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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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0-12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2025. 3. 5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의 본문과 같은데요. 지난 시간에는 5절부터 12절이었죠. 오늘은 10절부터 12절입니다. 바울의 여행계획에 포함된 내용이에요.
지난 시간에 바울이 자신의 여행계획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죠.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다가 마게도냐를 거쳐서 고린도로 갈 건데, 내가 고린도에서 얼마 동안 너희랑 머물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갈 곳이 있는데, 거기로 나를 보내주라.
오늘 본문 위에 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그랬어요. 내가 갈 곳으로 보내주라는 거죠. 바울이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이었어요. 여기에 도움을 주라는 거죠. 헌금도 잘 모아주고. 내가 예루살렘에 잘 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라.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에베소에 전도의 문이 열려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열심히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데 집중을 하고, 나중에 때가 되면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때가 언제냐? 오순절이 끝나면, 그 때 가겠다는 거예요.
어쩌면 바울은 오순절이 끝나고 나서도 더 있고 싶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에베소에서 지금 복음을 전했다 하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니까, 최대한 여기서 사역에 집중을 하는 게 유익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에베소에 바울의 대적자들도 같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바울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 믿고 더이상 아데미 여신의 신상 모형을 사지 않으니까, 신상을 만드는 업자들이 바울을 대적하려고 하거든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여기서 내가 오순절이 끝날 때까지 밖에는 못 있겠다고 예상을 한 거죠. 더 오래 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그래서 바울이 오순절까지만 에베소에 있고, 그 뒤에 고린도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바울이 지금 안 가고 고린도교회를 방치하기에는,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지금 너무 심각해요. 급한대로 고린도전서를 쓰긴 했지만, 편지는 갖고는 문제가 해결되기가 어렵거든요. 어쨌든지간에 사람이 직접 가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거예요. 고린도로 가자니 에베소가 아쉽고, 안 가자니 고린도교회가 심각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디모데를 대신 보냅니다. 디모데에게 고린도전서를 써서 손에 쥐여주고, 직접 고린도로 들고 가도록 시켜요. ‘디모데야, 네가 이 편지를 들고 가서 보여주고, 성도들을 잘 가르쳐라.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최대한 교회를 잘 케어하고 돌아와라.’ 이렇게 디모데에게 임무를 준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고린도전서를 들고 고린도교회로 가요.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디모데를 잘 압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사역을 할 때, 디모데와 실라가 나중에 합류해서 같이 교회를 개척했거든요. 개척멤법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디모데를 잘 알아요. 바울이 담임목사라면 디모데는 부목사거든요. 담임목사 대신 부목사가 교회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기는 보내겠는데, 걱정이 돼요. 왜냐하면, 지금 교인들 중에 바울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거든요. 거짓교사들에 미혹돼서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바울이 횡령을 했다고 의심하는 반대파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디모데를 배척할까봐 걱정이 되는 겁니다. 담임목사도 끌어내리려고 하는 판국에 부목사라고 가만 두겠습니까? 걱정이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거예요. 자, 오늘 본문 1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아멘.
디모데를 잘 대접해주라는 부탁을 해요. 너희가 디모데를 대접하는 데 조심해서, 디모데가 두려움 없이 너희 가운데 잘 있을 수 있게 해라. 아주 세심하게 부탁을 합니다. 또 밑에 11절에 두번째 부탁을 해요. 11절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두번째 부탁이 뭡니까?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주라는 거죠.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잘 대접을 해주고. 갈 때는 평안히 잘 보내주라. 이렇게 두 가지 부탁입니다. 이 두 가지 부탁이 사실 어려운 부탁이 아니거든요. 손님이 오면 누구나 이렇게 하잖아요. 환영해주고, 대접을 해주고, 또 갈 때는 웃으면서 배웅을 해주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손님이 와도 이렇게 해주는데, 하물며 디모데는 개척멤버예요.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열심히 사역한 사역잡니다. 그런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안 될까봐, 바울이 부탁을 한다는 자체가 기가 막히는 일이에요. 도대체 왜 교회가 이렇게 돼버렸나. 왜 교회가 사역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배척하고,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됐을까?
물론 진짜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교인들의 입장도 이해는 되죠. 그러나 바울은 잘못한 것이 없어요. 디모데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눈물과 땀을 쏟으면서 죽도록 헌신했는데, 교회가 등을 돌려 버렸어요. 얼마나 허탈하고 비참합니까? 저 같으면은 그냥 안 가고 말겠어요. 돌봐야 될 교회가 고린도교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갈라디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에베소교회, 신경 쓸 데가 많아요. 굳이 나를 싫어하는 곳에 왜 가겠어요?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아볼로가 그런 마음입니다. 안 가고 싶어해요. 12절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바울이 아볼로에게 디모데랑 같이 고린도로 가라고 몇 번이나 권면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 아볼로가 안 가겠다고 했을까요?
제가 고린도전서 1장을 설교할 때 아볼로에 대해서 잠깐 소개를 했었죠. 아볼로는 본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어요. 그가 어느날 우연찮게 에베소에 업무차 왔다가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도를 정확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업무를 끝마치고 고린도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이때 에베소 교인들이 아볼로에게 소개편지를 써줘요. 기왕에 네가 고린도로 갈 거면 거기서 고린도교회를 찾아가봐라, 하면서 소개편지를 써준 거예요.
그래서 아볼로가 소개편지를 들고 고린도교회로 찾아가죠. 그리고 거기서 교제를 하고, 또 기회가 될 때마다 강단에서 말씀도 전했어요. 외부강사가 왔다고 하니까 강단에 세워준 거죠. 그런데 교인들이 말씀 듣고 적당히 은혜 받은 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문제는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너무 말씀에 은혜를 받아버려가지고, 아볼로를 따르는 아볼로파가 만들어져 버렸어요. 파당이 생긴 겁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또 게바파, 그리스도파 교회가 분열이 되고 시끄러워지니까 아볼로가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어요. 고린도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얼마나 상처가 컸는지, 지금은 고린도에 다시 갈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내가 고린도에 절대로 안 갑니다. 내가 가면 교회에 분란만 더 일어나고, 또 바울파나 다른 파 성도들이 나한테 ‘이 새끼야 저 새끼야’ 할 텐데, 내가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딱 선을 그어버렸어요.
아볼로가 바울보다 언변이 뛰어나고 설교를 잘한다는 말까지 듣던 사람인데, 그런 대단한 설교자가 다시는 그 강단에 서지 못하게 됐어요. 이것은 교회에 너무나 큰 손햅니다. 바울이 어떻게든 아볼로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는데도, 마음이 돌려지지가 않아요.
여러분, 교회는 절대로 사람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됩니다. 어제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죠.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돼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교회를 떠나게 만들고, 교회를 미워하게 만들고, 다시는 교회에 얼씬도 하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태신자들을 품고 기도하는데, 그 태신자들 중에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많아요. 본래 우리랑 같이 신앙생활 했던 사람들. 그런데 상처를 받아서 떠난 사람들이 있죠. 우리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젭니다.
2023년 한국교회 통계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등록된 교인 중에서 출석을 안 하고 있는 교인이 29%나 됩니다. 100명 중 스물아홉 명이 이름만 있고 안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 스물아홉 명 중에 상처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 들어있어요.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을 교회가 떠나게 만든 겁니다.
아볼로 같은 사람도 떠나는데, 일반 평신도들이 버틸 수가 없죠. 교회가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광야를 방황하듯이 이 교회 저 교회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나와 맞는 교회가 있으면 거기 정착해서 거기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참 다행이죠. 소속교회는 달라졌어도, 믿음에서 떠나지 않은 거니까.
그런데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아요. 그들이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인생이 끝마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겠어요?
교회는 파당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설령 파당이 있다 할지라도, 서로간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와 안 맞을 수 있어요. 성경을 해석하는 면에서 안 맞을 수도 있고,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고, 또 정치적으로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안 맞다 할지라도, 정말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맞다면, 그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은 너무 잘못이 커. 그러나 그 사람의 눈 속에 티를 보기 전에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볼 수 있어야 돼요.
내가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도 나를 봐요.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보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는 섬기는 공동쳅니다. 누가 됐든지, 그 사람을 대하는데 조심하여서, 그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움이 없도록,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돼요. 오늘 말씀 제목이 뭡니까?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믿음의 형제들이 떠나가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도록, 그들을 품어야 됩니다.
물론 아볼로처럼 몇 번을 권면해도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그런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라도, 우리가 잃으면 안 되잖아요.
만날 때는 웃으면서 환영하고, 교제하고, 헤어질 때는 평안히 배웅하고. 너무나 당연한 건데, 당연하지 않게 되는 사이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뭘 조심해야 된다? 말을 조심해야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나 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래서 그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도록, 특별히 지금 교회를 떠나서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손길을 내밀어줌으로 말미암아,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고, 함께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