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요 생명이니
Notes
Transcript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서론
“와칸다 포에버” 어디서 나오신 말인지 아십니까? 바로 2018년의 블랙 팬서라는 영화에서 나온 가상의 국가 와칸다의 구호입니다. 이 블랙팬서가 나왔을 때 미국 흑인들이 엄청 좋아했다고 합니다. 서로 만나면 “와칸다 포에버” 이러면서 인사하고 자기들의 여권을 영화 속 가상 국가 와칸다의 표지로 꾸몄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이 영화를 본 아프리카 흑인들은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로 좋아했을까요? 의외로 아닙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미국의 흑인들만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근본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흑인들의 기원이 어디죠? 아프리카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노예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아프리카 정확히 어디서 온지 모른다고 합니다. 또한 아프리카가 잘 사는 대륙이 아니죠? 그에 비해 유럽이나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은 세계의 강대국들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의 흑인들은 항상 근본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어 같은 이민자이지만 자신의 출신 국가가 확실한 동양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개봉한 블랙팬서라는 영화는 미국 흑인들에게 하나의 근본이 되어주는 영화였습니다.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잘 살고 강한 와칸다라는 나라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앞서 말한 것 같이 자신들의 근본이 확실한 아프리카 흑인들은 별로 그리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도 영화에서 한국이 강대국으로 나와야 기분이 좋지 한국, 중국, 일본 섞여서 중국말하고 일본식 머리를 한 강대국이 아시아에 있다! 해봤자 기분이 좋겠습니까?
결국 근본이란 건 이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근본이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생각과 삶이 혼란과 방황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바로 교회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성경공부 때 말했지만 교회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마침내 유대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지만 마을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1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죽은 지 하루 이틀도 아닌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나흘이나 지났다는 것은 나사로가 정말 확실하게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장례식 기간이 삼일인 이유가 간혹 사람이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착각해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금같은 의료 측정 기구가 없어서 죽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삼 일 동안 장례를 치르며 진짜 죽었는지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나사로가 정말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기다리다가 확실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될 때에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확실해야 예수님이 사람을 부활 시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도착한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가 불과 오 리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오 리는 킬로미터로 1.9키로로 우리 축복교회에서 병목안 공원 정도의 거리입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을 위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왔었고 아마 거기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 다행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이 없었어도 1.9키로의 거리라면 언제든지 한 시간 안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쫓아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저번 설교 시간에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위해 목숨을 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에 문상객을 맞이하기 위해 마리아를 집에 남기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한 걸음에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고 슬픔을 토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계셨다면 오빠 나사로가 병에서 낫고 죽지 않았을 것이라 탄식했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사로를 살려달라 말합니다. 아마 마르다의 이 말은 믿음의 표현보다는 슬픔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라마 같은 곳에서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제발 내 애를 살려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23절의 말씀에 마르다가 24절과 같이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소원을 알고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예수님에게 나사로를 살려달라던 마르다는 24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니이다.” 이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장례식 같은 곳에서 “천국 가셨을 거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날거야” 하듯이 위로하시는 사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해서 만날 테니까 슬퍼하지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비록 마르다는 부활의 믿음이 없이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 입을 통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르다가 말한 대로 예수님이 구하는 대로 주실 것입니다. 바로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마르다에게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마 성경 구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언컨데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선포를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딱 들었을 때는 좋지만 곱씹어 볼 수록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문장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25-26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데 어떻게 믿는 자가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부활 그리고 생명의 개념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예수님을 따라 부활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더라도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25절 후반부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은 모두 아실 것이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 구절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구절은 우리에게 참 어려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죽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 구절은 바로 생명과 연결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25절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을 쭉 강해 설교로 들으면서 생명, 영생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의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 6장의 생명의 떡 설교, 10장에 선한 목자 비유, 그 외에도 정확한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이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에서 예수님이 말하신 생명과 영생의 의미가 단순히 육체가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의 의미가 육체적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생명, 영생을 받는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다는 생명, 영생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사망에서 벗어나 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인해 파괴되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삶에서 벗어나 의의 생명이 넘치는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죽음과 멸망인 지옥에서 영원한 생명인 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 모두 영원한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마르다의 믿음처럼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의 수준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삶에도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을 죄와 욕심으로 인한 죽음과 멸망, 지옥 같은 삶에서 건지시어 감사와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한 천국과 같은 삶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죄로 인해 사망한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백도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고 믿음의 증거로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멸망이 예정되었고 멸망 가운데 살아가는 내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과 죽음은 이 육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과 죽음은 이 삶을 넘어 저 천국과 지옥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 영생을 구하던 부자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 관리는 예수님에게 영생을 구했습니다. 이런 관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자 관리가 구한 영생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육체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로서의 쾌락의 삶을 영원히 누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구한 영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영생은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영생이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참 생명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직 탐욕으로인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 참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생을 사모하며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제가 최근에 취미를 가지게 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겠지만 바로 피규어 수집입니다. 이 피규어를 모으고 전시하기 위해 당근으로 전시장도 구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수집품이 그러하지만 피규어 또한 한 제품을 계속해서 팔지 않습니다. 한 동안 팔다가 단종 되고 다른 제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옛날에 나온 단종된 제품을 구하고 싶다면 혹시나 파는 가게가 있는지 알아보거나 중고로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해본 결과 대부분 그냥 중고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고 거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건의 상태? 중요합니다. 가격? 매우 중요하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짝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명품도 그러하지만 피규어 또한 중국산 짝퉁이 매우 많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분명 처음에는 똑같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피규어의 목이 막 휜다거나 팔이 말린다거나 색이 누렇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짝퉁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 또한 짝퉁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욕심으로 가득한 부자 관리와 같은 짝퉁 영생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부활과 영생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해 내 욕심과 탐심을 채우려는 짝퉁 영생과 부활은 짝퉁 피규어처럼 처음에는 진짜와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짝퉁을 드러냅니다. 진짜 영생과 부활을 가진 자와 삶에서 차이가 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진짜 부활과 영생을 알고 구하는 축복교회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