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드를 품은 말을 하십시오.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1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시편 52:1-9(구약 840쪽)
설교제목: 헤세드를 품은 말을 하십시오.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말 속담에는 말에 관한 속담이 여럿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그 외에도 더 많은 말에 관한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부터 사람들에게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로부터 말은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말은 때때로 주문과 같은 것이 되어서,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무속인을 데려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그 저주라는 것도 결국은 말로 하는 것인데 말이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저주의 말을 축복의 말로 바꿔주십니다. 또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도 말씀으로 만드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성경을 통한 글이나 말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보면 말이라는 것이 인간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 사회의 경우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대통령이라는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도 말을 통해서 움직여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은 그 대통령에 있던 자가 거짓말을 계속 늘어 놓고 있어서 문제가 되곤 하지만, 본래 정치를 하는 것도 말을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봅니다. 또 간혹 저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되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그분에 필요한 것들을 말씀하신 것일 테지만 분명한 것은 말이라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의 힘이라는 것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건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좋은 말들은 우리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하고요. 나쁘고 악한 말들은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한동안 뉴스 등을 통해서 갑질에 관한 논란이 자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곤 했는데요. 그것 역시 주로 말이라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것을 봅니다. 힘이 있는 이들이 말로써 힘이 없는 이들을 핍박하여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말이라는 것이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서운 힘을 지녔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2편의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이는 구약성경 사무엘상 22장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인데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을 다니던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인기가 치솟자 왕권에 위협을 느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놉이라는 땅에 있던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침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골리앗의 칼을 내어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알아보고는 곧장 사울 왕에게 달려가 다윗이 그곳에 머물러 있음을 전합니다. 이에 사울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 하였으나, 사울이 도착한 때는 이미 다윗이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다윗을 숨겨주었던 사실을 캐묻는데, 옆에서 다윗의 위치를 고발했던 도엑이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던 사실을 낱낱이 밝히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사울 왕의 분노를 산 아히멜렉과 그곳에서 있던 여러 제사장들은 사울의 손에 죽게 됩니다. 도엑이라는 인물의 말이 결국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은 그와 같은 도엑의 행동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좀 더 전문용어로 ‘헤세드’를 저버린 것임이라 말합니다. ‘헤세드’는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인데요. 이는 우리말 성경에서 사랑, 인애, 자비 등으로 번역되는데요. 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깐, 결국 도엑과 같이 사람을 죽이는 말들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하면, 혹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관계를 헤치는 종류의 말들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느냐고 했을 때요. 성경은 그것이 헤세드 곧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행동에서 온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그것은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행위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엑의 말과 행동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이익에 관계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엑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려줌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고자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상과 다른 변수를 만나게 되자 어쩌면 자신이 거짓을 고한 것으로 여겨질까 하여 또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득을 볼 수 있기를 바래서, 다시 아히멜렉을 물고 늘어져 결국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헤세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인생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헤세드 곧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그것에 감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의 이익을 구하고 그것만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인생은 도리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오늘 우리가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따른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구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구하기 이전에 오늘 우리의 삶이 허락되었다는 것이 사실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어제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오늘 우리가 눈 뜨고 이 하루를 또한 살게 될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길지 모르지만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늘 우리가 눈을 뜨고 숨을 내쉬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은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건 당연한 것이고, 그것 이상의 복을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길 원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할 결과라 할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말이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담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왜 도엑과 같이 누군가를 위험에 빠트리고 관계를 헤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말은 달라져야 합니다. 도엑과 같이 누군가를 곤경에 빠트려서 내 이익을 구하는 일에 힘쓰는 말이 아니라, 이 하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날임을 깨닫고 오늘 그것에 감격하고 그 분은 찬양하는 것에 또한 그것을 함께 나누는 일에 힘쓰는 말들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말이 또 이 하루가 그와 같이 귀한 말들로 채워지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누리는 시간들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