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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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요나
요나서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잘 읽어보면 비둘기라는 뜻인 요나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질 행동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오히려 요나는 청개구리와 같은 행동들을 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 명령하시고,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 하셨고, 요나는 서쪽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육지를 통해서 가라 하셨고, 요나는 배를 타고 바다로 갑니다.
요나는 도망치고 하나님은 추적하시고, 요나는 분노하고 하나님은 타이르십니다. 우리가 이런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불순종한 요나이지만, 요나서가 끝나갈 때까지 하나님은 요나를 가르치시고 변하시길 기다리시면서 인내하신다는 점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명령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 앞에 서 있다”라는 표현의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 있다”라는 말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으로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섬기기를 거절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를 싫어하고, 순종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떠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려는 것은 보통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할 때 선지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 선지자인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라는 선지자의 당연한 임무를 주셨는데, 요나는 그러한 임무를 포기하더라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임무를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의 당연한 본분마저도 포기하는 모습을 요나가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또한 1장 3절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다는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만큼 요나의 결단은 확실히 굳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요나가 일어나서 다시스로 방향을 정하고 떠나기로 합니다. 그런데 다시스는 이스라엘 땅에서부터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의 스페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니느웨로 가는 길보다 험난하고 어려운 여행길입니다. 그런 다시스를 요나가 정했다는 것은 요나가 이미 다시스에 대해서 들었고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3절 말씀에서만 다시스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나의 결단이 확고하고 방향이 분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는 언급이 없지만, 요나가 가고 싶어하는 다시스는 세 번씩 언급이 되면서 요나의 바램은 더욱 확고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욥바라는 항구도시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됩니다. 요나에게는 행운과 같은 일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욥바에 도착했는데 마침 준비라도 한 듯이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도망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나고는 뱃삯을 주고는 배에 올라탑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타는 요나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말로 행동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보인 행동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적국이지만, 다시스는 무역의 주된 도시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요나가 니느웨에서 하는 행동들은 큰 문제가 되고 요나에게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많았겠지만, 다시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요나가 선지자임을 알아보는 이도 없습니다.
요나는 다시스에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지만, 니느웨로 가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니느웨로부터 멀리 떨어졌으니 여호와의 명령을 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얼마든지 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고 사는 것이 자유롭고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칫 우리의 삶을 망치고 영혼과 생명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주의 말씀 가운데서 살면서 세상으로부터는 자유롭지 않겠지만, 율법의 요구로부터는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거나,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았다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거나 이룰 때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질문하고,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기도로 답을 구해야 하는 겁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포기하기 마십시오. 요나의 경우처럼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요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왕국 출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해서 북이스라엘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순종하며 북이스라엘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처럼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 사람보고 북쪽에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은 죽으러 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 명령을 아모스는 받았지만, 되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같은 시대의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명령에 불순종했지만, 아모스는 하나님 얼굴 앞에서 그 명령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은 행동이 아니라 아모스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데, 오늘 읽은 3절 말씀에도 그러한 것이 나옵니다. 앞에서 살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처럼 3절에서 “내려갔다”는 말이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한글 성경에는 한 번으로 되어 있는데, 3절 마지막에 “배에 올랐더라”에서 “올랐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내려갔다는 의미인 “야라드”라는 단어입니다. 요나서에서는 총 네 번 이 단어가 나옵니다. 3절에서 “욥바로 내려갔더니”와 “배에 내려갔더라”에서 두 번 나오고, 5절에 보면,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에서 다시 사용됩니다. 그리고 2장 6절에 다시 한번 사용이 됩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의도적으로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을 때 일어난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이라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내려가 하나님께 기억되지 못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서 욥바로 내려간 것이고, 하나님을 피하려고 배에 내려갔던 겁니다. 그리고 큰 폭풍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요나는 그 상황을 피하려고 배 밑층으로 내려갔었습니다.
요나는 상황을 피하고 숨으려고 내려갔던 것이고, 그 결과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피하려는 사람은 기억되지 못할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의 인치심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요나서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떠나 밑으로 계속해서 내려갈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었기에 우리는 밑으로 버림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셋째로, 소위 열린 문을 조심해야 합니다. 요나가 욥바에 도착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요나의 뜻이 열린 문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을 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데 마치 예비된 것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요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서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된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의식적으로 불순종하면서 자신의 느낌이나 꿈 또는 환상 등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확실한 길잡이는 성경입니다. 만약 열린 문처럼 보이는 어떤 일이 성경말씀에 합당하지 않거나, 그 과정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분명 그 열린 문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해서 마련한 일이라고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준비된 길이라고 언제나 바른 길인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준비된 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할 때, 가룟 유다의 앞에는 돈을 줄 제사장과 예수님을 잡아갈 군병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해치려고 할 때, 마침 옆에 구덩이가 있어서 던졌고, 마침 준비된 것처럼 상인들이 지나가서 요셉을 노예로 팔아치웠었습니다.
우리는 소위 열린문이라고 불리는 상황, 곧 준비된 길이 우리 앞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에 찬 생각으로 준비된 길을 즐거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그것들을 살펴보고, 말씀에 비추어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읽을수록 요나라는 선지자는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나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똑같이 판단되어야 하는 나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요나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해서 숨고, 하나님의 뜻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쫒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모른척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나의 즐거움이 먼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요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하나님은 요나처럼 형편없는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잡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망이 아니라 주님을 좇아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나의 실패에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피해야 합니다.
룻이 모압의 신과 가족들을 버리고 여호와의 날개 그늘 밑으로 왔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게로 피해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피하여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순종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사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오. 그분이 하신 일과 삶이 택하신 자들을 위한 구원의 길임을 믿으시고, 그 구원의 길로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요나서의 가장 큰 핵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