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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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명령
 
요나서 1:1-2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두 가지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니느웨가 회개하도록 길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요나처럼 불순종하는 엉터리같은 사람을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요나서에서 버림받는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요나서의 중요한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저 사랑만 주시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 주권을 가지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바로 이 점을 잘 잊어버리는데 요나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우리의 왕, 곧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요구합니다.
요나에 대한 설명은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스불론지파의 가드헤벨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아밋대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2세에게 이스라엘의 번영과 회복에 대해서 예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요나는 당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의 선지자들은 심판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데 반해서 요나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도울 자가 없음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말씀은 수직적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주권과 절대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편에서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성격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충성스럽게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어떠하든지 요나는 순종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먼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맡겨진 사명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느웨큰 성읍임을 밝히십니다. 니느웨가 큰 성읍이라는 것은 지금 맡겨질 일이 결코 간단한 일이거나 가벼운 일이 아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요나가 해야 할 일을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전 성경에서는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개역개정은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성경에 따르면 “쳐서 외치라”가 바른 표현입니다. 이 말은 그것을 대항하여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단순한 설교나 돌려서 거슬리지 않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호령과 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요나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되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후에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을 쳤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요나의 행동은 어쩌면 요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서는 요나의 행동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산헤립 왕이 앗수르의 수도로 삼아서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수도였던 곳이 니느웨입니다.
그러한 곳에 가서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정말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님을 요나는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처음 한두 번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을 해줍니다. 그리고도 잘못을 하면 벌을 주게 됩니다. 지적하고 벌을 주는 것은 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외치라는 것은 니느웨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것입니다.
요나는 그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에 그렇게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에게도 회복을 선포하게 하셨던 하나님이셨기에, 니느웨를 용서하실 하나님의 뜻을 요나는 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원수의 나라가 용서함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도망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가 원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듣기 힘든 말씀을 하실 때가 있고, 하기 싫은 일을 맡기실 때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결혼을 금지하셨습니다. 호세아에게는 음녀와 결혼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를 위해서 애곡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에게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명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사도행전 9장 13-14절입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에게서 받았나이다”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은 너무나도 부당한 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주님의 명령을 외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는 니느웨에 어서 하나님의 심판과 유황불이 내리기를 소원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분명 요나처럼 우리도 원치 않는 명령을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보다 원치 않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소중한 것처럼 니느웨도 소중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모두가 아담의 후손들이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도 니느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었고, 심각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풍성하신 은혜가 이스라엘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죄인인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하는 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를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기도 하지만, 순종하기에 어려운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십시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겠지만, 결국 아나니아가 안수한 후에 사울은 교회의 가장 충실한 종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하시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형통하고 잘되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도 원하시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면, 우리에게 오는 가난과 궁핍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건강하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우리에게 질병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마냥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 안에서 계획된 일이라면 우리는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고난을 달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러한 계획과 뜻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쉽사리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명령이 우리를 괴롭게 할지라도 따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생각에 누가 원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도록 만들겠습니까?
사람은 결코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보고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셨습니까?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으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겠다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지혜로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철저히 굴복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저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드십니다.
주님은 요나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명령하실 것입니다.
큰 성 니느웨로 가서 대항해서 외쳐라. 원치 않는 명령을 주실지라도 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던 주님의 명령을 기억해서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주님의 명령이 아닌 것에 우리의 뜻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생각과 뜻을 품으십시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그것을 원하는데 잘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요나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의 전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봐야 합니다.
요나서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고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 요나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구원함을 얻게 되는 이방인들이 나옵니다.
놀랍게도 둘 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회개할 기회와 환경을 하나님께 받아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요나는 불순종하였으나, 끝까지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으시고, 요나를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셔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자 붙잡으셨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요나서를 집중해서 이 점, 곧 택하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순종하지도 못하지만, 또는 순종할 마음도 갖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에 들어 있다면,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성경이 요나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에 대한 가르침을 요나서를 통해서 바르게 보고, 배우고, 또한 그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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