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5)
Notes
Transcript
따라가다
따라가다
세레요한의 증언을 듣고 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말로는 똑같이 ‘따르다’라고 표기되지만 이 단어는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단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분류된다.
따라가다
따라하다
질문의 중요성
질문의 중요성
처음에는 일단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으니 따라가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청소년기의 새로운 정신적 능력의 산물이라고 했다. 이 시기에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했다.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질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를 따라가는데 ‘질문’이 없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길에 대하여 잘 알거나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AI시대에도 질문을 잘해야 좋은 피드백이 온다.
신앙생활 중에도 단순입력이나 막연한 따라가기는 좋지 않다.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찬양하면서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자녀들에게도 주입식보다는 좋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것이 좋은 훈육법이다.
예수님은 좋은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답변은 매우 수준이 낮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사실 이정도 밖에는 답할 수 없다.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만 알아도 지혜로운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 사람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자들은 단순히 ‘따라가는’ 수준이었지만 이후에는 눈부시게 변화된 모습으로 발전한다.
와서 보라
와서 보라
예수님은 개떡같은 질문도 찰떡같이 반응하신다.
어디계시는지 묻는 제자들의 반응에 ‘그럴때는 이렇게 말해야지’, ‘내가 묻는 질문에 할 말이 그것뿐인가?’ 등의 말들로 훈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와서 보라’고 답변해주셨다.
따라가는 사람들은 보게 된다.
그런데 보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
‘변화 코칭’ 전문가 김성호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무엇을 보려고 하는지 그 의도가 더 중요합니다. 위대한 생각은 위대한 질문을 낳고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사람을 낳습니다.
생각을 해도 답이 없다면 더 치열하게 생각할 것이 남아 있으며,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치열한 생각은 사명감과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답은 있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형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형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간절함과 그의 사랑이 메시야를 보게 한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와서 보라!”
누군가는 예배의 자리에 자신의 간절함과 주님에 대한 사랑을 품고 와서 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불편한 것과 부정적인 것과 단점만 보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로고스 교회 안성우 목사님의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 산맥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히말라야 앞에 서보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 추운 산을 뭐하러 올라가는지, 깃발 하나 꽂고 이내 내려올 일을 왜 하나 싶었습니다. 때론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2013년 ‘한국기아대책기구, 국민일보, CBS’와 함께 네팔 구호를 위한 모금 방송 촬영차 다녀왔습니다.
등반을 위해 네팔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산을 보지 않고 온다는 것은 만드신 분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고 일행을 부추겼습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했는데요, 에베레스트가 오롯이 올려다 보였습니다.
이른 새벽 몸을 실은 차가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갔고, 약40분 걸어 ‘사랑곶’에 섰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간 산을 오르는데 눈앞에 펼쳐진 히말라야의 웅장함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압도적이었습니다. 안나푸르나 설산의 정경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일성은 “아! 산이 나를 부른다.”였습니다.
보지 않고 안다는 것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동안 산이 주는 아름다움과 건강함은 보지 못한 채 오르는 고통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젠 목숨을 건 산악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오르고 싶습니다. 히말라야.
마찬가지 아닐까요?
예수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히말라야를 오르기 전 반응과 닮았습니다. 뭐하러 쉬는 날마다 피곤하게 가서 예배를 드릴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본 사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예수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산에 다시 오르는 사람들처럼 똑같이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주일예배도 드리고, 같이 놀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수요예배도 드리고 북스터디도 하고 이렇게 따라가다보니 ‘질문’도 생기고, 예수님의 일하시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따라가다’보니 얻게 된 것들 입니다.
따라하다
따라하다
‘따른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가다와 따라하다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제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따라하라는 의미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이웃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메시야를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은 지역 촌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나겠느냐며 불신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을 따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서 닮아갑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하여 만나게 되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여 만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무런 감흥도 없고 기대감도 없었습니다.
마치 예배의 자리에서 그런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니 완전히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미 이전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기 이전부터 그리고 나의 청년의 때와 학창시절까지 이미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 앞에 무릎꿇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많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앞으로 우리는 더 큰 일을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빙산의 일각입니다.
주님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요예배 때 마태복음 26장을 나눴는데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마음이 죽을 만큼 고민이 되어 기둥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을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의 도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천사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같은게 어디있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람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전해져 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죽은 사람들은 영적인 감각기관이 죽은 것이고, 거듭났다거나 중생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영이 살아나면 영적인 감각기관도 살아나고 천사들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단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부는 바람을 느끼듯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힘을 얻고, 경험한 사람들은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주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나를 도와달라고’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천사들은 하나님의 섬기는 영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단순히 따라가던 제자들은 점차 예수님을 따라하는 제자들도 변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의 말미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정말 그를 따르는 본이 되어줄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알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 베드로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될지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아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1장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셨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인지 알고 계십니다.
따른다는 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은 의미를 갖게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예배는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