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2. 주일4부예배. 급진적 부르심, 과감한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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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2:1–4 NKRV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서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르와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향했고, 그 순종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었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실제로는 얼마나 ‘과감한 것’이었고, 당시의 상식으로 보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는지’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오산교회로 오기 전 대전에서 사역을 하던 시절,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해외 유학 기회까지 얻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는 분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보기엔 “모든 걸 갖췄다, 완벽하다”는 부러움이 절로 나왔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제게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목회자의 길로 가라는 강한 부르심을 느꼈어요. 연구원과 유학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내려놓고 가는 게 맞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무모한 선택 같았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왜 좋은 길을 포기하느냐?”며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고, 안정된 기반을 과감히 내려놓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브라함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하고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이처럼 참 급작스럽고 파격적입니다. 우리는 안정된 직장, 재정적 여유, 익숙한 삶과 같은 것들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네가 붙잡고 있는 것, 네게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내가 인도하는 길로 떠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정말 그 길이 내게 가장 복된 길이라는 걸 믿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의 우르와 하란,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은 어떤 환경이었을까. 왜 하나님은 굳이 그를 불안정한 길로 내모시듯 부르셨을까.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급진적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걸까. 이런 질문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누구든지 안정된 직장, 재정적 보장, 익숙한 삶의 루틴을 선호하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길로 이끄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게 익숙한 것들, 네가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내가 지시할 전혀 새로운 길로 떠나 보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그 길이 진짜 복된 길이라는 걸 믿고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오늘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할텐데요, 왜 데라는 멈추었고 아브라함은 떠났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무모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뜻 과감히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임을 확인해봅시다.

본론

(1) 우르와 하란의 역사·문화적 배경
먼저 본문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출발점인 갈대아 우르(Ur)라는 도시가 어디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도) 우르는 고대 수메르 문명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이라크 남동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은 또 다른 말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약 5천 년쯤에 시작되어 천 년 이상 지속되며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그 시기에 관개농업을 통해 곡식을 안정적으로 생산했고, 활발한 무역으로 도시가 번성했으며, 천문학·수학·건축 등 학문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습니다. 지금 발견된 점토판 자료를 보면 우르 인근에서는 이미 글자를 사용해 세금 징수 내역과 상거래 내역을 기록했고, 달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 달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건축술도 매우 발달해서, (ppt)‘지구라트’라 불리는 거대한 신전 형태의 건물을 세웠는데, 오늘날 유적지 발굴을 통해 그 웅장함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통 고대 도시나 사회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그 지역의 신을 섬기는 신전을 중심으로 정치·경제·문화가 긴밀히 돌아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지요. 당시 우르 지역에서는 “달의 신”을 지배 신으로 여겼는데, 우르에 사는 사람 치고 달의 신을 섬기지 않고 살아가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하는데, 이는 데라와 그의 아들들 역시 원래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데라는 단순히 우상을 섬기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까지 전해집니다. 도시를 관장하는 ‘최고의 신’과 관련된 물건을 제작·판매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술도 좋아야 했고, 해당 신에 대한 헌신도 보여야 했겠지요. 그만큼 이 일은 경제적·사회적 보상이 확실했을 터입니다. 즉, 데라와 그의 가정은 달의 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우르에서, 우상에게 헌신하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던 데라와 그의 가정이 느닷없이 완전히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이주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11장 31절을 읽어봅시다.
창세기 11:31 NKRV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어찌된 일일까요? 사도행전 7장 2절과 3절을 한 번 찾아봅시다.
사도행전 7:2–3 NKRV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여기서 하란은 데라가 일가족을 데리고 이주하던 도중에 머물렀던 도시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이 우르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이를 보면, 사실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를 먼저 받았고, 그 영향을 데라가 받아서 “그렇다면 가나안으로 가 보자”며 온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섰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대 전승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보면 아브라함은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제작하여 파는 상인이었으니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우상들을 보며 자랐고 “이건 사람이 돌덩이와 나무로 만든 것에 불과한데,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신전에 큰 우상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본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신이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아브라함의 묵시록 1장)
어느날 데라가 운영하는 가게에 한 부인이 밀가루 한 바구니를 갖고 와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청했다고 합니다. "이것들을 저 우상들에게 바치렴."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막대기를 들어 그 우상들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막대기를 가장 큰 우상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도대체 네가 우상들을 향해 무슨 짓을 한 것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리지요. 한 부인이 고운 밀가루 한 소쿠리를 갖고 와서 우상들에게 바치기를 원했답니다. 제가 그렇게 하려고 했더니, 한 우상이 '내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우겼어요. 그러자 다른 우상이 '무슨 소리, 내가 먼저 먹을 거야.' 하고 우겼어요. 그러자 가장 큰 우상이 일어나서 그 우상들을 막대기로 때렸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지금 나에게 장난치는 거냐? 어떻게 걷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 우상이 다른 것들을 부숴놓았겠느냐?" 그러자 아브라함이 외쳤습니다. "아버지, 지금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아버지는 우상들이 걷지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을 알면서 왜 숭배하나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데라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한 부인이 밀가루를 바치겠다며 찾아오자, 아브라함이 가게에 있던 작은 우상들을 모조리 깨뜨리고, 가장 큰 우상 손에 막대기를 쥐여 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아온 데라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브라함이 “저 큰 우상이 다른 우상들을 막대기로 두드려 깨뜨렸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버지는 “그게 말이 되느냐,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다른 우상들을 부수겠느냐!”고 화를 내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게 포인트입니다. 아버지도 우상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면서, 왜 그들을 신처럼 섬기시나요?”라고 말이지요.
이렇듯 어려서부터 우상의 허무함을 깨달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내가 참된 신이다. 네가 새로운 땅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아버지에게 이를 전하며 “우상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삶의 기반을 다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지역으로 떠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설득을 애써 무시하던 데라는 여러가지 불행한 일을 겪습니다. 창세기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를 한 번 봅시다.
창세기 11:28–30 NKRV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이 불행한 일을 겪었으니 얼마나 큰 충격과 아픔이었겠습니까? 장남이었던 하란의 죽음, 그리고 막내 아들이 좀처럼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일을 차례로 겪으며 데라는 드디어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가나안으로의 이주를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가 “하란”이라는 중간 지점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정착해 버렸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 또한 아버지를 따라 하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구요. 하란(Haran)은 우르와 비슷하게 달의 신 숭배가 활발했고, 무역로가 교차하는 도시여서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했습니다. 당시 지도로 볼 때, 하란은 북서쪽으로 가면 훗날 히타이트 제국을 일으키는 민족이 살던 지역이 펼쳐지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하란을 벗어나는 순간, 데라와 그 가족은 지금껏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와 문화, 그리고 달의 신이 다스린다고 믿었던 세계를 벗어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특히 하란은 “달의 신”이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지역의 사실상 끝자락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면 더 이상 달의 신의 보호와 축복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달 신이 다스리는 지역 밖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껏 믿고 의지해왔던 가장 중요한 삶의 기반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데라는 노련한 상인이기도 했어요. 하란은 교통로와 무역로가 활발히 이어지는 요충지였으니, 그가 “이 정도 입지라면 내 수완을 발휘해 크게 성공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굳이 가나안까지 가야하나? 생각하며 하란에 머물러버린 것이지요.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던 데라는 모든 것에 있어 부족함이 없던 우르를 떠날 만큼 분명한 동기가 있었지만, 결국 하란에서 고착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가나안을 향한 여정이 한동안 지체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급진적 부르심: “너 자신을 위하여 떠나라”
시간이 흘러 데라는 결국 하란에서 죽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데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도 분명 이 말씀은 순종하기 쉬운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프라가 갖춰진 ‘잘 발전된 도시’, ‘재정적 안정’, ‘익숙한 환경과 문화’를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라는 말씀이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비유하자면, 요즘 시대에 최고의 연구소나 대기업에 합격해 안정된 지위를 확보해 둔 상황에서, 갑자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로는 “레크 레카(לך־לך)”, 즉 “너 자신을 위하여 떠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들 하지요. 하나님은 “그 길이 사실은 네게 복이 되는 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지는 12장 2~3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너로 말미암아 온 땅의 족속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마디로 “너의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이것이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이다. 그러니 너를 위해 떠나라.”하시는 것이지요. 내가 이끌어가고 내가 책임지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건 무모해 보이는 결정입니다. 우르나 하란에서 달 신 숭배와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아브라함이, 나이 칠십오 세에 가족과 재산을 다 이끌고 전혀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쉽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 앞에 내려둡니다. 그리고 과감히 길을 떠납니다. 성경은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8 NKRV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3) 아브라함의 믿음 형성과 시행착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렇게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믿음이 생겼을까?”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은 애초부터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 문화 속에서 자란 데다, 시행착오와 두려움도 많았다고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하지요.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우상을 깨뜨려 우상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우상의 헛됨에 대해 고민하고, 참 신을 찾는 갈급함이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직접 “내가 참 하나님이다. 너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해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은혜를 통해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것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기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안전하고 복된 길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겉보기에 우르와 하란에서 모든 안락을 포기하고 떠나는 일은 과감하게 보였지만, 오히려 아브라함은 “잠시 뒤의 일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내 인생을 꾸려 나가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운전대를 맡기는 편이 진짜 나에게 유익이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자발적으로 “떠나야지”라고만 결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오셨고, 그 말씀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제적 계시와 약속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익숙한 것을 버리는 위험한 선택을 “결국 내게 가장 좋은 길”이라 확신하며 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라가 우르에서 하란까지 움직이기는 했으나 끝내 하란에 머물렀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거나 그분의 음성을 ‘정면으로’ 체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참 하나님이 우리를 가나안으로 부르신다”는 말을 ‘간접적’으로만 들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하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데라에게 직접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임하셨음을 시사합니다.
그 결과, 데라는 “하나님이 진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기 어려웠고, 우상 숭배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날 동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도시 문명과 달 신 숭배, 자신의 상업적 수완과 익숙한 언어·문화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있던 데라는, 하란이라는 중간 지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아들의 설득을 통해 어느 정도 “이전과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껴 우르를 떠났지만, “직접적인 체험이나 믿음”까지 가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익숙한 경계선(하란)을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났고, “내가 너를 복 주는 통로로 삼겠다”는 언약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확신을 품게 됩니다. 데라가 간접적인 정보만 들었을 뿐 실제로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만물을 통치하시고 살아 계신 분이 직접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그분의 손에 운전대를 넘겼던 것입니다.
결국 이 차이가 아버지 데라와 아브라함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데라는 “거의 갈 뻔했으나” 하란에 머무르다 생을 마감했고, 아브라함은 “더 낯선 세계이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이면 가야 한다”는 순종으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갔습니다. 전자는 여전히 자신이나 우상·달 신 문화가 주도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후자는 “직접 만난 참 하나님”께 인생을 맡긴 결과, 믿음의 조상이요 열방이 복을 받게 만드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직접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다른 이의 체험으로만 들은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믿음의 격차가 생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결국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가?”라는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4) 현대 청년들에게 주는 도전과 적용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르나 하란에 머물 것이냐,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냐”라는 비슷한 갈림길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청년이라면 안정과 편의, 재정적 보장을 더 강하게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가 붙들고 있는 건 내려놓고, 낯선 길이지만 내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실 때, 우리는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건 너무 무모하다”고 주저할 수 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기는 게 내게 가장 좋은 길”임을 믿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생의 운전대를 잡으시는 게, 잠시 뒤의 일도 모르면서 계획 세우는 우리보다는 훨씬 정확하고 안전하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책임져 주심을 경험했고, 점차 믿음이 깊어져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시도록” 과감히 삶을 열어 드려야 합니다. 둘째, 무모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결정적 순간마다 우리는 “이게 과연 옳은 길인가?” 의심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고, 결국 나에게 복을 주기 원하시는 분”임을 믿고 움직이면,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열매를 보게 됩니다.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도,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결단한 예는 주위에서 종종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던 그 청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원과 유학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내던지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내 소중한 인생 주도권도 내려놓겠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더니, 그 길 위에서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가장 좋은 길이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길이구나”를 깨달았듯이, 우리도 같은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장기려(1911~1995) 박사는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로 불릴 만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안정과 성공을 스스로 내려놓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의술을 펼칠 인재가 매우 부족하던 때라, 그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유능한 외과의사로 촉망받았습니다. 의료계에서도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안정된 고액 연봉을 받거나 해외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그의 앞길은 보장된 듯했지요.
그런데 장기려 박사는 신앙에 기초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섬기라”는 마음이 그의 가슴에 계속해서 울렸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각종 유혹과 안락함을 내려놓고, 서울이 아닌 피난민이 몰리던 부산에서, 부유층 상대가 아닌 정말 돈 없는 환자들을 무료로 돌보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병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진짜 어려운 환자에게는 돈을 받지 말자”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국민건강보험의 전신.

결론

정리하자면, 창세기 12장 1절에서 4절은 “하나님이 주권을 쥐시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달 신 숭배가 가득한 우르와 하란을 떠나,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흔히 보기에 무모해 보이는 이 결정은, 사실 “너 자신을 위해 떠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담긴 초대였지요.
아브라함은 그 길이 “결국 나에게 최선임”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주도권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해 하란에서 멈췄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삶을 내어 맡길 수 있었고, 온 인류를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운전대를 잡겠다. 네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내 말씀을 따르면, 그것이 바로 네게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과연 아브라함처럼 선뜻 “예, 주님” 하고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이 무모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소망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창세기 12장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우르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감한 결단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 우리도 안정되고 익숙한 환경과 세속적 안전망 속에서 살며,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움켜쥐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길이, 사실 내게 가장 복된 길임”을 알게 해 주옵소서. 혹시 그 길이 무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면 “예, 주님” 하고 과감히 순종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부어 주십시오.
오늘 이 시간, 혹시 마음 한 편에 “이 방향으로 부르신다”는 강한 감동이 있지만, 여러 이유로 망설이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본을 기억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게 도와주십시오. 데라처럼 중간 지점에서 머무르며 주저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삶의 운전대를 내어 드리고, 끝까지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각자의 우르와 하란이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너 자신을 위해 떠나라”라고 초대하실 때, 결국 그 길이 “나를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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