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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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한일서 4:7-21
제목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찬양 : 그 사랑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할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벌써 2025년 3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연휴도 끝나고 모두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학기가 시작되는 달이기도 한데요.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사랑으로 이겨냅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단어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숭고한 단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사랑’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사랑에 관한 말들 투성입니다. 흔히 듣는 가요들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무슨 노래를 좋아하십니까? 1996년 출판된 ‘가요반세기’라는 책에는 우리나라 50년부터 90년대까지 가요들을 분석했는데요, ‘사랑’ ‘이별’ ‘그리움’을 주제로 한 노래가 약 몇퍼센트였을까요? 전체의 66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해요. 이만큼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만큼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거에요. 흔히 시청하는 드라마를 보십시오. 그게 어떤 사랑의 모양이건 사랑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연인간, 동료간, 인류애, 일에 대한 사랑 등등 사람들의 관심사가 사랑이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에는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내용이 등장하는거에요. 공감이 되야 재미와 감동이 있는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을 소재로, 노래하고, 많은 작품들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이 사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안그래요? 여러분 사랑 받고 싶으세요 그렇지 않으세요? 우리는 전부 다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게 아이이든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노인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상관없이 누구나 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거에요.
또 한 가지 우리는 사랑 받고 싶을뿐만 아니라 또 잘 사랑하고 싶어해요. 지고지순한 사랑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질 때 우리 마음에 감동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랑을 이상으로 삼고 잘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죠.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 사랑에 대해 더욱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경험하고 싶고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내 가족이든 잘 사랑 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거에요.
우리가 오늘 읽었던 요한일서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묵상할 때에, 떠올려야 하는 단어가 무엇이라고 했지요? 사귐이지요. 이제 잘 나오셔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들과 형제들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잘 되어진다면, 우리의 신앙의 삶은 아주 복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요 반드시 그 근간에 무엇이 필요하냐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귐은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그 사귐의 관계는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 사랑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에 대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계속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장 7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3장 10-12절에 도 보면, 가인처럼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3장 13-24절에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서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3장 18절에서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권면합니다.
이처럼 요한은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결론이 뭐냐 사랑하라는 거에요. 서로 사랑하는게 마땅하다는거에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하라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자, 우리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사랑에 대해 관심도 있고 사랑 받고 싶고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 사랑이 잘 됩니까 안됩니까? 그게 잘 안되는 현실에 놓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껏 기대를 품고 교회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면, 현실은 아주 몸소리칠 정도로 냉정합니다. 사랑하면서 살면, 내가 희생되어서 살면 도무지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옆에 있는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네라고 대답하실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뿐이 아니라 진짜 잘 사랑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행동하고 선택하고말하고 싶은데요. 그런데 그게 잘되요 안되요? 안됩니다. 마음은 잘 사랑하고 싶지만,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선택은, 오히려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마음과는 다른 행동과 말들이 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진짜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첫 번째는요 우리가 진짜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요. 함께 따라해볼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경험해야 한다”라는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7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면서요, 사랑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라고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원문 그대로 직역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이다” 이 의미는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원천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서로부터 나온다는 거에요.
우리는 사랑의 출발점이 나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애초에 우리 속에 없어요. 사랑의 근원되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만 그 참사랑이 가능한거에요. 진짜 사랑은, 그 출발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철저하게 기브앤테이크입니다. 진짜 사랑은 그 원천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진짜 어떤 대상을 성경이 말하는 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랑이 주어지고 그 사랑이 내 마음에 차고 흘러 넘쳐야만, 이 사랑이 다른 대상에게 갈 수 있는거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이 말로만 사랑하셨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은요 정확히 행동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십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요한1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 그 사랑은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이다. 사랑은 바로 여기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모든 원천, 진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주신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요,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감격이 다시금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야 해요.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구약에 예표하는 사건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이 하나뿐인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을 부를 때 처음 부터 약속하셨어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큰 민족을 이루려면 뭐가 필요해요? 아들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이 약속을 아브라함 나이 75세 때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들이 생겨요 안생겨요? 25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100세 때 그토록 바래왔던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이 좀 크자 하나님이 대뜸 아브라함에게 이러시는거에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나한테 드려라 말이 됩니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뇨,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아들을 자신을 위해서 죽이라는 요구를 하신거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 날 아침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칼로 그를 내려쳐서 정말로 죽이려고 했어요. 그 때 하나님이 말리시면서 손 대지 말라 하면서 네가 이제 나를 정말로 경외하는지 알겠다 말씀하시면 양을 한마리 친히 준비하셔서 그 양으로 대신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삭을 바치려 했던 그 모리아 산이요, 나중에 솔로몬 성전의 터가 되어지고요, 예수님 시대로 넘어오면 골고다 언덕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을 통하여,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죄의 제물로 드려질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하니깐 별로 와닿지 않죠? 그럼 만약에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제가 양쪽 신장이 다 망가져서 신장이식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세요. 그런데 마침 여러분들의 자녀가, 저와 혈액형이 맞다. 그럼 자신의 자녀 데려다가 신장 한쪽 이식해 주실 수 있는 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 자원 받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되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냐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래도 100번 양보하면 그래 내가 정말로 목사님 사랑해서, 내 신장 한쪽 떼어줄 수 있어도, 내 아들, 내 딸 장기를 떼어줄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런 상상을 못하는게 당연한거에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릴 위해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제물 삼았다는 것은요, 이것보다 말도 안되는 일이에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요, 저와 여러분들 사이정도가 아니라 원수사이에요. 그런데 그 원수관계에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누구를 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제물로 주셨어요. 신장 한쪽 정도가 아니가 그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주신거에요. 이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경험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인겁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나니깐요. 이게 놀라운거에요. 말도 안되는거에요. 나 같은 놈을 위해 어떻게 예수님이 희생을 하셔? 아니 그럴 가치가 없잖아요. 나 같은놈 구원하면 뭐 세상이 바뀌길 합니까.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납니까?내가 뭔 그분의 희생해야 할만한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지금도 더 알아가야 겠지만,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해가 되질 않는거에요.
바로 여기에 뭐가 있어요? 사랑의 원천이 있는거에요. 사랑의 근원이 있는거에요.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 무엇을 할 수 있어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거에요. 사도 요한은요 우리에게 사랑하라 말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율법의 짐으로 지워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감당할 그 사랑의 원천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원천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나아가는 이 시간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요 이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까요? 11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대요. 그게 뭐에요,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가르칩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조금 더 주목해 보려는 단어는 ‘이같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이같이 사랑하셨어요. 이같이에 담긴 내용은요 아들을 주시기 까지입니다. 그분은 아들을 내어주시는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거에요. 우리도 사랑해야 하는데요. 사랑은요 따라해보겠습니다.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 사랑은 반드시 뭐가 따르냐면 댓가가 따르는거에요. 물론이요 사랑은 값없이 주어지는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기 위해서는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큰 리스크, 댓가를 치뤄야만 우리가 그것을 거져 받을 수 있는겁니다.
우리가 엄밀히 다 따져보잖아요. 모든 사랑에는 다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댓가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댓가라는 것은 값을 치룬다는 의미입니다. 값을 치루지 않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그게 어떠한 것이든 상대방을 향한 댓가를 내가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는 참 숫자에 민감한 시대입니다. 모든 것들을 수치화하고 빠르게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에 정말로 밝은 시대이며 그런 세대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자본의 수치화를 통하여서 사람들은 재빨리 많은 것들을 판단하고 득과 실을 계산합니다. 그런 것에 익숙하고 그것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요, 다른 고귀한 것들에 대한 가치는 점점 낮아지고, 자본에 대한 가치만 더 중요하게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뉴스에서 그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요즘 젋은이들이 결혼을 안한다, 그리고 자녀를 낳지 않는다. 몇명의 청년들을 인터뷰했는데요. 한 사람이 그러는거에요. 아니 요새 애를 한명 키우려면 3억이 든데요, 그래서 애 낳을 엄두도 안나고요, 차라리 그 돈 가지고 저를 위해 쓰는게 더 현명한 것 같아요 라고 대답을 하더라구요.
이것이 뭐가 틀린말입니까? 맞아요 정말로 애를 한명 키우려면 모든 것들을 사회적 비용으로 계산하면 3억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한 생명이 3억보다도 못한 가치를 지녔다는겁니까?
제가 최근에 중증외상센터라는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도 보면요, 중증외상센터, 정말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상, 상해를 입은 환자들이 오는 과인거에요. 어떻게 보면 일분 일초를 다투는 정말로 사람의 생명이 순간순간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과인거에요. 근데 안타깝게도요 쉽게 말하면 병원 전체로 보면 돈이 안되는 과에요. 그래서 병원장이 회의를 하는데요, 모든 과의 과장들을 다 불러놓고 적자와 흑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다 줄세워놓고, 가장 이득본 과가 어딘지 브리핑을 하면서, 중증외상센터는 적자가 4억을 냈다면서 막 뭐라고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아 요즘 시대가 그렇구나, 사람의 생명조차도, 자본의 가치로 바라보는 요즘 시대의 모습이 씁쓸했습니다.
그래요 돈으로 환산하는거 오케이,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는데요. 독생자를 희생한 그 값어치는 우리가 얼마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머리를 굴려보세요. 그분의 값어치는 도대체 얼마입니까? 10억? 100억? 1000억? 환산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잘 알죠. 왕인 한 신하에게 일만달란트를 빌려줬는데, 그걸 갚으라고 하는거에요. 일만달란트가 얼만지 아세요? 이건 개인이 갚을 수 있을만한 돈이 아니라 진짜 천문학적인 금액이에요. 예수님 당시, 유대 지역은요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유대 지역,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이두메 지역 다 포함해서 세금을 로마에게 납부했는데요.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유대지역에서 로마에게 납부하는 세금이 600달란트였대요. 그런데 일만달란트를 개인이 이 금액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닌거에요.
그런데 왕이 긍휼히 여겨줘서 이 일만달란트를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찌했어요?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자를 만나니깐 당장 돈갚으라면서 감옥에 가두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하신 이야기지만요. 저는 용서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말도 안되는 값어치를 본인이 지불하시고 우리의 죄를 탕감시켜주신거에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말했던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엄청난 댓가와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셔서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요. 그럼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요. 이정도 댓가를 치루고 사랑해도 모자란거에요.
저는 신앙이라는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은요, 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의 댓가를 더더 크게 알아가고 생각해가는 거에요. 우리가 그분의 값어치를요 처음에는 일만달란트정도 여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처음에는 100데나리온 정도로, 시간이 더 지나면 1000데나리온 정도로, 한 달란트 정도로,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분의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더 크게 알아가고 깨달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 보면요 자신을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돈을 빌렸을까요? 아니요.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박해하던 죄인 중에 괴수 였음에도 나같은 자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구원하신 이 사랑의 빚을 졌기에, 자신은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요? 아직도 이 놀라운 복음을 듣지 못한 이 세상의 수많은 형제들에게 그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는요, 자식을 사랑하면서, 내가 빚갚는다고 사실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그저 자식에게 줄 뿐이에요. 그게 세상에서는 어떤 값어치가 있다고 말을 해도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내 자녀에게 있음에 그냥 받은 사랑으로 나도 사랑하는거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합니다. 득과 실을 따지기를 넘어서서 그냥 사랑하는거에요. 누구를요? 형제를요. 이웃을요. 이 사랑은 다 따져가면서, 나에게 유익이 될 것 인가 아닌가 사랑할 가치가 있냐 없냐는 따지는 사랑이 아니라, 마치 아무 조건 없이 엄청난 사랑을 나에게 주신 예수님처럼, 그분처럼 그저 사랑하는게 참 사랑인거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사랑 받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남은 한 주의 삶도,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가시고, 사랑 받은 자처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그 사랑’ 찬양하고 들은 말씀을 붙들고 함께 기도합시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에, 들은 말씀을 붙들고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의 원천되신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간구할 때에, 하나님 우리도 사랑받고 싶고, 잘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잘 사랑하고 싶고, 우리 가족도 잘 사랑하고 싶고, 형제 자매들도 잘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경험케 하옵소서, 나 같이 아무런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은혜를 간구하며 나아가겠습니다.
두 번째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가치를 더 깊게 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역시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강팍한 자들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처럼,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더 확신하게 하시고, 두려움 없는 믿음 가운데 거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위하여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할 때에, 이 나라와 우리가 후원하는 선교사님과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 혼란과 대립 가운데 있는 이 나라를 붙들어주옵소서, 진리가 바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하는 이 시대의 모습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이 나라의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나 좌에 치우치는 분별력 없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과 하나님의 진리에 바로 선 교회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우리 교회와 사랑방들이 후원하는 기관과 선교사님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아버지 우리가 물질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선교지 위에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게 도와주옵소서, 선교사님의 가정을 붙들어주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교회들 있습니다. 우리가 각 사정과 형편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주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운 주님의 뜻과 목적이 있을줄 아오니, 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주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그 지역이 살아나고, 죽은 영혼들이 새힘을 얻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형편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마지막으로 우리 광혜교회를 두고 기도합시다. 모든 세대가 한 마음을 품고,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 교회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있는 어느 자리든 예수의 향기로, 예수의 편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심방 기간 중에 있습니다. 각 가정들을 돌보아 주시고,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귀한 가정들 되게 하옵소서, 이제 새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다음세대들을 붙들어주옵소서, 지혜를 주시고 학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진로를 위해 고민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주님 갈길을 열어 보여주시고, 진로를 찾게 하시고, 또 이 세상의 귀한 일들을 감당하며 주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주님의 사명자로 살아가는 온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 광혜교회를 두고 주님 앞에 간구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