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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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고린도전서 15:29-34
“차례를 따라”
찬송가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2025. 2. 17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부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반드시 육체의 부활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나중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차례대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때 믿는 자들도 부활하고, 안 믿는 자들도 부활해요.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부활한 그대로 영생을 누리고, 안 믿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육체의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숫자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하나의 파당을 이룰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안 믿어요.
자,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들이 뭘 합니까?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고 있어요. 자, 29절 말씀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아멘.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아요. 그러니까 세례를 안 받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대신 세례를 받아준다는 겁니다. 이른바 ‘대리 세례’죠. 여러분, 대리 세례가 의미가 있습니까? 당사자가 세례를 받아야지 남이 대신 받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성경 어디에도 세례를 대신 받아도 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푭니다. 이 사람이 물로 씻어진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사람의 죄를 씻기셨다. 이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제 반드시 세례는 신앙을 고백한 당사자가 받아야 합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대신 받고 있어요. 완전히 헛짓거리죠. 그래서 29절 끝에 바울이 책망하는 거예요.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어찌하여 죽은 자들을 위하여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하느냐?
바울은 교인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이유에 주목을 했어요. 이것들이 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을까? 가만히 보니까 부활을 바라고 하고 있거든요. 육체의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을 바라고 세례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어이가 없죠.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하기를 바라고, 대신 세례를 받는 이상한 짓을 하니까 어이가 없어요.
여러분,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부활은 세례를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일어나는 거예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 부활합니다. 세례 못 받고 죽었어도 부활해요. 다만 그 사람이 세례를 받았건 못 받았건, 그 사람이 믿음이 있었다면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고, 믿음이 없었다면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는 일은 그래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세례를 대신 받아준다고 해서 이미 죽은 사람한테 없던 믿음이 생깁니까?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책망하고 있어요.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을 위해 헛짓을 하는 이중적인 모습. 우리의 신앙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뭐가 잘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러한 모습은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믿으려면 끝까지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돼요.
사랑하는 여러분, 끝까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믿은 걸로 끝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마침내 영생의 부활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아멘.
바울은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의미해요. 바울과 사도들은 언제나 복음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서 그 어떠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있어요.
바울은 실제로 수많은 목숨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위험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데요. 감옥에도 여러번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배가 침몰하기도 하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등등 온갖 위험이란 위험은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위험을 당하면서도 바울이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되리라. 이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바울은 실제로 천국을 본 사람이에요.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보면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천국을 보고 들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죽고나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갈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실제로 천국을 봤고, 소망을 갖고 살았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천국을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어요. 살아서는 절대로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죽어야만 천국으로 들어가서 보는 거예요.
천국을 본 사람은요, 이 땅의 모든 것이 시시해집니다. 모든 미련이 사라지고 모든 애정이 식어버려요.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바울이 말하죠.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내가 본 천국에 빨리 가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을 본 사람의 특징이에요. 빨리 죽고싶어 해요. 그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천국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은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한번만 쫙 보여주시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그 즉시 믿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쉬운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느껴지는 복음으로써 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김종숙 권사님의 간증이 참 은혜가 됩니다. 한 주 전에 권사님이 마른 복어를 쪄서 드셨는데, 그 안에 독이 들어있는 바람에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는데, 의식이 없는 동안에 이런 환상을 보셨답니다. 동굴 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환한 빛이 거기에 있더랍니다. 저기가 어디냐고 권사님이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그런데 권사님 마음에 저기가 천국인 것 같은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또 한쪽에 보니까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모였어요. 그 모습이 너무 짠해 보여서 동굴로 가지 않고 깨어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간증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천국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선명하게 천국을 보여주셨다면, 권사님이 회복에 대한 모든 의지를 상실하셨을지 몰라요.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내가 한 걸음만 가면 갈 수 있는데, 이 땅에 매일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넘어가버리셨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시지 않고 밝은 빛으로만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저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시고, 권사님이 ‘저기가 천국인가’ 하고 인지할 정도로만 알게 하신 거죠. 아직 이 땅에서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리고 교회와 앞으로 권사님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될 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권사님에게 천국을 가리시고 회복시켜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감지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끝에,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 그랬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바울이 날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사각오, 오늘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과 타협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음 뒤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고, 후로는 또한 부활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어떠한 위험 가운데서도 천국소망, 부활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맡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