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18-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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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를 것이니라

본문 : 누가복음 9장 18-27
오늘은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주님과 동행 40일의 여정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과 동행 40일”이라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지만은 풀네임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님과 동행 40일 특별 새벽기도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과 동행 40일의 기간 동안에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도 설교 중에 종종 이번 주동행 40일의 여정 가운데 자기만의 특별한 기도제목들을 품으십시오 이렇게 도전했던 적이 있지요. 저는 그 말을 어떻게 새겨들었는가 하면 나는 이 40일 간의 여정에 어떤 목표를 둘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 적용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여정이든, 그것이 여행이든지, 혹은 행군이든지, 아니면 경주이든지, 여정은 반드시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모든 여정에 방향성이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40일간의 여정을 달려가시면서 “나는 이 특별 기도회를 통해 어떤 목표를 붙잡을 것인가?”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목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내 마음과 욕심대로, 막연한 나의 생각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그 목표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특별히 누가는 너무나 선명하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목적에 대하여 마치 ‘떠먹여주듯이’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40일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절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기가 막힌 명대사를 날렸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참 유명한 본문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이 배경에 대해서 누가는 특별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18절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요?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행본문인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 똑같은 본문에 대해서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정확한 지명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 대화가 펼쳐지고 있는 배경을 알지 못하면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어떤 곳인가 하면 이스라엘에서 속한 도시가 아니라 로마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고 로마의 모든 힘과 권력으로 관리를 받고 있던 도시가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모든 힘과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는 로마 황제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도시였단 말이지요. 그곳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향해서 당신은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이시며 저번에도 설교 때 이야기 했듯이, 황제의 출현이 세상의 복음입니다. 라고 로마 황제를 신으로, 자신들의 주로 섬기던 도시가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였던 것이죠.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너무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은 로마 황제를 향해 신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말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한 것이지요. “당신이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은혜를 받는 점은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르 보내시는 제자의 삶은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삼고, 다른 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다보면 이런 관점에서 참 은혜를 받아요. 그런데 오늘 누가는 특이한 것이 그 모든 배경을 생략하고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 어디인가 하면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에만 11번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말은 이 책을 쓴 누가는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인가 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모든 사명을 감당하시는 내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 특별히 따로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기도하셨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한 질문을 한가지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곧 하나님 자체이시거든요. 딱히 기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실 리가 없거든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께 기도의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가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삶의 영성]이라는 아주 짧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를 믿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물으신다(요 11:25-26 참조). 이 말씀은 이런 의미다. “너는 내가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믿느냐? 내가 아버지께 받은 모든 말씀을 너에게 전하고 있음을 믿느냐?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나를 통해 하심을 믿느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느냐?”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충만함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는 그분을 믿는다는 뜻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하고 충만하고 전인적인 교제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만지는 것이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지는 것임을 믿는다는 뜻이다.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친밀한 그 교제에 우리를 끼워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
우리도 사랑하는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이 사람과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있는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용무와 필요가 없어도 자주 대화를 갖고 함께하는 자리를 갖는가”입니다. 젊은 연인들이 밤을 새며 통화를 할 때, 무슨 이야기들을 할까요? 특별한 용무와 용건이 많아서 그 시간들을 보내나요? 대부분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들려주며 사랑을 이야기 하고 그 안에서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첫번째 목적은 이러한 친밀한 교제였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예수님께서는 성부하나님과 자신과의 교제에 제자들을 소외시키시지 않고 그 자리에 제자들이 함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가장 친밀한 그 교제에 우리를 끼워주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죠, 얘들아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세례요햔이라, 엘리야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하여 정확하게 고백하지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어떻게 가능했다라고 했을까요? 베드로가 정말 믿음이 좋아서이거나, 정말 갑자기 머리가 총명해져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누가 이 베드로를 도우셨을까요?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사 예수님의 가장 친밀한 그 교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동행 40일을 통해서 붙잡아야 할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다른 여러가지 기도제목들이 있고 개인의 용건이나 용무가 있겠지만 딱 한가지를 우선으로 놓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특별한 용건과 용무가 없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나 그 기도가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그 관계는 사랑이 식어버린, 본질을 잃어버린 기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하도록 부름받았다. 기도란 마음이 내켜서 하거나 큰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기도란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귐의 기도가 이 40일간의 여정 속에서 회복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도의 목적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22-24절의 말씀을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될 것”이라는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기적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9장 이전까지만 보면 거의 예수님의 기적의 이야기들로 점철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이전에 오병이어라는 메가급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수난예고 이후에 예수님의 기적사건은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점점 사라지게 되지요.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약해지셨고 약해지다 못해 그곳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거대한 신전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이러한 영웅의 모습으로 강해지고 강해지고 강해져서 우리의 원한을 갚아주고 복수를 해주실 것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고하신 말씀은 나는 앞으로 계속해서 약해지고 약해지고 약해져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죽게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약해지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악한 로마로부터 비교적 선한 유대인들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한 로마 사람들 뿐 아니라 악한 유대인들 모두를 죄에게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죠. 예수님은 그 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힘을 갖고 저 로마의 권력과 싸우는 일에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대로 열두 군단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보내면 그만이었고, 그럴 필요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로마의 권력은 속절없이 무너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밤을 새워 기도하셨던 일은 무엇입니까? 약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약해지는 것보다 강해지는 것에 더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더 힘을 갖고 더 부유해지고 더 잘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더 약해지고 가난해지고 낮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약해질 것을 놓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왜그렇습니까? 강해지는 것보다 약해지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해지는 것보다 약해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보통 약해질까요? 사랑할 때입니다. 한 여성이 가장 강해질 때는 언제입니까? 모두가 엄마가 되었을 때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지요,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엄마가 되면 여성성이 강해지기보다 약해집니다. 여자로서 가장 강할 때는 언제입니까? 20대 처녀일 때지요. 마음껏 꾸미기도 하고 관리도 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를 낳고 이 아이를 사랑하겠다고 작정하는 순간, 약해지는 것입니다.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출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약해지기로 자처하는 것이죠.
어렸을 적에 저의 형이 말썽꾸러기였어서 학교에서 어떤 어떤 잘못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자주 교무실로 호출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던 적이 있다면서 저에게 이야기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교사가 학부모를 체벌한다는것이.. 그런데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강해질 용기보다 약해질 용기가 필요합니다. 뒤로 물러설 용기, 나를 내려놓을 용기, 내가 희생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죠. 이것은 강해지는 것보다 더욱 큰 용기와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약해지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기도하셨던 것이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했던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하실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우리가 이 40일 기도회를 통해 무엇을 목표로 삼아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강해지기보다, 오히려 약해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길이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아픔과 고민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끝은 "하나님, 내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셔야 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제 소원은 이것이지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기도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아가 부서지는 것은 마치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분노를 쏟아내면 일시적으로 속이 시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내가 약해지기로 결단한다는 것은, 그 억울함과 고통을 내 가슴에 끌어안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단순히 내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순종의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4절에 번역된 목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쉬케입니다. 그런데 이 24절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목숨이라고 번역하기보다 자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아를 구원하고자 하면 자아를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아를 잃으면 자아를 찾으리라.
여러분 마귀는 끊임없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인가 하면 네 자아를 찾으라고 꼬득입니다. 뱀이 하와를 꼬득일 때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왜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하고 살아! 네가 하나님이야! 네 자아를 찾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당하실 때, 사탄이 와서 뭐라고 유혹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 않습니까? 굳이 이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절벽에서 뛰어내리십시오. 천사들이 당신을 받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라고 예고하실 때, 베드로가 항변합니다. 주님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저 로마 권력 앞에, 온 세상 앞에 나타내셔야죠!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꾸짖으시죠?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마지막으로 살펴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고통 속에 버림받으셨을 때, 군중들이 예수께 끊임없이 뭐라고 외칩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그 때, 예수님께서 못참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면서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고 심판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 대신 저와 여러분이 버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 자아를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진정한 자아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요. 자기 스스로만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아까지도 찾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고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도를 따르십시오. 이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십시오. 이 십자가의 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 진정한 생명을 공급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때론 억울하더라도, 때론 답답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예수님처럼 약해질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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