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쓰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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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가.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는 삶을 알아보자

지난 수요예배 시간을 통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교리문답 제 1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 우리 삶의 제일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중심과 입술 그리고 삶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의 내용 속에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나누지 못했습니다. 사실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 범주가 너무 크기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 세상은 어떠한가?

1) 하나님과 마귀는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신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어떠합니까? 성경에 무지한 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마귀가 대립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를 교란시키는 자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급진적인 선교단체를 위주로 전해지는 가르침들이 그러한데, 마치 하나님과 마귀가 대립의 구도로 있고 복음의 다시 예루살렘 성전까지 선포되어질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믿으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선교에 뛰어드는 단체가 바로 그런 단체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전에나 후에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가운데 모든 일들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마치 하나님과 대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기의 말씀을 기억해보면 쉽지 않습니까? 그는 제 아무리 마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 앞에서 허락이 있어야만 욥을 칠 수 있던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마귀가 대립한다는 것은 잘못된 성경관에서 시작된 잘못된 세계관이요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때가 찰 때까지 “악”을 허용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선택하신 자들이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 세상은 갈수록 더 타락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라 더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때는 거짓 교사들이 주로 교회와 관련하여 활동했지만, 오늘날 거짓 교사는 여러가지 탈을 쓰고 성도를 비롯한 다음세대와 일반 불신자들에게까지 모두를 공격하며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들어와 “정통 교회의 교리는 모두 틀렸습니다.”라고 외치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과 심지어 온라인 상에서도 무수히 많은 거짓 교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튜브나 트위치 같은 곳에 접속해보면, 목사라는 이름으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교리와 성경을 통해 성도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수 있지만, 이런 세상의 현실은 앞으로 더더욱 퍼져나갈 것이며, 어쩌면 우리 다음세대는 믿음과 세상 속에서 지금 시대와 달리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결정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망해가는 교회와 세상을 살리고자 우리는 어떤 광장으로 나가 피캣 시위를 하고 우리의 몸으로 그것을 막아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일이라면,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지난 시간 나눈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그분의 영광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라 미혹하는 세상 앞에 죽어라 같이 싸우기보다 “힘써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는 자는 고집 쎈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몸으로 싸워서 이겨낸 사람도 아닙니다. 이념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도 아닙니다.
“마지막날 끝까지 주님을 붙잡는 자는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끝까지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전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본론: 인정받는 일꾼이 됨으로

가. 본문의 배경

본문 15절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방금 읽은 디모데 후서의 말씀은 당시 교회들 내에 거짓 교사들이 많이 등장을 했는데, 그런 현실 속에서 영적 아버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이어지는 16-18절 말씀을 보면, 디모데가 있던 시대에 교회 안에 거짓 교사와 같은 자들이 얼마나 불경건한 말을 하며, 그들의 말이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 나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다름 아닌 15절의 말슴을 통해서 먼저는 디모데 자신이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라고 말하며, 다음으로는 오늘 이 말씀을 보는 독자들 곧 이 땅의 성도들 모두에게 이런 사명을 힘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본문의 시작은 “힘쓰라”

오늘 본문은 한 절이기 때문에 그냥 쉽게 한 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문의 깊이는 그것과 정반대 입니다. 본문 내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통해서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힘쓰라”

오늘 본문의 한글성경은 “너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헬라어 원본에는 “스푸다순”이라는 말로 “힘쓰다, 열심내다”는 뜻의 “스푸다조”의 과거형 명령법의 형태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말을 다 놓아두고 “힘써라”는 명령 형태의 동사를 문장의 가장 앞에 위치 시켰을까요?
그것은 15절 전체에서 “힘써라”라는 말을 최고 강조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2) 인정받는 일꾼은 힘쓰는 일꾼입니다.

가) 인정받는 일꾼은 힘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거짓 교사의 헛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시대 가운데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힘쓰는 사람” 곧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 바울이 말하는 힘쓰는 사람이란?
장특별히 바울은 자신의 서신 내에서 “힘쓰다”와 관련되어 여러번 언급하고 있는데, 한 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 :3절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말씀에서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사용된 “힘써라”라는 동사와 관련된 단어는 바울이 특별히 “영적인 삶에서 헌신과 노력해라”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헬라어 사전인 “바우어 사전”이라는 곳에서 “의무를 이행하는데 특히 성실하고, 열망하고 고통을 겪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양심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의 가르침이 왜곡되고, 여러가지 환경적 요인으로 난세를 경험하는 오늘이나, 그때나 “힘써라”라는 이 말은 막연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 내에서 인정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희생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말며, 더 나아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다해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 적용
우리는 지금이나 앞으로 있을 환난의 때를 대비하여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감나무에 감떨어질 때를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에게 조건 없이 주신 구원에 힘입어 우리 삶에서 부단히 힘쓺을 통해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 그렇다면, 무엇에 힘을써야 하는가?

1)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멸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힘써야 할까요? 먼저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에 거짓 교사들의 행태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가짜 진리로 논쟁하고, 그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의 내용을 자신들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유리하게 설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달랐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항상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해석했고, “성경해석의 모든 기준은 성도의 유익과 영적 성장을 위한가 라는 점에서 평가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의 좋은대로 입맛에 맞춘 해석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과 종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하는 것은 복음과 관련한 본질 내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훗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디모데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닌 경우가 많을 텐데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가) 먼저는 원인과 출처모를 잘못된 영상이나 책을 멀리해야 합니다.
먼저는 원인과 출처 모를 잘못된 영상이나 책을 멀리해야 합니다. 처음에 유튜브와 같은 사이트가 열렸을 때는 이정로 파급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코로나 펜데믹까지 겹치면서 유튜브와 같은 사이트는 급하게 다양한 연령층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는 유익한 영상도 많이 있지만, 영혼을 망치는 잘못된 사이비교, 이단, 성경과 교리에 대한 급진적 해설, 정치이념을 앞세운 유사 기독교, 선동주의와 같은 것들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사 가장 먼저 이런 것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영상을 보고 마음이 다 빼앗긴 상태에서 목회자를 찾아와봐야 원하는 답을 듣지도 못합니다. 요즘 의사선생님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환자들이 내원해서 진료를 받는데, 유튜브에서 이래저래 찾아보고와서 그 내용을 쭉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의사 선생님이 진료를 하면 “그건 제가 아는 것과 다릅니다.”라고 하면서 심하면 병원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영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미 진리의 말씀이 설 자리를 많이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매체들로부터 멀리해야 합니다.
(나) 다음으로는 평소 설교 듣는 일과 성경공부에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펴송에 설교 듣는 일과 성경공부에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설교는 한 주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한 우리 마음을 위로만 받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위로도 받지만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배우고 아는 시간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에 우리가 진지하게 나간다는 것은 말씀을 노트하며 듣고, 인터넷 설교듣기를 통해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철저하게 말씀을 듣고 익힐 때, 우리는 우리 앞에 거짓 진리가 주어진다면 거뜬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권사님이 계신데, 이 권사님은 신학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다르게 많이 공부를 한 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권사님께서는 정말 설교도 열심히 잘 들으시고, 받은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한날은 권사님이 일하시는 가게로 이단들이 와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들의 진리를 전하는데, 권사님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말한 다음에 이단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평소에 말씀을 듣는 일과 배우는 일에 진지하게 임할 때,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말씀을 분별하는 것과 연결상에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벌거 벗은 몸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이란,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기웃거리거나 이것을 게을리하면 그것이야 말로 ‘부끄러운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할 수 있습니까? 아니겠지요. 우리는 상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꾼입니다. 힘써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일꾼입니다. 그 일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일을 행하지 않고 이리저리 잘못된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알면서도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목회,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부끄러운 일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분별하고, 그 말씀을 증거하는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을까요? 바로 앞서서 나온 것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분별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맞추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은 누가 시킨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인정받는 일꾼이 된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여 받고 전하며, 이 일을 부지런히 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인정받는 일꾼!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3. 결론: 힘쓰라!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어 “힘써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삶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제일의 목적에 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앞으로의 세상은 더더욱 힘쓰지 않으면 신앙을 지키기 조차 힘든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말씀은 생명의 동아줄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차 독자인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힘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분별하여 받고 전하며 부지런히 이 일을 사명으로 알고 행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인정받는 일꾼이되어 하나님께 영광스럽게 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이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타가 공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받으며, 단 숨에 우리가 변화되지 못한다 하더라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하여” 날마다 힘써 전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세의 악이 우리를 잡아 삼키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있는 자리에서 인정 받는 일꾼이 되기 힘쓰며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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