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2:1-10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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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다림
어떤 사람이 중국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런 질문. 선교사님은 그 많은 어려운 사역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감당? 그 비결?
저는 오직 기도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과 상황을 움직이도록 했을 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했을 따름.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 있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사람을 움직이는 상황을 움직일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되기 때문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처럼 보임. 느헤미야 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 주변의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일. 느헤미야 개인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으로 성을 회복하는 일, 단지 건축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 일에 참여하는 많은 백성의 마음이 움직여야 했음
이미 1,2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많은 포로의 귀환이 이루어졌음. 예배도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방치되어 있는 것은 아직도 포로로 귀환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하나되지 못했고 우선순위가 바로서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들의 식어진 가슴을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도록 만든 것은 너무 어려운 일.
그러나 그 보다도 어려운 일 첫 번째 일이 있었음. 이 한 가지 일이 이루어져야 다음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순관원으로 매어 있는 느헤미야가 자유로와지는 것. 그가 아무리 선한 일을 꿈꿔도,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메어 있는 한, 그 모든 것은 이루어질 수 없었음. 그가 첫 번째로 해야할 일은 아닥사스다의 허락을 받고 축복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
당시 아닥사스다 왕은 고집이 세고, 잘 변화되지 않은 융통성 없는 인물로 알려짐. 더군다나 느헤미야는 이 아닥사스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술 관원이었는데, 그 지책은 쉽게 변할 수 없는, 여러 사람으로 바뀔 수 없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자유롭게 자기가 하도록 허락을 받는 일은 마치 산을 움직이는 것 같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와 아닥사스다왕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느헤미야를 자유롭게 했고 또 그에게 줬던 소명이 이루어졌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
이 짧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어떻게 느혜미야를 통해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떤 자세로 기도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임했을까요?
첫째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오래참음의 은사를 주시되, 지금 당장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받는 가장 큰 유혹은,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지금 당장 주어지길 원하는 것. 또 나의 때가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짐. 느헤미야는 1장에서 예루살렘의 형편의 소식을 듣고 수일동안 울며 금식하며 기도했음. 그 직후에 어떤 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금식하며 울며 기도했을 때, 직후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즉시로 아닥사스다에게 달려가 자신을 보내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어요. 그져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했을 뿐. 그러나 느헤미야는 여전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 2장 1절을 보면 이때는 아닥사스닥왕 20년 니산월. 우리 시대로보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기도가 시작한 때가 언제? 1장 1절. 아닥사스다왕 20년 기스르월. 11월 중순,12월 중순. 그러므로 기스럴월 니산월 4개월 가량의 시간이 흐른 것. 이 4개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그런데 사실은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잇었습니다.
엄청난 일은 ? 느헤미야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것. 이것이야 말로 엄청난 일. 기도의 사람은 아무런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1장에 나타난 기도의 모습이 4개월 동안 이어졌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얼굴에 근심이 있다는 것을 아닥사스다왕이 발견한 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어떤 슬픈 소식을 듣고 잠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하루 슬퍼할 수 있습니다. 또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일주일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 슬픔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이 심리적인 질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슬픔이 나의 마음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의 증거입니다. 또 나를 하나님께서 그일과 사람을 향한 중보자로 사명자로 부르셨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를 중단한다면, 이 슬픔 또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계속 1장에 나타난 슬픔과 눈물의 기도 민족을 위한 안타까운 기도를 계속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아니 너무나 자주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대개는, 오랜 시간,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운 시간에 응답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자녀들을 장난감 상점에 데리고 가면,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보아 보이고,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원하는 것이 계속 바뀝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를 수 있도록 뜸을 들이는 것입니다. 좀 더 기다려봅니다. 아이들이 시간을 갖고 다니다보면 정말 원하는 것을 고르게 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을 사주려고 합니다. 아이의 분별력이 아직 연약하고 어리기 때문에, 아직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풀리 고르는 것을 부모는 기다림으로써 제어해줍니다.
우리가 때로 원했던 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했던 것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왔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냉정하게 침묵.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님은 침묵. 도리어 예수님은 거절.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만 보냄을 받았다. 마치 인종을 차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말씀을 하시면서 거절.
더 나아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라는 너무나 냉정한 말씀으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대답함으로,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옳습니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여인의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주님의 능력은 한 없이 높이며,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고백이었음.
그 때 주님이, ‘네 딸이 고침을 받았다. 가라 네 딸이 나음을 얻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애매히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기다림의 기간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소원을 정결하게 하며, 진정 원하는 소원인지를 확인시키고, 또한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주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4개월동안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을 때, 하루하루 기도하는 느헤미야는 아마 가슴이 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간을 보낼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분별하게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때는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의 슬픈 감정을 발견하는 때였습니다. 본문 2:2,3
느헤미야 2:2–3 (NKRV)
2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아닥사스다왕은 느헤미야가 병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 술관원 직책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왕의 생명과 직결된 직위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임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인 이 술맡은 권원입니다. 만약 술관원에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감정이 불안하고 수상한 상황이라면, 자신의 생명에도 위협이 있을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반역의 도구가 된다면 바로 술관원이 반역의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병도 확인하고 감정도 살피는 습관이 이 페르시아왕들에게 있었던 것. 바로 아닥사스다왕의 눈에, 느헤미야의 근심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일부러 드러낸 것일까요? 아니요, 그는 도리어 감추려 했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감췄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술관원의 이런 어둡고 부정적인 표정과 감정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 그래서 아닥사스다왕이 네 얼굴에 보니 근심이 있다고 했을 때 느헤미야가 무척 두려웠던 것입니다.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2절에 크게 두려워 했다고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순간, 바로 이때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때라는 것을 분별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닥사스다왕이 질문했을때 그는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제가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담대한 대답입니다. 어쩌면 느헤미야가 자신의 생명의 보호만, 안위만 생각한 사람이었다면,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마음 속에 근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부정할 수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솔직하게, 제가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다. 라고 인정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위험할 지라도.
이것은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가는 것 과 같습니다. 왕이 부르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죽을 수있는 생명을 내거는 도전이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슬픔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는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어디서 지혜가 발견됩니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떤 정치적, 민족적 이슈나 문제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은 문제로 해석. 이유를 말하죠. 특별히 조상들을 존경하는 이 페르시아의 전통을 이용하여, ‘조상들의 그 성이 폐허가 되어 있는데, 어찌 제가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페르시아 왕에게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저희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고,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렸고 민족의 정체성이 말살되어 처참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왕에게 말했다면 왕은 반역이라는 시각으로 느헤미야를 바라보았을 수 도있습니다. 불필요한 갈등이 생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지금 개인적인 문제, 조상들의 성이 폐허가 되어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와라 는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서, 너희는 세상에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와 말씀하셨습니다. 얼핏보면 이 순결과 지혜는 때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순결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 그대로 다 자기속 마음을 털어놔야지 순결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봅니까?
그러나, 진정한 순결은 지혜로운 순결인 것입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뱀이 아이큐가 높아서? 지능이 높아서 그런 이야기?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뱀은 아이큐가 아주 낮습니다. 그런데 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뱀에게 있는 지혜는 위험을 피하는 지혜입니다. 위험이 다가오면 기가 막히게 숨고 피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복음을 전하면서 불필요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세상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합니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해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향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한과이 세상에, 우리는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논쟁, 불필요한 오해, 불필요한 갈등에 휩쌓이지 않도록 뱀같은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조상들의 성이 폐허가 되었으니 어찌 제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정직하고도, 순결하며 동시에 지혜롭게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 지혜는, 4개월동안의 오랜 기도,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도속에 성령의 사로잡힌 사람의 영혼에서 나오는 지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근심의 표정을 지었던 순간은 절대절명의 위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그 위기를 기회로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뜻하지 않고 예상하지 않은 방법으로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여러분에게 닥친 위기가 무엇입니까? 위기를 기회로, 은혜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여러분 위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느헤미야에게 기회를 주셔서 왕의 마음을 바꿔 주셨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묻습니다. 느헤미야 2장 4-5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태산과 같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왕의 마음이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요청을 들어주려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때 느헤미야는 잠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짧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할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머뭇거릴 수 없었습니다. 머뭇거림은 의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짧은 기도는 갑자기 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지난 4개월 동안 계속된 기도의 연장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위기가 찾아오면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평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한 순간의 위기 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묵도했다는데, 이것을 화살기도, 전보기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한 매순간의 상황속에서 순간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긴 기도만 기도가 아닙니다. 주차하고 시동을 끄고 잠시 30초간 기도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길을 가면서 주님 오늘도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 세상 어떤 순간, 어떤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짧은 순간에 세상의 통치자앞에 간청하기 앞서, 만왕의 왕, 하나님의 왕 앞에서 잠시 기도했습니다.
기도생활이 깊어지고 습관화 되어 위기의 순간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이 짧은 순간에 사람을 의지 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왕의 마음을 움직였고 함께 했습니다.
왕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안에있었습니다. 2장 6절입니다.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왕은 느헤미야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아니 느헤미야의 계획을 축복했습니다. 신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느헤미야야 언제 돌아오겠느냐?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봇물이란 것은, 채널이란 것은, 저수지로부터 음지에 까지 물을 끌어내는 수로를 말합니다. 그 물이 수로를 통해 갈 수 밖에 없듯이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지도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붙잡으시면 그 길로 밖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뜻 대로 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2가지를 요청했습니다. 7-8절에 나온 요청 사항 2가지.
첫째 자신이 유대 감독으로 직접갈 수있도록
둘째, 이 성벽이 재건되는데 필요한 권한과 물자를 제공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느헤미야의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느헤미야는 기도함과 동시에 계획하고 조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은헤로운 손길이 함께 하실때, 우리의 계획과 준비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
때론 우리에게 아무 계획을 하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개 우리가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계획하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하십니다. 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과 머리에 그 일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계획하는 일은 불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계획했고, 또한 계획하며 기도했습니다. 잠 16장 9절을 보며,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는 대해 오해하곤 합니다.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은 계획이 필요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은 계획 자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이 그 계획을 무너트릴 수 도 있고, 다른 계획으로 인도할 수 있고, 그 계획을 통해 또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능력, 기도하며 계획하며 준비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에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닥사스다왕이 질문했을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어느 정도 기한이면 되겠느냐? 그럴때, 제가 뭐 그때 가봐야 할 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한을 정했습니다. 왕이 허락하는 기간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딱 기한을 정했어요
뿐만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추천서 같은 것입니다. 느혜미야는 이미 어느 지역에서 반대와 저항이 있을 거라는 것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어느 지역이 총독이 틀림없이 반대할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또, 성벽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자재, 자신이 거할 수 있는 집까지, 이 기회에게 왕에게 삳삳히 보고 한 것입니다. 치밀하면서 담대한 면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하고 준비한 것에 넘치도록 응답하셨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느헤미야가 구한 것에 더하여, 군사까지 파견해주었습니다. 군대장관, 마병까지. 이것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은 우리가 구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에 언제나 더 넘치도록 부워주시는 분이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 나라가 처한 위기가, 또 여러분이 각자 처한 위기가 있습니까? 기도가운데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위에 넘치도록 역사하실 분임을 믿고 기도합시다.
느헤미야의 이 성공적인 시작의 열쇠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닥사스다왕이 외교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일을 조치를 해줬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과분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다른 목적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느헤미야는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2장 8절 하반절.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 은혜로운 손. 그것이 느혜미야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양극화된 이 나라, 침체되는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나라와 교회가 구해야할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이겨낼 수 없는 위기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태산같은 문제가 여러분의 앞을 꽉 막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함께 하시면, 위기가 기회가 되고, 하나님은 넘치도록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마음을 품고 , 끈질기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구할 때, 그분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손길이 여러분에게 임할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나아와 삶 가운데 태산과 같은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정치적, 신앙적으로,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이 주신 때를 분별하게 하여
구하는 것이 상으로 응답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함께 하기를 구할 때,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도록 인도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