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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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35-50
“신령한 몸으로”
찬송가 165장 ‘주님께 영광’
2025. 1. 31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신령한 몸으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부활을 가르치는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이 있어요. 하나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36절부터 50절까지 답변을 하는데요. 먼저 36절부터 41절까지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42절부터 50절까지가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자, 오늘 본문 3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36절 시작,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아멘.
바울이 답변을 하면서 시작부터 뭐라고 하냐면, 욕을 해요. “어리석은 자여” 이 말이 헬라어로 “아프론” 이라는 밀인데요. 우리 말로 하면 “야이 바보야!” 이런 정도의 말이에요. 누가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 하는 말이죠. ‘야 답답하네.. 이거 바보야 뭐야?’ 이런 짜증섞인 표현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교인들이 지금 부활의 방법을 질문하고 있거든요. 도대체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을 한다는 것이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그러니까 바울이 답답한 심정을 먼저 표현했어요. 야이 바보들아. 그러고나서 뒤에 뭐라고 덧부이냐면, 씨에 대한 비유를 합니다.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씨는 땅에 뿌려져 죽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납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면, 씨가 죽은 것은 아니죠. 씨의 효소가 활성화되고 배아가 성장함에 따라 씨앗이 발아 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걸 모르잖아요. 시체를 매장하듯이 씨를 땅에 파묻으니까 씨가 꼭 죽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바울이 씨를 비유로 드는 겁니다. 씨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뒤에 싹이 나오듯이, 사람도 죽으면 그 뒤에 부활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부활을 하느냐는 질문은 바보같은 거예요. 그냥 죽으면 되는 겁니다. 죽기만 하면 다시 살아나요. 부활하기 위해서 내가 뭘 할 필요가 없어요. 뭘 할 수도 없고. 그냥 죽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 겁니다. 언제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남들은 다 부활하는데 나는 안 하면 어떡하나? 걱정 안 해도 돼요. 다 부활합니다.
자, 그러면서 밑에 37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37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씨가 죽으면 나중에 알곡이 되죠. 씨가 죽기 전의 육신이라면, 알곡은 부활한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뿌리는 씨는 아직 죽기 전의 육신이에요. 죽어야만 장래의 형체, 부활한 육신이 되는 겁니다. 죽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밀이나 쌀이나 다른 알곡의 종자에 불과해요.
37절 끝에는 “알맹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씨앗”이라는 말이에요. 죽기 전에는 우리가 뿌려진 씨앗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죽어야만 비로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어떻게 하면 부활한다? 그냥 죽으면 된다. 아시겠죠?
다음으로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겠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느냐”는 겁니다. 우리 시신이 다 썩어서 흙이 되어 버리는데, 또는 화장을 해서 완전히 재가 되어버리는데 도대체 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을 하느냐?
이것은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가졌던 육신 그대로 다시 부활을 하는가? 그러면 장애가 있는 사람은 장애가 있는 그대로 부활을 하는가? 예수님은 손에 못 자국이 있는 그대로 부활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도 장님으로 죽은 자는 장님으로 부활을 하고, 팔다리가 없는 사람은 팔다리가 없는 몸으로 부활을 하는가?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을 할까요? 그 답을 우리는 43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4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아멘.
우리가 죽을 때는 욕된 것으로 죽어요. 그러나 다시 살아날 때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을 때 모습이 어떠하든지, 다시 살아날 때는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찬란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어떠한 수치나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는 우리의 육신은 어떠한 장애나 연약함이나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몸입니다. 더이상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고, 성적 욕망에서 자유롭고, 질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보지 못하던 자들은 보게 되고, 걷지 못하던 자들은 걷게 됩니다. 어떠한 부족함이 없는 영광스러운 몸, 그것이 우리가 부활할 때 입는 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라는 말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요. 밑에 44절에 보니까,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과 신령한 몸, 육의 몸이 죽으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요. 이것을 밑에 45절에는 아담과 그리스도로 비유를 합니다. 자, 4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멘.
아담과 그리스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아담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됐습니다. 이것을 생령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랬어요.
생령은 헬라어로 “프시케”라는 말인데, 이 말은 “살아있는 존재” 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그러니까 지극히 육적인 존재예요. 자기가 받은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고, 자기 생명이 끝나면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에요. 헬라어로 “프뉴마”,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잽니다. 자기가 받은 생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생명을 받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아담과 같은 육의 몸으로 살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살리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때 우리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몸이 썩어서 흙이 되고, 불에 타서 재가 될지라도,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 몸을 재창조 하실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가진 적 없던 건강과 복락을 가지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아프지 않고, 영원히 찬란한 그 몸으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함께 평강을 누릴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