 놈들을 몰아내야합니다!”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저는 그런 의견보다는 저 사람이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이 있던것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예수님이 저희를 변화시킨 것도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처럼, 저희도 사랑으로 나라를 변화시켜나가는 것임을 믿고, 이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