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5:1-19절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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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느헤미야 5장 1-19절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역할을 나누고, 마음을 다하여 성벽을 재건해가는데,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끊임없이 방해를 했습니다. 특히 도비야는 “유다 백성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백성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아니라 한 손으로는 건축도구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병기를 잡고서 밤까지 일하는, 주경야경(晝耕夜警)_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경계를 보는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일들이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르짖다’는 단어 앞에 ‘크게’라는 부사까지 첨가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과거에 노예생활을 할 때보다 더 어렵게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_남자들을 지칭’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부부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고 하는 것은 각 가정에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건강이나 체중조절을 위해서 먹지 않는 것은 별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먹어야 하고,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을 때 참 서글픔과 그것을 넘어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자손들의 그 부르짖는 원망의 대상이 그들의 동족인 유다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원망의 내용에 대해서는 2-5절이 잘 설명합니다. 먼저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을 하는 사람 가운데, 흥부처럼 자식은 많고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었으니,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동냥해서 자녀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3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중에 흉년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흉년의 때에 부유한 사람들은 창고에 곡식들이 많이 있기에 웬만한 충분히 버틸 수 있었겠지만, 작은 집이나 약간의 밭과 포도밭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저당 잡혀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회를 악용하여 부자들이 싼 값으로 집이나 밭을 저당 잡아서, 갚을 때에는 고리의 이자를 붙이게 함으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빈익빈 부익부의 차이가 점점 골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4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흉년으로 인해서 밭과 포도원에서 나는 식물로 먹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유다 백성들은 페르시아 정부에 또 다른 정부에 세금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니 밭과 포도원을 저당 잡히고, 빚을 내어서 납세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5절입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유다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이유는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무자비한 납세의무, 도에 넘치는 이자 등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먹을 것이 없었고, 자녀들을 팔아야 했고,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전답(田畓)이 부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느헤미야가 보여준 반응을 6-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의 반응은 ‘크게 노하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노했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가난한 백성들의 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배국 페르시아의 공무원입니다. 그에는 권력도 있고, 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부자들의 편을 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다른 차원의 리더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는 것은 분노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고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후에 백성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방에 팔렸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우리가 또 동포를 팔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자를 받는 것을 그만두고, 밭과 포도원과 집은 돌려줍시다. 그리고 비싼 이자를 받는 것을 그만하십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자들이 “모두 돌려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그것을 서약하기까지 했습니다.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느헤미야의 촉구로 인해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단지 자기 동족들을 착취했던 것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회개(悔改)’는 문자 그대로 하면 ‘뉘우칠 회’에 ‘고칠 개’입니다. 지난 삶을 반성하여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회(悔)’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회’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한 대로 행하였다. 삶을 고치고 바꾸는 ‘개’까지 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였을 때에 느헤미야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무원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지배국의 관리가 식민지(피지배국)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완장을 차면 달라진다.’는 말도 있고, ‘완장을 채워주면 줄 세운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작아보여도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사람들을 누르려 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이 총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2년 동안이나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봉급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총독이 총독의 봉급을 받는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적정하게 받아야할 봉급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착취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정액을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이 지고 있는 짐을 나누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고위관리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만큼 고생했으니 이 정도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심어주신 자리였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누림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과 책임의 자리였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순종의 현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 기도는 느헤미야의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백성들로부터는 봉급을 받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의 몇 배로 채워달라는 생색도 아닙니다.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아니까 이런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결단입니다. 느헤미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입니다. 그래서 그는 12년 동안이나 임금을 받지 않고서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느헤미야에게 “당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느헤미야는 틀림없이 “나는 내 앞에 계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지위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누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은총이 오늘 하루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이 힘을 모아 성벽을 재건해 가는 데는 외부세력의 방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족이 동족을 누르는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음을 봅니다. 혹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귀족과 지도자들처럼 여유가 있고, 나름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또는 미래에 그런 위치에 있게 될 때에 에 그것을 군림의 도구로 삼지 않고, 섬김의 도구로 삼게 해 주십시오. 또한 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이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어 가는 느헤미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귀족들과 민장(지도자)들과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3. 귀족들과 민장들은 느헤미야의 권면을 듣고서 자신들의 삶을 고쳤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고쳐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느헤미야는 자신의 삶의 모습이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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