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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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란?
복이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7편은 축복의 시, 기도의 시등으로 분류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제는 ‘축복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민수기 6장에 나와 있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에 나와 있는 축복은 목적어로 “네게” 저와 여러분들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 시편 67편은 복을 받을 대상을 가리켜 “우리”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즉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복’을 거부하거나, 복이 죄악이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샤머니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복 신앙’때문일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99% 자력 구원 즉 고행이나 명상 또는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종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력’ 즉 ‘자신의 행위’에 있습니다.
구원이 자신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은 구원을 창시한 신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인본주의 신앙, 샤머니즘 신앙, 기복주의 신앙을 낳게 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신을 뒤로 제껴놓고 자신이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특정하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고행과 수행 자기성찰과 명상등으로 ‘복을’ 쟁취하려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 만약 하나님을 뒤로 제껴놓고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내가 만든 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께 기도하고, 그 분의 말씀을
바르게 묵상하고 배워나가는 신앙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C.S루이스가 쓴 스크룹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계시는 당신'을 향해 의식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시에는
우리는 즉시 궁지에 빠지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 받을 대상 ‘우리가’아니라 저자가 성경을 묵상하고
이를 통해 받은 영감을 통해 그려 놓은 ‘사단’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사단이라면 어떻게 인간을 타락의 길로 빠뜨릴 수 있을지에
대해 삼촌 사단이 조카 사단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독자인 크리스챤들에게
다양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성경에 계시에 놓은 그 하나님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때 사단은 궁지에 빠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참 좋으신 하나님, 우리 인생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지지합니다.
본문 1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거저 주신 선물로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 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길 원합니다. 어떠한 얼굴 빛일까요? 그의 복을 우리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아까워하는 인색한 얼굴 빛일까요?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얼굴 빛일까요?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육체는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지만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형상 즉 인격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점을 착안해 마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 앞에서 무언가를 너그럽게 주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 즉 그 속마음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뼈와 근육과 조직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그 예수그리스라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그것이 우리 인생에 참 복이라고 오늘 저자는 말씀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주의 도란 주의 길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고자 했던 복된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길’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2절 하반절은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백성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약은 행위로 구원 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가르침은 그런 측면에서 ‘복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한 번 더 본문 2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여기서 중요한 동사가 발로 “알리다”라는 동사입니다.
주의 도와 주의 구원을 알리다!
이 동사는 우리가 받은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세상에 알리는
능동적인 앎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열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알리게 하시는
수동적 앎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는 내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의
결정체 되시는 예수님을 나를 통해 알리고
계시다는 강력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복을
받는데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2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 구원에 대한
복이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길과 구원에 대한
복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 받는 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정서, 우리의 육체
우리의 건강, 우리의 삶, 우리의 번영등
전인적 구원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도’요, 주님의 ‘구원’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이 전인적
구원의 복을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받은 복을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십니까?
그렇다면 3절과 5절 말씀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3절과 5절에서 반복 사용되고 있는 “찬양하다”라는 표현은
좀 더 잘 해석해 본다면 “인정하다”라는 표현으로 재해석
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와 구원을 인정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하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찬양하라는 뜻은
이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믿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깨어진 세상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길 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다양한 아름다운 소산으로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다고 시편 저자는 말씀합니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엉겅퀴와 가시덩굴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이 쉽게 적용되지 않는
힘겨운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관계의
손상 마저도 죄로 인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라는
주의 도와 주의 구원을 경험했더니
그 깨어진 세상과 관계에 회복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를 통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2절의 말씀 “알리소서”의
함축된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먼저 경험하여 알게 하시고 그 안에서 누린 복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땅의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땅의 끝은 선민이라 자랑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 이방인들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표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땅의 끝은 어디입니까?
이 땅의 끝을 너무 거창하게 잡을 필요 없습니다.
내 남편, 내 부인, 그리고 내 자녀 가족을 넘어
회사 동료, 주변 이웃등
우리의 시야를 조금만 넓히게 되면
오늘 내가 받은 그 한량없는 은혜를
그들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깯닫게 됩니다.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가추지 못한 내가
그 한량없는 은혜를 누렸다면 그들이라고
그 ‘복’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시편 저자는
그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말씀을
시편 67편4절 말씀에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우리 눈에는 불공평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마지막 때에 분명 공평한 심판이요,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비
공기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는
일반 은총을 통해 공평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평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주의 도와 주의 구원이란
전인적 복음의 능력 또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땅끝에 있는 그 누군가가
공평하게 누리길 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어 바라크 ‘복’이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분을 의지하여
그 분을 예배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전인적 구원의 ‘복’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크의 뜻이 ‘무릅꿇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은혜라 믿으시지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세어 보시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주님을 찬양 즉 인정하시고
믿고 힘을 내시어
저와 여러분들이 공평하게
받아 누린 그 은혜를
다른 누구도 공평하게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때론 능동적으로
전인적 복음을 알리고
때론 수동적으로 그 전인적 복음을
알리는 통로로 쓰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