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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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부 설교>
로마서 16:16
“서로 문안하라”
2017. 10. 22
조 정 수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서로 문안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말미에 너희가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문안하라. 여러분 오늘 서로 문안하셨나요? 어떻게 문안했어요? “어, 왔어?” “잘 지냈어?” 보통 이렇게 하죠. 저도 그렇게 한 거 같아요. 그렇게 인사하는 게 몸에 배어서. 이게 우리에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어떻게 하라고 쓰여 있어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거룩한 입맞춤을 하라는 거예요. 입맞춤은 옛날 이스라엘 지역에서 친근함의 표현이었어요. 그런데 본래 입맞춤은 신하가 윗사람에게 충성과 존경을 표현하는 인사였어요. “내가 당신에게 충성합니다. 내가 당신을 존경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표현방식이었어요. 그것이 점차 변형돼서 서로 간에 친근함을 표현하는 인사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그래서 헤어진 지 오래 된 친구라도 이 입맞춤 한 번이면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친근하고 익숙한 감정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입맞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주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0절이나, 고린도후서 13장 12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절에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입맞춤은 단순하게 입을 맞추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아요. 바울은 분명하게 뭐라고 말했어요? “거룩하게” 거룩함으로 입을 맞추라고 말하고 있어요. 따라서 지금 바울은 입 맞추는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안에 거룩함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친밀하게 지내고 서로 미소로 맞이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모두 이스라엘 지역의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서로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서로 입맞춤을 하고 있지만 그 입맞춤이 과연 거룩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질문을 해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가요? 우리가 거룩한가?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거룩해 안 해? 우리는 다 거룩해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아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 거룩해졌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모두 다 거룩함을 얻었어요. 그래서 저도 거룩하고 여러분도 다 거룩해요.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성경은 이미 거룩한 우리에게 거룩해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아멘.
여러분, 우리는 이미 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룩해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은 그래서 때로는 거룩하지만 또 때로는 거룩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우리가 거룩해졌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우리를 거룩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죄 가운데로 끌고 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하는 행동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거룩함으로 행동하는지 아니면 나쁜 감정으로 행동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생각 속에서 입맞춤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친구입니다.” 라고 사랑으로 입맞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칼을 숨기고 입맞춤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친근한 미소로 인사를 하지만 속으로는 흉을 보고 계략을 꾸미는 그런 입맞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불의한 입맞춤이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20장 9절, 10절을 보면 요압이 아마사에게 입을 맞추려는 척하면서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20장 9절을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20장 9절.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얼마나 끔찍해? 반갑게 인사하는 척하면서 갑자기 칼로 찔러서 죽여 버렸어. 앞에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던 거죠. 상대방을 죽이려는 무서운 계략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반갑게 인사를 하는 거예요. 요압은 다윗의 장군이었고, 아마사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반란에 가담한 배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압에 의해서 압살롬이 죽으면서 반란은 끝이 났고, 다윗은 배신자인 아마사를 다시 군대의 지휘관으로 등용하였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배신자인 아마사는 처형을 당해야 될 텐데, 그러지 않고 다윗의 신하가 됐어요.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사실 이때 다윗에게는 배신자인 아마사보다도 요압이 훨씬 더 다윗에게 위협적인 인물이었어요. 다윗이 분명히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지체없이 압살롬의 심장을 찔러 죽였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자신의 복수를 우선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전에는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다가 사울이 죽자 그 아들 이스보셋의 군사령관이 되었는데, 나중에 이스보셋을 떠나서 다윗의 편이 돼요. 그런데 아브넬은 이전에 다윗의 부활들과 싸우다가 요압의 동생을 죽인 일이 있어요. 그래서 요압과는 원수지간이었는데, 이때 아브넬의 다윗의 편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아브넬을 죽이고 말았어요.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요압에게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요압 대신의 아마사를 등용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어떻게 됐어요? 요압의 거짓 입맞춤에 속아 죽고 말았어요. 요압은 나중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열왕기상 2장 32절을 보면, 요압이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말씀대로 요압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거짓된 불의의 입맞춤의 무서움을 알게 됩니다. 천연덕스럽게 가서 인사를 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는 이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모습이 나에게서 발견된다면, 속히 회개하고 떨쳐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의의 입맞춤의 결과는 여호와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기가 행한대로 거두리라 말씀합니다. 내가 행한 그대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그 진리를 여러분 마음에 새기고 항상 진심을 갖고 사람을 대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불의한 입맞춤은 신약에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이죠. 바로 가룟 유다의 입맞춤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8절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에게 “내가 입맞추는 자가 바로 그이니 그를 잡으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맞춤은 분명히 서로 간에 친근함과 사랑을 표현하는 선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 행위 속에 사랑이 아니라 악의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욕설이나 폭력보다도 더 추악한 범죄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 하던 그때 그의 마음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서 자신의 스승을 대적자들에게 팔아넘기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범죄가 피가 난무하는 학살도 아니고 교활한 도둑질도 아니었어요. 뭐였습니까? 친근한 문안인사였어요. 선생님, 잘 지내시죠? 하며 입을 맞추는 친근한 문안인사. 그런데 바로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끔찍스런 범죄 행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친근한 입맞춤 속에 거룩함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런 것 다 버리고 사랑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함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아멘.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거룩함의 모델을 보고 똑같이 행동하면 되는 거예요. 거룩함의 모델이신 예수님과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으로 입맞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예수님과 같이 입맞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뭐예요? 예수님 안에서 입맞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서 로마서 16장 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아멘. 어떻게 문안하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된 우리는 모두 이미 거룩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거룩함을 꾸준히 지켜 나가야 하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나약한 우리가 의지할 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문안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처럼 문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셨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서 치료하셨어요.. 그때 예수님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죠. 겉으로만 친근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도 똑같은 친근함이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모습. 언행일치라고 하죠. 그런데 마음과 행동이 같으니까 뭡니까? 심행일치? 네, 좋은 말이죠? 여러분, 심행일치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친구를 대할 때나 교회에서 성도를 대할 때나 항상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언어로 그들을 대하고, 사랑의 행동으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과 주의 거룩함으로 서로 문안할 때 우리 안에 사랑과 거룩함이 더욱 풍성하게 더해질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함으로 서로 문안하여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아끼는 우리 평민교회 중고등부 학생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