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23 주일오후예배 사무엘상 15:20-29; 시편 102:26-28;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7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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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15:20-29 시편 102:26-28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는 7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질문하면 같이 답해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7문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존재와 영광과 복되심과 완전하심에 있어서 본래 스스로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족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며, 불가해하시며, 어디든지 계시며,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며, 지극히 의로우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풍성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후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수 있게 되서 영광입니다. 부족하지만 강하신 우리 주님을 이 설교를 통해 함께 알아가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있는데요. 속성이라는 말을 바꿔서 말하자면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불가해성’, 하나님을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주신만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존성’, 하나님은 의존적이지 않으시고 기원이 없으신 분이시다 라는 것을 지난 시간까지 배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셨고, 자신의 어떤 모습들을 나타내셨는지를 우리가 앎으로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현대에 와서 교회에 은연 중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나 관념은 우리와 친근한 존재로 우리에게 항상 웃음을 지으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분으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는 가장 첫 번째의 우선순위는 피조물인 우리와 하나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하나님은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이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갈텐데요. 오늘은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보통 이 말을 쓰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쓸 때가 많은데요.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 그리고 성향 등이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은 변하는 것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잘 안 바뀐다고 생각했던 천성이나 성격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고, 특히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변화인 생각과 가치관도 있습니다. 사람이 지난 일을 두고 후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이것이 옮은 것이고 맞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잘못이었다거나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었기에 후회를 합니다. 후회의 사전적 의미도 “과거에 잘못한 일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한탄하는 행위”입니다. 이 “후회”라는 것도 사람은 변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도 변하는 분이실까요? 성경을 볼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변하는 분인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창조하는 것에 있어서도 창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조 상태로 옮기신 것,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고, 진노하시고,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만을 받으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것 등등 마치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와 우리가 하나님께서 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순전히 우리의 시선과 관점으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바로 ‘불가해성’,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적인 감정과 유사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은 영이심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손’, ‘발등상’, 하나님께서 ‘보신다’, ‘거니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는 분,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과 위로를 가져다주는지 함께 알아가보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 먼저 읽은 말씀인 사무엘상 말씀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 더 정확하게는 사울과 아말렉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대적한 일을 두고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모든 것, 남녀와 어린 아이, 심지어 유아와 모든 짐승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아말렉과 전쟁하러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수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울은 겐 족속이 아멜렉과 달리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선하게 대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휘말려 진멸 당하지 않도록 떠나가라고 말해주기까지 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사울에게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합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정말 훌륭한 왕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겐 족속이 함께 진멸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고,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성들을 진멸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었습니까? 아말렉의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떻게 합니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아말렉 왕인 아각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했다고 합니다. 바로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을 남겨 전리품으로 삼은 겁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배우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은 모두 하나님의 전쟁으로 전쟁에서 이겨 얻은 전리품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군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인 사울,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인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척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불순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반응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보이듯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지만, 후회하셨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우리의 관점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상에서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알고 계셨지만 결국 사울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인 ‘슬픔’이 얼마나 큰지 후회하셨다는 것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울은 분명 처음에는 사무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부분적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은 남기는 불순종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사울의 이러한 행동은 어쩌면 합리적이라고 볼지도 모릅니다. 좋은 것들은 남기고, 하찮고 가치가 없는 것들은 진멸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겁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 부분적인 순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사울이 불순종한 것을 안타까워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무엘 또한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주시겠다고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애굽에서 태어난 무수한 이스라엘 자손들과 출애굽 후에 주어진 가나안 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통해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니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백성들을 이끄는 왕으로써 변하지 않고 항상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보기에 좋은 것들을 보자 그 즉시 변하였고,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사울은 깨닫지 못하였는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사울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사울은 자신을 찾아온 사무엘을 보자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불순종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어떻게 들려오는건지 사울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들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세우지 않으셨냐고 하면서 아말렉 자손을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불순종하였냐고 사울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에 사울은 백성이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하게 할 수 있도록 좋은 것들을 진멸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자, 사무엘은 그 유명한 구절인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점치는 것과 우상숭배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사울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았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고 이실직고하면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자 요청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심판을 내리셨다고 말하고 돌아섭니다. 이런 사무엘을 붙잡고자 사울은 그의 옷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옷을 찢지만, 사울이 그의 죄를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익 앞에 무너졌고, 불순종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이렇게 신실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사울과는 달리 오늘 본문의 29절에서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는 달리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심으로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인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고, 오늘 말씀의 사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그랬냐는듯이 약속을 저버리고, 불순종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단 한번도 거짓말한 적이 없으십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매순간 거짓말하고, 변개합니다. 아담을 미혹할 때에도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선악과를 주시지 않는거야.”라며 거짓말하였고, 죄를 지어 사탄의 종이 된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 그 책임을 묻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좋아서 해놓고선 하와의 핑계를 대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이 없으시고 절대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선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잊으시지 않고 계속해서 지키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을지언정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시점에서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다고 하면 어쩌면 하나님이 경직되거나 고정되어서 마치 식물인간과 같이 아무것도 안 하시는 완고함이나 굳은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는 분으로써 언제나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서 배웠듯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이런 자연현상조차 무엇을 나타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불변성은 하나님의 완고함이 아니라 견고함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불변성을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우리처럼 하나님께서 하기 싫은 것을 꾹 참으시면서 인내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변성은 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같은 한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간 안에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며, 시간이라는 것이 없으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영원’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상태가 영원입니다.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항상 현재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쉽게 설명하자면, 커다란 일직선 위에 우리는 어느 한 지점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일직선을 걷고 있기에 지나간 길, 가고 있는 길, 앞으로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저 일직선일 뿐입니다. 그분은 일직선 자체를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영원입니다.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동일하십니다.
시간에 있어서 영원이라면, 공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편재, 즉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느 한 공간에만 한정적으로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공간에서든지 동일한 한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 공간에만 있을 수 있고, 또한 어느 공간마다 우리의 모습과 역할이 달라지곤 합니다. 회사에서는 사원이고, 집에서는 부모, 자식, 형제, 자매라는 모습으로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계시고, 모든 공간에서 동일한 분이십니다. 공간을 초월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공간마다 가변적이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우리는 시공간 안에 머물며 계속해서 다른 무언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일 수도 있고, 좋은 아버지, 좋은 직장인, 좋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안식과 만족을 구하며, 무엇인가를 찾고자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독립성을 통해서 살펴봤듯이 하나님은 그냥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써 모든 것이 자신 안에 그냥 있습니다. 그분은 더 나은 무엇인가가 될 필요도 없으시며,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찾을 필요도 없으십니다.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셔서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 안에서 오직 안식과 만족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달리 되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참된 있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냥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독자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으시는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시고 무엇인가를 하시겠다고 작정하셨다면 그 일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사야서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46:9-11 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음을 이야기하시면서 자신이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시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이방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만 봐도 신들은 하나님과는 달리 올림푸스라는 한 공간에 한정적으로 머물며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과 똑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정말 문자 그대로 후회하기도 하며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변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 그리스 로마 신들 뿐만 아니라 여타 신화들만 봐도 다른 이방신들은 항상 불변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신들을 향해 제사를 드리는 이유 또한 무엇입니까? 바로 신의 분노를 달래 복을 베풀어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인 신들이 복을 베푸는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이방신들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과 이방신들을 결코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는 달리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계획하고 작정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왜인지 모르게 가변적이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분은 신구약 성경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만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배신하고 패역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연관되어 있으십니다. 이분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자 아버지이십니다. 불변하시는 분이 변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입장이 되었을 때 과연 누가 자신을 꺼려하고, 심지어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으며, 배신한 이력도 있는 자들과 함께하려고 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그러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누가 그 큰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감수하고자 하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이것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의 은혜이며 자비이자, 사랑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고 작정한 것을 변치 않고 성취하시고자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자신을 선택하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도우십니다. 시간을 초월한 무시간적 존재인 분이 시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공간을 초월하고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신 분이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이 보여주는 것은 성막과 성전 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 한정적 공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분의 은혜와 의지를 보여줍니다. 불변하시는 분이 가변적인 백성들과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직접 자신이 통치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왜 가변적인 인간들로 직분자를 세우시고,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습니까? 바로 자신의 일에 자신의 백성들을 동참시키고자 하는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순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현대인들은 주식과 코인 등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에 투자하고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주식이나 코인에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왜 자신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내가 붙지 않을 수도 있는 시험에도 내가 정성을 다해 공부하는데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꺼이 믿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가 변할 수 있는 것들에도 우리의 돈과 마음을 쏟아붓는데,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그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이 아닐까요?
두 번째로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02편은 소제목에 나와 있듯이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102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102편을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그러한 고통 중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이렇게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바로 하나님 외의 것들은 다 변하고 없어지겠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뜬히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반석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불변성이며, 이 불변성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 불변성 교리를 묵상하시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결코 어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하는 우리, 그리고 고통 중에도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공통의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다는 것은 완고하다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가변적인 것들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우리가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에게는 더 큰 관심과 마음을 쏟아붓는 우리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반석이신 그분을 언제나 의지하고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를 모든 환난 중에 구하실 수 있으신 이는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삶에 관심이 있으시고,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