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두 길

누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4 views
Notes
Transcript
[서로 다른 두 길]
[서론]
제가 예전에 찬양형제랑 같이 읽은 책이 한권있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입니다.
이 책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 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전향하지 않아 가족들이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주인공 역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왔다가 다시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는데 국립묘지에 안장해야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생각할때 이 소설의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념이 이 사람이 진짜 누군지 말해주는게 아니라 삶이 말해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적용할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말이나 머리 속에서 있는게 아닙니다.
믿음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제자라고 부를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과연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분별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1]
첫째, 제자에게 혐오와 배제란 있을수 없습니다.
9장 51절입니다.
이 구절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은 단순한 여정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을 향한 결단입니다.
처음부터 계획하신 길이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그 길을 향해 얼굴을 돌려 진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면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하여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순수한 유대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땅을 지나가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을 신앙의 중심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를 멸망시키자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기 싫었는데 이제 완전히 멸종시켜버리자’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결코 엄청난 힘과 능력으로 로마를 정복하시려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려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정복자로서 자신들을 무시한 사마리아 인들을 심판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 보복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태도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향해 팔을 벌리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과 사회적 약자, 심지어 원수까지도 품는 곳입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권한이 있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그럼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종교, 인종,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의 신념이 옳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 뉴스에서 일부 사람들이 절에 가서 ‘땅밟기’를 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적지에 저주를 퍼붓는 낙서를 남기기 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틀렸다고 여기며 심판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의 역할은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과 SNS에서는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난무합니다.
익명성을 이용해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향해 혐오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혐오와 배제, 보복의 태도가 아니라, 긍휼과 용납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옳을수록 우리가 힘이 있을수록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단순히 태도로만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삶 속에서 치뤄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둘째, 제자가 되려면 치뤄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57-62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후보생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첫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자신있게 고백합니다.
물론 귀한 고백입니다.
세상에서는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 좋아할 일입니다.
스스로 교회에 오겠다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같으면 얼씨구나 좋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이런 그의 고백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에게 여우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이신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나를 따라오려면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기대한 것이라면 포기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을 오히려 뜯어 말리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엄청난 혜택을 얻는게 아닙니다.
전보다 더 편해지고 더 많이 누릴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전보다 불편하고 손해보는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정적인 결단이나 말 뿐만 결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수 있는게 아닙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할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삶에서 내가 어떤 대가를 치룰지 그 비용을 계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특히,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는 삶의 안락함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볼까요?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신앙때문에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어떤 손해를 보고 있습니까?
최소한 세상 사람들이 다해도 신앙때문에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가 왜 내 삶에는 보이지 않을까 의문을 갖습니다.
어쩌면 대답은 오늘 말씀에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 삶에서 대가를 치룰 마음이나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거 다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불편함도 참지 못하고 아무 것도 손해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나에게 하나님 나라가 최우선 가치라면 충분한 대가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TV에서 조수미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공연이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공연이 있는 딸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수미씨에게 전화해서 관객과의 약속인 공연을 다 마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가를 치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치뤄야할 대가는 어떨까요?
제자로서 치뤄야할 대가에는 불편함, 손해만 있는게 아닙니다.
완전히 가치관이 전복된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셋째, 제자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두번째 후보생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먼저 따라오라고 권하십니다.
얼마나 자질이 좋으면 예수님이 먼저 따라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를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 장례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인생에서 딱 한번 있는 일이기에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부모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서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부모가 사망한 경우 1년동안 특별한 애도 기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일은 반드시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서 학교나 회사도 아무리 중요한 업무 중일지라도 장례를 먼저 치룰수 있도록 허락해 줍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라와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부모님 장례는 믿지 않는 사람들, 즉 영적으로 죽은 가족들에게 맡기고, 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부모님 장례식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사회 통념과 맞지 않습니다.
부모공경은 십계명에도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가족을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뀌지 않으면 제자가 될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제자에게 우선순위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삶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해야만 합니다.
다른 일을 아에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일도 하되, 삶에 있어 최고의 가치로 여길 일은 하나님 나라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후보생도 보겠습니다.
이 사람도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뭐길래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그 시간도 못 기다려주시는 것일까요?
엘리야도 엘리사에게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은 줬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에 단서가 있습니다.
쟁기를 갈다가 뒤를 돌아보는 이유는 잘 밭을 갈았는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볼수록 절대로 앞에 있는 밭을 똑바로 갈수 없습니다.
시험문제를 풀다가도 앞에 문제에 미련이 남으면 뒤에 문제도 제대로 풀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초점은 삶에 대한 미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많은 후회와 미련들이 남아 있을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 인간관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을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끊기 힘든 미련이 무엇일까요?
바로 가족에 대한 미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마음이 매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헌신하며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최종 면접에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제 목사가 되면 절대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그래도 이 길을 가겠냐고 묻습니다.
과거 삶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여기서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간혹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느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과거에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제자의 삶으로 합당하지 못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거 너무 극단적인 것아닌가?
나는 도저히 이렇게 못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드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하거나 가족을 버리라고 하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극단적으로 잘못 적용하면 교회에만 헌신하고 집과 직장은 내팽개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다는 것이 교회에 헌신한다는 것으로 결코 좁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이 말씀을 단순한 과장법으로 여기고 가볍게 넘겨서도 안됩니다.
제자 후보생들의 결과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주목 하십시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치뤄야 할 비용을 계산하고 반응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그 어느 가치와도 비교할수 없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렇게 세상가치의 전복이 일어나야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고귀한 가치를 알기에 불편함과 고생을 각오하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포기할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기에 다른 것들을 뒤로한채 앞만 보고 가는 것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님들의 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가장 많은 가족이 묻힌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바로 로제타 홀 선교사님 가족입니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와서 의료선교에 헌신하셨습니다.
뒤이어 결혼한 남편도 왔는데 결국 2년만에 조선 땅에 남편을 묻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죽을때 임신 7개월중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도 5살때 풍토병으로 죽어 조선땅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자신이 키운 한국인 제자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성 한국인 의사가 된 박에스더입니다.
제자를 미국 의과대학으로 유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 역시 남편을 미국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는 돌아와 로제타 홀 선교사님과 함께 의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로제타홀 선교사님의 제자 역시 10년 동안 사역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보내고, 딸도 보내고, 제자도 보냈습니다 .
이쯤되면 실망감에 모국으로 돌아갈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 분의 선교는 계속되었고, 은퇴할때까지 43년동안 선교를 감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을 설립하셨고,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병원도 설립하셨습니다.
또한 최초로 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교육과 청각장애인 학교도 최초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그 분의 아들이 크리스마스 씰을 최초로 만들어 결핵퇴치에 앞장 서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헌신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나는 과연 몇번째 후보생입니까?
제자의 길은 낮고 좁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하루 아침에 제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고된 훈련과 반복이 필요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