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이 함께 하는 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1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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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
강의 안내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책”이라는 별명을 가짐. 종교개혁의 핵심 신학 사상이 녹아 있기 때문.
종교 개혁의 도구였던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음
심지어 “탁상 담화”라는 책에서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고, 이 책은 폰 보라(루터의 아내)다.”라고 말할 정도.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 이후 쓰여진 편지. 바울서신의 첫 번째 편지.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이 수신자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너무나 사랑했음.
-그런데 거짓 선생들, 즉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공격하기 시작함.
-이들은 오직 믿음,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고 믿음 이상의 것, 곧 할례와 율법을 추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긴 했음. 하지만 율법을 보충하고 싶어 했음.
-이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어지럽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은혜의 복음이 부정되는 위험에 직면하며 이 편지를 쓰게 됨.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은 남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 사람들이다.
-이걸 남갈라디아설이라고 한다.
-북갈라디아설도 있다. 종족적 갈라디아인들, 옛 왕국이 있었던 지역.
-북갈라디아 지역은 상당히 고립된 곳이었고, 사도행전을 보면, 북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했다는 구절은 없어서, 남갈라디아설이 대다수 학자에게 지지를 받는다.
#저작 연대
-갈라디아서를 예루살렘 공회의(행 15) 이전에 썼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갈 2 를 보면, 바울이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 하지만 행 15 에서는 특별한 역할이 없다.
-갈 2 의 회합은 행 11:30 , 행 12:25 에 나오는 두 번째 예루살렘 여행으로서 부조를 전달하는 여행의 어느 시점에서 이뤄진 사적인 만남이며, 행 15 는 사실상 바울의 세 번째 예루살렘 여행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 사도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여행은 행 9:26-29 에 해당.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바나바가 그를 변호해주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행 9:26-29 와 연결되는 갈라디아서 구절은 갈 1:18-20 이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열심히 사역하다가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부조를 보내러 간 것.
#배경과 목적
-갈라디아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거짓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러 침투했고,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바울이 들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은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그 부분까지도 지적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그것에 더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순종을 해야만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다른 복음을 전했다. 이들이 바울의 복음을 일부 인정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오직 믿음,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고 믿음 이상의 것, 곧 할례와 율법을 추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거짓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이 전한 복음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의 권위에도 심각한 손상을 주고자 사도권을 놓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 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편지를 썼다.
-바울은 자기 권위를 세우고 싶은 권위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부정되면 자신이 전한 복음이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권을 변호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들이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행위 구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매우 속상했다. 다른 복음은 진노에 이른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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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열매, 평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과 축복을 요약한 것이 은혜라면 평강은 그 선물이 성도 개인의 삶에 적용된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요한복음 말씀을 보자.
요한복음 14:27 (NKRV)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직 하나뿐인 복음(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을 보면, 대부분 바울이 안부 인사로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한 다음, 편지를 받는 이들의 최근 소식에 대한 감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고 하고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일어난 사태를 그만큼 급박하고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선동하고 있었고, 이런 무리의 선동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6절을 보면, 얼마나 격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갈라디아서 1:6 (NKRV)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속히”라는 말은 시간상 빨리 떠났다는 뜻일뿐 아니라 경솔하고 생각 없이 떠났다는 뜻도 있다.
그 좋은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의 멍에를 지는 자리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놀라워한다.
“이상하게 여긴다”는 NIV 영어성경에서 ‘astonished’(어스터-너쉬드)라고 표현된다.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실망하고, 꾸짖는 뜻이 담긴 단어다.
그저 “놀랐다, 깜짝이야”가 아니라,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꾸짖음의 뜻이 담겨있다.
왕복으로 방문하며 사랑했던 그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이 은혜의 자리를 떠나고 있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겠는가?
결론적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
유대주의자들은 마치 경쟁적인 두 복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엄청난 죄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난 후,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고 거짓말한다.
열두 사도들이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에게 복음을 가르쳤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원래 사도들에게 배웠던 가르침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거짓말한다.
열두 사도는 모두 유대인으로서 전부 할례를 받았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우며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똑같이 유대의 전통 안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빼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잘못 가르쳤다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초보 단계에 불과하며 이것과 더불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잘못 주장.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갈라디아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감사나 기도를 빼고 본론으로 시급하게 들어간 것.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 복음은 시대를 따라 변하지도 않는다. 한결같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 복음. 하나뿐인 복음이다.
2. 거짓 선생들의 교훈
그들의 교훈은 왜 잘못되었을까?
첫째,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처럼 되어야 성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화까지 전하려고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
상대를 나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교회의 전통을 복음에 끼워서 팔면 안된다. 비본질적인 것을 성도에게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인마냥 강요해선 안 된다.
둘째, 거짓 선생들은 복음에 율법 준수를 더했다.
또 끼워팔기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시내산에서 세워진 율법이 완성하도록 만들었다.
구약 성경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율법 앞에서 넘어졌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완전해 질 수 없다. 그런데 그걸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을 멸망에 빠트리는 것이다. 엄청난 죄다.
왜 이렇게 잘못된 복음이 교회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걸까? 이 당시뿐만 아니라 요즘 시대에도 잘못된 복음이 많다. 왜 그러는 걸까?
사람은 나면서부터 행위 구원론자이며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속에 다른 복음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은혜의 복음은 낯선 것이다. 있는 그대로 수용 받은 적이 없으니까 어색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날 받아준다는 것을 못 믿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두 가지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중심성과 종교성이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좋았다. 기뻤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형편 없는 사람이랑 나랑 동일하게 취급 받는 게 불편하다.
그래서 나의 공로를 더하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더욱 선명하게 구별되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외부에서 보면 오히려 거짓 선생들, 율법주의자들이 더 훌륭해 보인다. 세련된 종교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세련된 종교성이 우리의 죄성을 덮어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우리의 죄성은 끊임없이 은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갈라디아서 1:9 (NKRV)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가?
이것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저 막연하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복음은 한 길이다. 다른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따끔하게 말하는 것이다.
#독립적이면서도 동일한 복음(갈 2:1-10)
거짓교사사들은, 바울이 원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는데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다 보니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을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내용을 빼고 일부만 전한 것이라고 거짓말했다.
이런 거짓 선생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는 독립되어 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지 사도들에게 받은 것이 아닌, 독립된 복음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복음이 따로 있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기원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같은 것이라고 본문을 통해 살폈다.
1차 예루살렘 방문에서 그걸 증명하고자 한다.
갈라디아서 1:16 (NKRV)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혈육’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17 (NKRV)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계시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는 걸 뜻한다. 왜냐하면 분명한 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는 거짓 선생들의 주장은 거짓된 말이다. 그 후 3년이 지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18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18 (NKRV)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바울이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배웠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의견과 달리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간 것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15일을 머물렀다. 짧게 머무르며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
바울이 그들을 만났을 때, 육신을 가지고 지상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21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21 (NKRV)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예루살렘에 단 15일만 머물고 먼 곳으로 이동해 왔는데, 어찌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2차 예루살렘 방문
갈라디아서 2:1 (NKRV)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여기서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은 14년 동안 이방인 사역을 충분히 한 후에 두번째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다. 14년이나 지났다.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는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증거다.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대목이 있다.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올라간다. 바나바는 유대인이고, 디도는 헬라인, 즉 이방인이다.
바나바는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디도는 이방인이기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다.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파격적인 일이다.
갈라디아서 2:2 (NKRV)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의 정서를 잘 아는 바울의 마음에 부담감이 생겼다.
당시 초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길 어려움을 예측하고 그간 수고한 것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사도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할례 문제
눈여겨 볼 사건. 디도를 데리고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무리가 디도에게 할례를 억지로 주려고 한다.
갈라디아서 2:3 (NKRV)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자기 정체성의 핵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외적으로 표시해 주는 것이 할례이다.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 안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런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교회 안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자를 할례를 통해 다시 유대인처럼 만들고 싶어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가 되려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 방식대로 정착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조건을 붙여서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그냥 바꾸면 이기적으로 보이니까 원칙을 내세워서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교회 안에도 본질이 있고 비본질이 있다. 비본질은 상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디도에게 이제 비본질이 되어버린 할례를 요구한다.
이런 유대인들의 도모를 바울이 어떻게 다루었는가?
갈라디아서 2:5 (NKRV)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절대로 디도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4절이다.
갈라디아서 2:4 (NKRV)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할례를 요구하는 이들은 형제의 이름과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니 가짜이다.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걸 빼앗으려 하다니…
Nestle-Aland Greek New Testament, 28th Edition (Chapter 2)
παρεισάκτους
* 가만히 들어오다는 단어는 ‘파레-이스악토스’라는 헬라어의 뜻이다. 이는 직역하면 ‘몰래 침입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이 올바른 것이라면 몰래 들어올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본인들도 당당하지 못한 것이다.
* 몰래 침입하여 교묘한 수법을 쓰는 것은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은 율법을 요구하지만, 뒤에선 정죄감을 스스로 느끼며 자유함 없이 힘들어할 것이다.
* 그저 갈라디아 성도들의 자유를 엿보고 갈라디아 성도들도 자기들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힘들어하기를 바랐다. 아주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정죄에서 자유케 하신다.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 사망에서 자유케 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른다.
성도의 자유를 할례와 같은 조건으로 옭아매려고 해선 안 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여러 조건, 신분, 재능, 학벌, 돈을 가지고 평가한다. 그 결과 그 인생은 수고롭고 힘들어진다.
뭔가 조건과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 인생살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면 피곤해진다.
조건과 자격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자격이나 조건과 같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값없이 복을 받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졌다.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으면 자유할 수 있다.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하게 된다.
#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갈 2:11-16)
갈라디아서 2:11 (NKRV)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령도 낮고 사도도 더 늦게 된 후배이다. 그런데 공개 석상에서 연장자인 베드로를 꾸짖는 일이 생겼다. 왜 그랬을까요?
갈라디아서 2:12 (NKRV)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핵심적인 단어는 “함께 먹다가"이다.
여기서 ‘먹다가’는 미완료 시제 동사이다.
이 ‘먹다가’는 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습관을 보여 주는 동사이다.
한 번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기를 즐기며 자주 했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자주 반복해서 함께 식사했다.
이 당시 문화 속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음식에 대한 율법규정이 200개가 넘었다. 그만큼 먹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그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하나님이 환상으로 이방인이 먹는 음식을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정하다 하신 걸 더럽다 하지 말라 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러 가고, 그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 은혜를 경험한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다. (행 10:34-35)
사도행전 10:34–35 (NKRV)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이 사건으로 이방인의 외적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칭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 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식탁 교제에 찾아와 분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가 절대 문란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야고보도 그 점을 예루살렘 공회의 에서 지적한다(행15:24).
사도행전 15:24 (NKRV)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속아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이방인들과의 식탁 교제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바나바도 그를 보고 덩달아 떠나갔고, 다른 유대인들도 똑같이 떠나갔다. 바나바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자기 성도들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 식탁에 남겨진 이방인들은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웠을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 2:14 (NKRV)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의 행위를 그냥 용납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나쁜 감정을 실어 화를 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 것은, 복음이 왜곡될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꾸짖고 혼을 낸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성도의 교제>
교회는 어떤 교제가 이루어져야 할까?
이방인들을 억지로 유대인처럼 만들어야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새로 들어온 이방인들이 먼저 자리잡은 유대인들처럼 되어야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공동체가 되어선 안 된다.
교회로 들어올 때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깨뜨리는 행위다.
3장에서 다룰 구절이지만,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갈라디아서 3:28 (NKRV)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로 들어올 수 없다?
예수님이 팔 벌려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왜 그걸 막아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막을 자격이 없다.
<복음의 핵심>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고 복음을 정확하게 한번 더 짚어준다. 16절이다.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16절은 갈라디아서의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이다.
16절 앞부분에 이미 복음의 핵심이 다 나왔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밀미암음이라”.
이게 복음의 요약입니다.
그리고 16절 후반부를 볼까요?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천국 앞에 가면, 하나님이 “너는 정말 잘했다. 내 마음에 쏙 든다.”라고 하실까?
이 말을 들을 육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그 내용을 좋아하기는 하나 가슴과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를 충족시키려는 죄의 경향이 계속 드러나온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갈 2:17-21)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구분
갈라디아서 2:19 (NKRV)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게 되면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는 일이 일어난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권위 아래로 오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주신 분인데 스스로 율법의 권위 아래 오셨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명령을 전부 이루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율법은 예수님께 할 말이 없다.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셔서 율법은 요구할 수 있는 게, 할 수 있는 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 정당성을 함께 누리게 된다.
그런데, 그런 우리보고 예수님 믿는거에다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 그 연장선이 20절이다.
2. 새로운 피조물
갈라디아서 2:20 (NKRV)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람의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중심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중심에 묻혀 있던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살기를 멈추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자하고, 이웃이 보이기 시작한다.
3. 예수님과의 연합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되고, 영적이고, 개인적이고, 사실적인 연합이 일어난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우리 안에서 동등하게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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