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7 설교
Notes
Transcript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학기 한주를 보내시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으로 크신 위로와 이길 힘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디모데전서를 나눈지도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요, 오늘로서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디모데전서 말씀들 기억하시나요? 바울이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며 전하고 권면했던 여러가지 내용들이 존재했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보자면, 거짓 교사들에 대한 주의의 내용들도 있었죠, 그리고 직분을 세우는 것에 대한 조언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 선포자로서 디모데가 어떻게 서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해주었구요, 성도들을 대할 때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죠? 재물에 대한 내용이 있었죠. 우리의 신앙을 재물을 취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하루하루에 자족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목표로, 목적으로 삼으라는 내용들을 지난주에 함께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 모두에 포함된 내용이 있었죠. 어쩌면 이 성경, 바울 서신들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 어떤 것이죠?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과 겉치레가 아니라 그 마음, 믿음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경건함을 유지해야 한다.
바로 이 내용이었죠.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 믿음이 있을 때, 결국에는 권면했던 모든 내용들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첫번째 편지의 마지막 권면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함께 살펴봅시다.
첫구절을 보시면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어떻게 표현하죠?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자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권면합니다.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 무엇일까요? 뒤에 이어지는 의와 경건 등등 모든 것들에 반대되는 개념이겠죠?
바로 우리가 지난번 보았던 내용이 이어서 등장하는거에요. 지난주에 보았던 내용,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바로 그 재물에 대한 욕심과 그러한 마음들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 마음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오랜 편지의 내용동안 바울이 강조했던 것들이죠. 그 모든 것들을 디모데의 마음에 품을 것을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내용을 기록했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보았듯이, 이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신 크신 믿음이 있으면, 그 증거로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길을 따르면서 동시에 뭘 하라고 하고있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물론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 앞선 모든 것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떻다? 쉽지 않다는 것이죠. 지속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죠. 첫번째는 실제적인 싸움. 누구와? 바울이 지속적으로 경계했던 거짓 선포자들과 싸워야겠죠. 그들이 말하는 잘못된 복음들이 성도들에게 전파되지 않도록, 그들이 제기하는 디모데에 대한 거짓들이 성도들에게 전파되지 않도록. 외적으로 그들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럼 두번째로는 어떤 싸움일까요? 우리 내부의 싸움이 있겠죠.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안에도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세상적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들,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안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된 마음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나의 경건생활을 이뤄나가면서 우리 마음에 죄된 마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열심히 분투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한 싸움을 싸워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구절에 등장하는 것처럼 영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돈과 명예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평안,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스스로 선한 증언, 즉 신앙고백을 행했음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읽으시면, 디모데가 말씀 선포자, 지금으로 말하면 목회자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부름받았고 너가 선포했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말씀선포자,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르심을 목회자만 받은 것은 아니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여러분들도 항상 여러분의 신앙을 고백하죠. 항상 예배 시작 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고백들도 있겠구요, 하임 공동체 안에서 나누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놀랍게 도우심을 선포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이겠어요? 하나님께서 11절과 12절의 내용을 여러분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거에요.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삶의 어려움들, 외적으로 학교에서 직장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과 싸워 이기고자 분투하고 계시죠.
내적으로도 지속적으로 편해지고자 하고, 세상의 가치들에 무릎꿇고자 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싸울 힘을 주시고, 이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의 죄된 본성과 저항해나가는 선한 싸움, 열심히 싸워나가고 계십니다.
결국 디모데만 하나님의 사람이고, 목회자만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것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엄히 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명하기 위해 두명의 증인을 부르는데요, 13절에 등장합니다.
첫번째 증인,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두번째 증인,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바울이 두 증인을 부른 것은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지지난번 장로 직분 이야기할때도 등장했던 유대의 전통 두세증인에 대한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요,
큰 것은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신성의 측면,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라는 세상의 권세 앞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선포하셨던 인성의 측면, 그 두 측면 앞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명령을 가감없이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 앞에서 명할 명령은 무엇일까요.
14절을 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주님께서 이땅에 약속하신 말씀,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 말씀이 임할 때까지 이 명령, 의와 경건을 따르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그 명령을 한치의 오류 없이 지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 싸움은 언제까지라는거에요? 주님께서 다시 이땅에 오시는 재림의 때까지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엄청나죠? 우리는 매일매일 겨우겨우 이 싸움을 싸워내고 있는데, 이게 언제 끝난다고 알려주시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는 재림의 때까지 계속 싸워나가라고 지금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감정을 어디서 느꼈었냐면, 2015년 9월에 느꼈었어요.
이게 언제냐, 제가 군대가 있을 때입니다.
제가 2015년에 입대해서 2017년에 전역을 했는데, 처음 군대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2017년이 안올 것만 같았어요.
특히 선임들이 해줬던 이야기가 참 마음을 크게 찔렀는데, 어떤 이야기였냐면, 처음 부대에 가서 정신교육을 한다고 다같이 모여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부대원들이 모이니까 사람들이 꽤나 많을거 아니에요?
그런데 옆에 선임이 저한테 대뜸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야 너는 여기있는 사람들이 다 전역해야 전역할 수 있어’
처음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기분이 나빴죠. 근데 더 마음이 아팠던건 뭐냐면, 그 말을 곱씹어보니까 한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인거에요.
제가 막 들어갔으니까, 막내일거아니에요? 그럼 뭐 잘못해서 영창에 가지 않는 이상 저보다 선임은 먼저 전역을 할텐데, 그렇게 먼저 전역한다는 사람들이 눈앞에 정말 너무 많은거에요.
그러니 이 생각이 드는거죠. ‘와 저 수많은 사람들이 병장달고 전역할때까지 나는 이 안에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구나’
앞이 정말로 깜깜한거에요.
근데 여러분, 군대도 사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군대 명언이 있죠.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 결국에는 그 때가 와요. 저도 전역했잖아요? 전역하고도 거의 10년이 다되가서 올해가 예비군 마지막 8년차에요.
근데 오늘 말씀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는 언제라고 정해져있지 않아요. 2017년 6월 7일 이렇게 정해져있지가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 사실 우리는 막연하게 이 선한 싸움, 정말 하루하루 겨우 살아남는 그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힘들죠.
근데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싸워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누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무너질 때 다시 일으켜세워주시고, 외로울 때 위로해주시며 결국에는 끝까지 걸어나가게 하신다는 거에요.
이왕 군대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또 군대로 비유를 들자면, 군대에서 하는 훈련 중에 행군이라고 있어요. 보통 행군하면 30키로나 40키로 이렇게 하는데,
런닝 좀 뛰어보신 분들은 40키로면 사실 마라톤 풀코스보다 조금 짧은 거리거든요? 아마 힘들긴 해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다녀오실 수도 있을거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 그냥 걷는게 아니고 군장에 총까지 들고 간다는게 문제에요.
그리고 신발도 트래킹화나 런닝화가 아니고 전투화에요. 그러니 30키로 40키로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저도 훈련소에서 한번, 부대에서 한번 했었었는데, 이게 처음 시작하면 생각보다 재밌어요.
그냥 걷는거니까 막 옆사람하고 이야기하면서 걸으면 산책하는 것 같고 재밌거든요? 그래서 다들 막 떠들고 웃고 하면서 가요.
근데 그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줄어들어요. 그러다가 반환점에 가까워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냐, 아무 말이 없고, 숨소리만 들려요. 힘들다는 얘기죠.
저는 어땠냐면, 슬슬 어깨가 아프고 발도 아프고 힘도 들면서 정신이 나가는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내가 걷고 싶어서 걷는게 아니고, 그냥 자동적으로 발이 나가게 되는거에요. 내가 지금 뭘하는거지 싶기도 하고, 그냥 혼미한 상태로 발이 로봇처럼 가는거에요.
그러면 슬슬 낙오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합니다. 근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행군을 결국 잘 마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따로 뭐 준비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는건데, 저는 이게 가능한게 다같이 한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슬 웃음소리 안들리고 조용해진다 싶으면, 옆에서 간부들이 화이팅을 해줍니다. 막 군가도 부르게 시키고, 그러면서 정신이 딴데 나가지 않도록 힘을 주는거에요.
그리고 정말 지쳐서 쓰러지고 하면, 옆에서 간부나 전우들이 군장도 들어주고, 총도 들어주고 하면서 함께해줘요.
그러면 결국에는 모두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는거에요.
물론 각자가 상황도 다르고 체력도 다르고 하니까 누구는 정말 가볍게 끝낼 수도 있고, 누구는 수십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옆에서 끌어주고 밀어주고, 힘을 불어넣어주고 하면 그 모습이 어떻든 결국에는 행군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우리의 인생 과정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각자 다 다른 모습이 있어요. 즐거울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고 하죠. 누구는 즐거운게 길수도 있고, 누구는 힘든게 길수도 있고 할거에요.
하지만 결국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끝내 인생의 모진 어려움들, 수많은 장애물들을 이겨내면서 주님이 오실 그때에 하나님 나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힘을 불어넣어주시고, 실제로 우리 주변에 함께하는 공동체가 짐을 져주고 하면서 함께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이것을 뭐라고 설명하냐, 바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기에, 그래서 세상과 다르기에 고난이 존재하고, 그것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지만, 주님은 끝내 그가 택한 성도가 그 모든 것을 인내하게 하시고, 끝내는 이겨내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앞서 말했던 행군이 끝나면, 군인들은 어떻게 되냐, 물론 체력이 바닥나서 막 주저앉고, 발에는 물집도 생기고 하지만, 딱 들어가자마자 보통은 먹을 것들을 막 주거든요? 오뎅이나 떡볶이나 이런거 막 깔아놓고 먹으면서 서로 함께 이겨냈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내가 이것을 해냈다는 기쁨을 얻고, 또 이 극한을 이겨냄으로서 체력도 생겨나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끝내는 그때, 우리는 주님과 또 교회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체력을 키우고 고난을 이길 힘을 얻는 것처럼 말씀과 경건으로 우리 스스로가 단련되어 마지막 때에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신학 용어로 성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음을 갖고 생활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어때요? 구원을 받았음에도 죄인인 상태에요. 그냥 무죄라고 선고만 된거지 우리 안에는 죄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건으로 단련된다면, 주님은 우리를 죄인인 상태에서 변화시키셔서 끝내는 우리 스스로도 진정한 의인된 모습으로 만들어내실 거에요.
이전에는 죄인이 무죄선고만 받은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체로도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것들을 이루실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면 바울은 이어지는 15절에서 그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어떤 분이래요?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시고,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주욱 길게 설명합니다.
왜 바울이 하나님을 이렇게 길게 수식했을까요?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방금 함께 나눴던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것들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하는 측면이 있겠고요,
두번째로는 상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하는 시기가 언제죠? 어떤 나라가 있을 때죠? 로마제국이 있을때에요. 이 당시에 바울이 수식한 여러 표현들은 주로 누구에게 사용이 되었냐면, 바로 로마 황제에게 수식되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죠.
특히 이 편지의 대상인 디모데가 사역하는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이방 신과 문화들에 철저하게 열려있는 곳이었어요. 가장 큰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도 바로 이 에베소였기도 했구요.
그러한 지역에 거하는 이들이 바로 디모데이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다보니, 나도모르게 사회 속에서 이러한 문화에 잠식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이 땅은 황제가 최고지. 황제가 유일한 주권자지.
바울은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다시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 불멸하시고 위대하시고 오직 존귀하신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이방 아르테미스 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다시금 언급하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듣고, 읽고, 찬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은 세상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 세상의 문화와 상식들에 우리의 생각이 잠식당할 수 있습니다.
아 이건 여기서는 불가능하지. 이건 성경시대니까 할 수 있던거지. 아 지금 사회에서는 이렇게 하는게 최선이지. 이런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침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내면의 경건을 다스리고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볼까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다른 권면, 바로 부자들을 향한 권면을 전합니다.
부한 자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 두지 말고, 오직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며 너그러운 자가 될 것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부자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미워하시고 가난한 것을 미덕으로 삼으셨다는 생각인데요,
물론 예수님께서 사회의 취약계층들, 과부라던지 병자들이라던지 이런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에게 나아가셔서 함께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 부자들을 미워하시고 부가 많은 것자체를 죄라고 여기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많은 부자들과도 함께하시고 은혜를 부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니고데모가 있죠. 그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엘리트였어요.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도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구요,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 누구 무덤이었어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그 당시에 개인 무덤이 있다는 것은 상당한 부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도 그를 부자로 칭하고 있죠.
이런 것처럼 주님은 부자들과도 함께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죠. 다만 주님은 그들이 가진 부를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면, 돈에 목적을 두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요? 일만 악의 뿌리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죠.
하지만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소망을 두라고요?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가진 재물을 하나님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18절처럼 선을 행하게 될 것이고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재물들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고, 서로 나누어주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재물의 바른 사용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너그러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나타났죠.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나의 것이 없이 서로 사용하는 모습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물질의 사용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삶을 이렇게 목숨걸고 열심히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먹고 살기 위해서죠.
내가 이렇게 살아야 돈을 벌 수 있고, 더 많을 것을 가지며 살 수 있어! 이런 마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추구하다보면 어떻게 돼요? 그 돈이라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절망하게 됩니다. 가져야 하는데, 확보해야 하는데, 쟁취해야 하는데, 재물은 유한하니, 싸우고 이겨내야 하는겁니다.
저 사람보다 더 좋은 모습, 저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 저 사람보다 더 많은 재물.
그러니 불안하고, 염려하고, 한시라도 이것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단의 주된 공격이죠. 이게 무서운게 뭐냐면, 알고도 당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래요. 여기서 돈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거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 알면서도 자꾸 바라게 된다는거에요. 왜? 현실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당장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지금 이거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으니까. 자꾸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놓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우리는 알면서도 또 속고 속는거에요. 말씀보다도 당장 취업이 중요하고, 기도보다도 당장의 성적이 중요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무엇을?
믿음, 소망, 사랑을 말이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미래를 책임져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반드시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을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 어떤 것을 얻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나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결국 사랑입니다.
온전히 믿음으로 소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해요. 사랑해야 믿을 수 있고, 또 그 대상을 목적으로 소망할 수 있겠죠.
결국 그렇기에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믿고 소망할 때, 우리는 선한 싸움을 이길 수 있고, 우리 스스로를 경건으로 단련하여 성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19절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 스스로를 위해 참된 생명,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의 삶을 취하는 바른 길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절과 21절에서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 거짓된 지식, 반론 다 피해라. 즉, 거짓 교사들의 헛된 말들과 싸워 이겨 본인이 부탁한 이 모든 편지의 권면들을 지켜라.
그 거짓들을 따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믿음에서 벗어나 행함을 따르게 되었다. 주님의 은혜가 너와 함께 있으니 모든 에베소 성도들의 영혼을 지켜라.
이렇게 바울이 전하는 디모데를 향한 첫번째 편지가 마무리됩니다.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결국 이 모든 바울이 전하는 편지의 내용은 목회자 디모데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시에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디모데를 비롯한 에베소 성도들처럼 열심히 그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 싸움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힘들지만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일으키시며 끝까지 우리를 끌고가실 것이고, 끝내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둠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소망을 두어 하나님과 함께, 우리 모든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 사랑이 가장 필요합니다.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 주신 사랑이 있어야만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주님 나라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시고, 그렇기에 이 자리에 모여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의 경건을 연단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처럼,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이번주 여러분들이 겪으셨을 어려움들? 아마 다음주에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분들이 이번주에 견뎌내시고 이겨내신 것처럼, 다음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견뎌내고 이겨낼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하실 주님을 마음으로 온전히 사랑함으로 주님을 소망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학기가 나의 세상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학기가 아니라, 주님을 소망함으로 기뻐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한 학기를 보내는 귀한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기원합니다.
찬양 : 내 삶은 주의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