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9장 (개강집회 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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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믿겨지지 않는 성경의 현장으로 눈을 돌려서 이 사사기 20여 장이 넘는 전체에 걸쳐서 오늘 기록은 마지막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제 수업시간에 다 구의학 교수님들한테 공부를 하셨겠지만은 이 사삭이라는 책은 연대별로 기록된 사건들이 아니에요. 오늘 18장 19장 20장 이렇게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어 사사기 전체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결말의 부분에 가서 같이 나누겠지만, 4사기 말 시대는 사무엘 상 기록을 들여다봐야 사사기 말 시대가 얼마나 끔찍했던 시댄가 거기에 이런 기록이 나오죠. 엘리트 아들이 성전에서 성전의 시종 두는 여자들과 동침을 한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데 이 동침을 한다는 히브리 말은 그 앞에 접속사가 있습니다. 근데 그 접속사가 붙을 때 이 동침은 그냥 일반적인 동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간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 영적인 간음의 실체가 뭔지 압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제사장놈들이 친접한 여인과 동침을 해서 예수무당을 했어요. 오늘 식으로 얘기하면 그래서 예언을 받고 이따위 짓을 성전 안에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엘리 두아들이 성전 안에서 저질렀던 무서운 영적인 간음이에요. 오늘 19장 끝부분을 우리가 봉독을 했는데요. 1절부터 좀 보십시다. 1절 1절을 보시면 1절만 한번 같이 읽을까요?
시작 여러분 이제 성경을 공부하면서 성경에는 말놀이가 있다는 거 아시죠. 워드프레이라고 그러죠 성경 소개는 이렇게 쭉 읽다 보면 문자로는 메세지화되지 않는 하나님의 가슴 하나님의 마음이 굉장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말놀이를 통해서 사사기 전체를 통해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겁니다.
오늘 여기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없을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나요? 이스라엘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셨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본문이 이렇게 서서히 사삭이 결말을 내려가고 있는 것은 어떤 저의를 가진 기록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1번도 하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던 시대 역설적인 고발입니다. 우리 교단의 상황과 우리 총신의 상황과 우리 한국교회 상황과 맞물린 고발인지 두려울 정도예요.
즉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왕이 없어진 시대예요. 왕 자기가 만든 열정과 자기가 만든 종교로 하나님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을 뿐이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잖아요. 자 이런 시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보십시다. 이스라엘의 왕이 없을 그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성경 기자가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남겼죠.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라고 그래서 깡촌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강원도 두메 산골 정도로 이해하시면 맞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교회 공무원입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와 비슷한 구별된 인생을 살아가야 될 존재 뭐 레위인이 전부 제사장이 되는 건 아니었어요. 근데 어쨌든 이 레위인은 그런 교회 공무원 개념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에게 유답 베들레임에서 첩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되죠. 세상적으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에 첩을 둘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일부일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교회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한 심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만고불변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기본 질서예요.
이거는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정 윤리 정도가 아니 성경 전체의 중요한 하나님의 기본 질서예요.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얼마나 영적인 타락에 도탄에 빠져 있던지 예위 부인에게 첩이 있네요. 첩이 그런데 이 첩은 소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런 개념의 첩이 아니고 이 첩은 정식 부인입니다. 거기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히브리 단어를 성경을 통해서 들여다보면 이 당시 이 기독교 윤리적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던가 우리가 보통 첫째, 부인을 이슈아라 그래요. 이슈아 그죠 둘째, 부인을 차라라 그래 차라 셋째, 부인을 뭐라 그래요.
펠레게시 여기에 나온 첩은 이샤도 아니고 샤라도 아니에요. 펠레게시를 얘기해요. 그러니까 첫 번째 부인도 아니고 두 번째 첩도 아니고 그 이상 펠레게시를 얘기합니다. 이 정도 데리고 살라면 이 레위는 소위 재력이 빵빵 하지 않으면 이 정도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참 가슴 아픈 것은 이 여자는 어디 여자예요. 베들레임 여자예요. 당시 고대 문헌을 들여다보면 베들레임은 상당한 도시였습니다. 당신 그럼 도시 여자가 도시 여자가 깡촌 두메산골로 시집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경제적인 이유 외에는 없어요.
돈 때문에 간 겁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회 전체적인 윤리적 시스템이 어느 정도로 어떤 범위에서 어떤 깊이로 깊은 흡암에서 흔들거리고 있는가를 여러분들이 이런 배경을 통해서 감지해야 돼요. 도시 여자가 시골로 뭐하러 갔겠어요. 그리고 이 레위는 첫 번째 부인도 아니고 두 번째 첩도 아니고 펠레게시 셋째, 이상입니다. 그러면 뭔 아내를 많이 데리고 있습니까? 그건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믄 이 사람이 종교 공무원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축적을 하고 살았을까?
그래서 오래된 문헌을 참고해 보면 기가 막힌 집들이 벌어지고 있었소 레위인이 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부적을 세공해서 팔아먹습니다. 부적을 세공해서 그런데 오늘날에 교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앙을 진흥시킨다는 병목으로 그따위 짓들을 해요. 안 합니까? 합니다. 부적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과 종교성을 동기유발시켜서 얼마나 그런 짓들을 유사한 짓들을 많이 합니까?
게다가 지도세 신방세 제가 오래전에 있던 교회는 신방을 가면 감사원금 봉투 하나 신방받는 신방 가신 목사님 교통비 봉투 하나 반드시 2개가 나오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방 한번 하고 나면요 수입이 짭짤해요. 1년 연봉을 넘어요. 그러니까 연말마다 이 목회자들이 무슨 짓들을 하냐면 행정실장한테 로비를 해 가지고 내년도에 좋은 교구를 좀 배치받으려고 나 어느 교구 좀 가게 해 달라 실화입니다.
실화 그래서 제가 우리 강남구에 17년 전 부임해 가지고 제일 먼저 건드렸던 부분이 그 부분입니다. 아니 목사들이 왜 왜 신방하고 돈을 받냐 왜 주례하고 목사들이 돈을 받어 에 그리고 어떤 때는 또 개인적으로 기도해 달라고 봉투를 갖고 들어와요. 그거 예배시간에 내라고 내보냅니다. 예배시간에 내라고 자꾸 사람이 사이에서 작용이 되면 안 돼요. 근데 그런 것들이 아주 대접이라는 명목으로 만연돼 있어요. 만연돼 있어요.
여러분 성도를 주례 하면 그거 내 새끼 아닙니까 그래 애비가 지새끼 주례하고 나서 수고했다고 봉투 받아요. 맨날 말씀을 전할 때는 우린 다 가족이라고 얘기하면서 가족한테 그렇게 사례 챙기는 겁니까? 여러분 이게 아주 지엽적인 문제 같지만 얼마나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적인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있는지 여러분 압니까 그런 조그마한 거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게 결코 쪼그만 일이 아니에요. 결코 제발 우리 후배님들은 목회 현장에서 이런 돈 문제 여기에서 자위하지 않으면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아 신대원 다닐 때가 아니고 학부 다닐 때군요.
학부 다닐 때 이 캠퍼스가 사당동 안에 같이 있었어요. 신대원하고 그래서 가끔 신대원 강의실에 들어가서 우리 형님들 강의를 인제 도강을 했죠. 그때 박윤선 목사님이라는 분이 강의를 하셨어요. 여기 인제 교수님들은 그분 강의를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마는 그분이 말씀 이렇게 유창한 분이 아니에요. 늘 거의 반은 눈을 감으시고 어금니를 악 모시면서 말을 더듬더듬하시는 분이에요. 유럽은 지금이래도 이거 아니라 생각하시면 돌아가십시오. 거의 매 시간마다 그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애요.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그래서 돌아간 선배들이 꽤 있어요.
저는 3일 동안 한 번씩 꼭 이 말을 지금 해야 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그래도 이 길이 아니라면 여러분 돌아가십시오. 그 결단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정말 정말 에레미아처럼 에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굉장히 버텼어요. 21살 약관의 나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데 그거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성격도 내성적인 데다가 그것도 가장 핵심 중앙정부 부패 관리들한테 가서 얼굴조차 보기 싫은 원수들한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데 정말 원하질 않았어. 몇 번 하나님 앞에 버팁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그에게 소명을 거듭 확인해 주자 그는 결국 울면서 그 길을 갑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예요. 그래서 달레 눈물의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기 싫은데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면 이 길을 가셔야 됩니다. 아니면 아니면 빨리 돌아가세요. 이건 진짜입니다. 오늘 이 1절에 1절만 봐도 우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두꺼운 어두움에 짓눌려 있는 시대였던 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안에 문제가 생겼어요.
첩이 행음을 해 가지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그 레위인이 그 첩인 아내를 친정집으로 데리러 갑니다. 찾으러 갑니다. 나중에 보면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그저 육적인 쾌락의 대상이었을 뿐이에요. 애정이 있었다면 그 점을 동네 깡패들에게 그렇게 겁탈을 당하도록 내주겠습니까? 돌아오다가 기부하라는 곳에 이숙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돌아오는 길목의 예루살렘을 들르게 됩니다. 동네 낯선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 사람을 환대하지 않는 것은 체면 문화가 강했던 유대 공동체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문제였어요.
그래서 이런 나그네환대법은 굉장히 중요한 법이었습니다. 근데 아무 아무도 이 사람들을 집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사회는 자비가 사라진 시대였어요. 자비가 없는 무정한 시대였어요. 해는 져서 어두운데 초청하는 사람은 없고 우두커니 길목에 첩을 데리고 종들을 데리고 짐승들을 데리고 앉아있는데, 노인 하나가 와서 어디서 오시는 길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여차저차해서 지금 이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얘기를 하게 되죠. 그러니까 노인이 이 노인은 기부할 사람은 아니었어요. 타지 사람이었어요.
우리 집에 들어와서 유성하시라고 근데 그 집에서 인제 3일 맥시멈 기간이 3일이에요. 3일 좋은 환대를 받고 갈려고 하는데 문제는 노인이 붙잡는 겁니다. 하룻밤 더 여기서 즐기다가 묻고 가면 안 되겠냐고 그래서 하룻밤 더 즐기다가 묵고 일어나서 갈려 그러는데 또 붙잡습니다. 자 그런데 삼 일을 넘겨서 넷째, 날 다섯째, 날까지 머물게 된 그 기록을 조금 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자를 보시냐면 성경을 보십시다. 19절서부터 저하고 교독을 좀 합니다. 19장 19절입니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집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정과 당신의 주홍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절 시작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해 먹이니 그들이 팔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22절이죠.
아 23절 집주인이 그 사람의 그들에게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예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앞을 보세요. 제가 지금 착각을 했는데 이 아내를 데리러 갔을 때 그 집에 인제 장인어른이 되겠죠. 장인어른이 3일째를 머물고 가려는 이 사람을 레위 사람을 넷째, 날 다섯째, 날까지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붙잡는 기록을 잘 들여다보면 계속해서 밤을 지내고 먹고 마시니라 밤을 지내고 먹고 마시니라 그럼 뭘 뜻하냐? 하면 그 당시 집집마다 완전히 가족관계와 윤리 도덕이 무너진 퇴폐적 행태를 그렇게 문예적으로 묘사를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첩을 찾으러 갔다가 그 집에서 5일까지를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먹고 마시고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런 기록이 있어요. 앞부분에 보면 그리고 길을 오다가 이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비가 사라진 동네에 불량한 사람들이 문을 두들기면서 동성 강간을 요구합니다. 근데 어느 문명사든지 보면 어느 문명사든지 보면 동성 강간이 자연스러워질 때 그 문명은 이제 망조를 향해서 가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창세기 19장에 정확하고도 똑같은 상황이 다시 등장을 합니다. 거기에도 동성 강간을 요구하는 무서운 짓들이 벌어집니다. 그때 딸을 내주겠다는 그런 표현들이 등장을 하죠.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할까 이 기부의 한 노인이 자기 집에 유숙을 하러 들어온 이 레위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첩을 내줍니다. 이 첩을 뭐하러 찾으러 갔던 거예요. 단순한 육적인 쾌락의 대상으로 이해서 첩을 내주고 자기들은 집 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깐 시대가 얼마나 기초 자체가 무너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길을 떠날려고 문을 열어보니까 여인의 손이 문지방에 걸쳐 있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죽음 같은 밤이었겠어요. 그리고는 깨워서 보니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예요.
그리고 이 첩을 데리고 와서 12토막을 냅니다. 우리는 보통 12토막을 냈다는 것은 12지파이기 때문에 12토막을 냈다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는데, 뭐 그런 이유도 가능하겠죠. 그러나 이때는 이 12토막 내는 것들이 비일비재한 당시 잔인상이었어요. 요즘에 나오는 영화들 보면 얼마나 잔인합니까? 옛날에는 서부영화 같은 거 보면 1:1로 싸우죠 그리고 총알도 딱 하나를 쏴요 빵 쏘고 상대방이 고꾸라지면 쓸쓸히 은은한 백뮤직과 함께 아주 괴로워하면서 떠나가는 그런 조금 낭만스러운 장면이었는데.
이게 언제부터 무너졌는가 하면 람보가 나오면서부터 이게 무너져요 람보 아주 기관총을 들고 나와 가지고 온 마을을 야 이것들아 밥 1끼 먹자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그리고 두루룩 갈기기 시작해요. 람보시대부터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에 나오는 영화 보세요. 추격자 거의 하종우인가요? 그냥 아주 잔인하게 웃으면서 살해도 안 해요. 아주 무표정하게 쑥쑥 그어요. 그냥 무표정하게 영화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래야지 감각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얼마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감각이 없어진 시대인가 그만큼 무정하고 무자비해졌어요. 이게 말세의 전형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리고 12토막 시체를 각 지파에 배송을 시킵니다. 근데 문제는 성격을 좀 보십시다. 몇 절을 보시냐 하면 29절을 보세요. 오늘 본문이죠. 29절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12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보냄에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국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이런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더 기함할 일은 이 12지파에 다른 지파에 이 사건을 놓고 반응하는 반응들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2가지 꼭짓점을 봐야 돼요.
첫째는 레위의 행동입니다. 이건 소위 인제 오늘 아주 극단적인 예로 들자면 목사가 사창가 가지고 잠자고 일어났는데 지갑이 없어졌어 이런 천인공방할 일이 있을 수 있나 하고 용산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네 에 목사가 무슨 일입니까? 그랬더니, 아 내가 여기 사찰과 가서 하룻밤 몸을 풀고 일어났더니, 지갑이 없어졌다고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어떻게 발생하냐고 이러는 거 하고 똑같은 짓이에요. 지금 그니까 뭐가 뒤집어져 있는지를 세상이 얼마나 혼란 속에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뭐에 지금 분노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연합이 잘 안 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에요.
사실은 이 집화마다 독특한 칼라 때문에 근데 이 기상천외한 사건을 토막난 시체를 통하여 보고를 접하고 나서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가를 한번 보십시오. 20장 1절 자 제가 했습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부엘세바까지 이 표현은 이스라엘 전 지역을 얘기합니다. 까지 와 길러아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쓰바에서 요 앞에 모였으니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집하의 어른들은 하나님 총회 백성이 총에 섰고 칼을 빼는 보호병은 얼마예요. 40만 명 최고로 많이 모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질문을 하나 던져야 돼요. 우린 지금 레위인이 이 사건을 바라본 시각과 그리고 이 사건의 보도를 접한 전 이스라엘 주파의 반응을 봤어요. 그런데 그 반응의 결과가 뭐예요? 40만 명이 모였어. 일제히 여기 일제히라는 말은 히브리말을 들여다보면 한마음같이 모였다. 그 말이 한마음 같이 뭐 땜에 그렇게 많이 모인 겁니까? 뭣 땜에 여러분 많이 모이는 거 좋아하지 마세요. 너희가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한국교회 많이 모이는 현장 많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리고린이 한국교회 이 메시지를 던지러 온다 그래 가지고 어쩌다가 제가 재정을 맡게 돼요.
재정 예 팔자에도 없는 재정을 맡아 가지고 이제 대회를 소위 시다발휘를 했어요. 상하 월드컵 경기장에 10만 모였어요. 그때 여기 가셨던 분 계실 겁니다. 저는 거기 앉아가지고, 좀 멍한 생각이 들었어요. 멍한 생각이 10만이 모였어요. 그리고 그날 헌금을 했는데 재정부장이니까. 그 헌금 관리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순봉교회 장로님들 30명을 갑자기 동원시켜 가지고 돈을 저녁부터 시작해서 저녁 한 9시인가부터 시작해 가지고 새벽 3시까지 돈 쉬었어요. 새벽 3시까지 평생 만져볼 돈을 그때 다 만져봤어요.
수억을 갖다가 뭐 잔돈서부터 지폐까지 돈을 세는데 그러면서 그때 제가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첫째는 왜 이렇게 많이 모이나 왜 이렇게 많이 모이나 그 무엇 때문에 모이나 40만 명이 모였어. 40만명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모임 숫자도 문제지마는 이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무엇에 붕괴하고 있는가 똑같다는 얘기예요. 사실은 전부 같은 얘기를 하고 있어요. 사실은 레외의 관점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반응도 그랬고 모인 숫자가 말하는 의도도 그랬고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 뭐라 그래요. 우리 20장 7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뭘 내라고요. 너희 의견과 방책을 내라 이것이 굵은 사삭의 기조입니다. 우리 가끔 교회에서 회의들 많이 경험하죠. 제가 당회 할 때는 우리 장로님들이 33분인데 꼭 그 얘기를 합니다. 장로님들 이 당회는 회의라는 성격과 모양을 띄었지만 이건 회의 아닙니다. 당회는 교회 모든 원례회든 당회든 모든 모임은 모든 회의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리지 사람의 의견과 방책을 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꼭 그 얘기를 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미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말씀도 사라진 시대였던 데다가 이들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그러한 관습에 깊숙이 젖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19장 30절에도 보면 맨 끝에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아니라 20장 칠절에도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학교도 그랬고 총회도 그러고 교단도 그래요. 지금 사람의 방책만 자꾸 돼요. 사람의 방책만 뭐 이사회 한다고 그러면 아니면 아니라고 그랬어요. 맞아요. 여러분 사람의 방침만 자꾸 내는 거예요.
기도에 가면은 기도는 한 10분 하고 저마다 의견내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결국 자기들의 열정과 의견으로 자기네들이 만든 하나님과 기독교를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우상이에요. 이게 딴 게 우상이 아니야. 교회 안에 얼마든지 우상 섬기는 짓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로마스 12장이 뭐라 그랬어요. 10장이 뭐라 그랬냐 너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니라 열심히 중요한 게 아니고 열심히 해야죠 열심히 해야 되는데 열심히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중요하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하죠. 그래서 사역자들은 2가지를 항상 머릿속에 기도하세요.
초점과 밸런스입니다. 초점과 균형 그런데 보세요. 이들이 결국은 범죄한 베냐민 집화를 단죄하기 위해서 40만의 총궐개를 하고 일어섭니다. 자 그 인제 골기의 장면을 좀 들여다보십시다. 몇 절을 보셨냐 하면 20장 18절을 보세요. 제가 좀 읽겠습니다. 17절부터 읽겠습니다.
베냐민 자손 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40만 명이니 다 전사라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배들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어쭈어 이러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이게 참 웃기죠 이게 성경을 성경을 이렇게 하나님의 표정을 통해서 읽어보면 성경만큼 코미디 같은 책이 없어요. 이것들이 종교적인 모양과 행위는 그대로 또 갖추어요. 하나님 앞에 다 물어요. 없는 태도를 잘 보시면 뭐라 그랬어요.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니까 이미 방향은 지네들이 정해놓고, 형식만 취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니까 이미 전쟁을 하겠다고 정해 놓고 와서 폼만 잡는 거야.
하나님 앞에 묻는 폼만 모든 기도회가 다 그래요. 모든 지폐가 다 그래요. 이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올라가라 올라가라 이거 이게 응답이에요. 올라가서 어떻게 됐습니까? 박살이 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지 않았거든요. 누가 먼저 올라갈 일까? 그러니깐 올라가라 그랬으면 올라가라 그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보셔야 돼요. 두 번째 보십시다.
자 19절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부하를 대하여 진을 치느라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진열을 갖추고 기부해서 그들과 싸우고자 함에 베냐민 자손이 기부하여서 나와 그래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2만 2천 명을 땅에 엎드렸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엿쭈어 이러대 그랬습니다. 저물도록 뭐 했다고요. 울며 그랬어요. 여러분 사사기 전체는요 울음으로 시작해서 통공으로 끝나요? 1~2장에 잘 보시면 복임 사건이 유명하죠. 거기서도 이들이웁니다. 근데 그게 회개의 눈물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지성진에 북받쳐 가지고 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은요, 뭘 조심해야 돼 특별히 우리 이 전임 사역자로 부름받은 이 목사를 포함 우리들은 기독교에 익숙해질수록 종교적인 행위가 더 심화된다는 거를 이 위협이 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그게 신앙인 줄 알아요. 종교적인 행위만 심화될 수가 있단 말이에요. 내용은 하나님하고 전혀 관계없는 채 하나님하고의 전인격적인 부딪침이 전혀 없는 채 종교적인 행태만 심화된단 말이야. 그게 신앙인 줄 알아요. 그게 이게 회개한 거예요. 그냥 울었다고 돼 있어요. 저물 들어 울어요. 저물도로 자 근데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 앞에 점을 들어 울며 여우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폐남인과 싸우리까 이제 조금 말이 달라졌죠 싸우리 가 근데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여기 가서 말씀하실 때 올라가서 치라 여전히 승리를 약속하지 않아요. 그리고 3번 만에 베냐민을 꺾도록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합니다. 그것은 양쪽에 다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지를 주는 거예요. 2번의 패배를 통해서 전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1번의 승리를 통해서 베냐민을 심판하시는 것 그리고 이 사사기는 통곡과 통곡으로 끝이 납니다. 자 우리는 그러면 이 사사기를 통해서 이제 결론 부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역사의 새벽을 열어가시는가 여러분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자료 한번 보십시오.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25절 21장 25절 다같이 시작 그때의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어둡고 착차반 기록으로 사사귀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사사귀는 큰 소리로 울면서 시작해서 큰 통곡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은 이 어두운 역사를 아주 끄지아니하시고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께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고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그 자비하심으로 어떻게 이 시대를 준비하시는가 그건 알기 전에 그걸 알기 전에 사사기가 왜 이렇게 시작이 되었는가 하는 키워드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사사기는 왜 이 시대를 이렇게 출발하게 되었는가 무서운 기록이 1 감추어져 있어요. 사삭 2장을 다 같이 엽시다 2장 같이 읽을까요?
시작 그 세대의 사람도 다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자 잘 보시면 1세대는 다 지나갔어요. 우리 한국 교회도 이제 1세대들의 두꺼운 역사의 1페이지가 넘어갔어요. 다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후에 일어난 다음 세대입니까? 다른 세대입니까? 예 다음 세대예요. 다른 세대예요. 넥스트 제네레이션이 아니라 다른 종자가 일어났어 그 종자의 2가지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고발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 하였더라 뭐가 문제가 되었다는 얘깁니까 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유산이 물려지지 않은 겁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년기의 교훈이 전달되지 않은 겁니다. 이게 끊어진 거예요. 제가 여름 성경학교 교사 강습의 부흥회를 100개 넘는 교회를 한 80프로는 돌아다녀 봤어요.
율동해야죠 노래 가르쳐야죠 말은 교사 강습에 여름성경학교 붙여놓고는 성경 가리키는 시간은 하나도 없어 하나도 예 교회마다 그리고 전부 이상한 눈에 즐거운 거 몸에 보기 현란한 거 여기에만 이상한 프로그램 애들 전부 다 매력들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질 않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에 여기 여러분들은 바이블 피처가 돼야 돼 성경을 가리키는 사람이 되어야 돼 왜 오늘날 전도사님들이 왜 오늘날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없단 말야 믿음이 예 그건 이론이고 그래요. 맞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를 끌어모을까?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 하였더라 10년기의 약속이 전달되지 않은 거예요. 끊어져 버린 거예요. 지금 한국 교회가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봉착해 있어요. 제일 제일 화나는 일이 목사들이 성경본문 읽어놓고 딴소리 하는 거야.
딴소리 그럼 차라리 그 시간을 예배시간이라고 그러지 말고 간증시간이라 그러든가 그러면 그냥 앉아서 편안하게 듣지 간증도 필요한 거니까 사사기의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를 준비하시는가 우리 사무엘상 1장으로 한번 가서 보십시다. 여기도 에브라임 산지가 등장을 합니다. 1장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 소비메 에브라함 사람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요로함의 아드리오 엘리우의 손자의 도우의 증손인 숲의 현손이더라 앞을 보세요.
여러분 왜 사무엘상이라는 책은 이 첫장 첫 절에 이런 낯선 족보로 책이 시작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 족보는 누구의 족보죠. 한나의 남편이 되는 엘가나의 족보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그 역대기에 보면 이 족보가 다시 등장을 하는데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어요. 3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째, 레위 레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에브라함 산지의 레위 사람이에요. 둘째, 제사장이에요. 셋째, 레위 사람이요. 제사장이요. 그중에서도 아주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 가운데 뽑혀서 소위 말하면 찬양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전문적으로 떨어들이는 특별히 구별된 존재예요.
그러면 이 당시 종교적 배경상 이 정도 집안이면 괜찮습니까? 신통치 않습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이건 요즘 우리 교회식으로 얘기하면 아버지가 개척자요 그 아들이 또 목사님이오 또 그 손자가 또 총신 신대원의 주예종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뭐 영적인 명문가죠 그 정도 대단한 집안이에요. 그런데 2절에 보면 이 본문 구조를 통해서 성경 기자가 아주 슬쩍 1가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그에게 2아내가 있었으니 그렇죠. 뭘 말하고 싶은 걸까요? 이 행간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하나님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단 말이야.
예 레위직파요 제사장이요. 찬양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안에 사람이 그에게 2아내가 있었으니 이게 사사기 말 시대입니다. 이것이 매우 사회 전역의 보편화되어있던 시대예요. 2아내가 있었으니 2절을 보세요. 1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1사람의 이름은 군인 나라 자 두 아내 이름이 소개되고 있죠. 첫 번째 부인 이름이 누굽니까 이름 좀 외웁시다 누구예요? 두 번째 부인은 둘 있나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 2여인의 서열이 제대로 쓰여져 있어요. 근데 2절이 다 채 지나가지 않아서 두 여인의 서열이 뒤집어져 있습니다. 맞죠. 성격을 잘 보세요.
2절 중반전에 보면 1사람의 이름은 군인 나라 분인 나에겐 자식이 있고 한 나에겐 자식이 없었더라 두 여자의 순서가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근데 중요한 건 뭘 기준으로 바뀌었냐 말이에요. 자식이 있고 없고로 바뀝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그 구약 선생님 중에 김희보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이 부분을 어떻게 그때 가르치셨는가 하면 그 시대를 압축한 하나의 컷 가지고 왔다 여러분 신문에 그 1칸짜리 만화 쓰는 분들 있죠. 김상택 씨 같은 분들 그럼 그 1컷 만화만 보면 그 시대상을 딱 한눈에 앞축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열매가 있어야 될 백성들에게는 열매가 없고 열매가 없어야 될 사람에게 열매가 없어야 될 사람에게는 열매가 있고 열매가 있어야 될 여인에게는 열매가 없는 그 시대의 백성들의 삶의 형태 그거를 이 2여인의 자식이 있고 없고를 통해서 1컷짜리 그림으로 보여준다는 설명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어를 여러분들이 공부하시다 보면 이 히브리어는 성경 자체가 병치 구조라는 게 있어요. 병치구조라는 건 뭐냐 하면 또 정신줄 놓고 있다가 병신구조라 그랬냐 이러면 안 돼요. 병치구조라는 거는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메세지를 드러내고 싶은 의도를 얘기하는 겁니다.
자 근데 여기서 똑같은 패턴이 뭔가 하면 이게 번역 성경이다. 보니까 그 구조를 다 죽여놨어요. 사실은 그런 거 굉장히 많죠 뭐 시편 같은 데도 보믄 알랩 끼멜 베드 이런 알파벳 순서를 통해서 독자들이 읽기 좋고 외우기 좋도록 기록된 시편들이 많아요. 알레베드 끼멜 그런데 번역 성경은 이걸 쭉쭉 다 옛날엔 썼어요. 그냥 그러니까 이 구조가 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렇듯이 이 병치 구조로 쓰여 있단 말이에요. 똑같은 패턴으로 그럼 그 똑같은 패턴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있고 없고의 구조예요. 자 분인 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고 이 구조가 반복이 돼요. 성경을 잘 보세요. 군인 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뭐예요? 없고 또 읽어보십시다.
3절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음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홈네와 비누아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뭐예요? 있었더라 자 이제 저를 보세요. 성경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싶은 의도를 찾아야 돼요. 그게 여러분들의 사실 과제입니다. 자 군인 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고 엘리에겐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고 그리고 이 병치 구조가 맞으려면 여긴 누군가 뭐가 없어야 돼요. 근데 성경이 이 부분을 침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게 뭘까를 오늘 결론으로 여러분들하고 찾아내라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요.
이 3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인지 잘 못 알아듣는데 다시 절 보세요. 본인 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고 엘리에겐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고 여긴 누군가 없어야 되는데 성경이 이 부분을 침묵을 하고 있어요. 이게 뭘까? 두고 봅시다 이거 일단 성경이 말하지 않으니까 넘어갑시다 4절 보세요. 엘가 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재물의 분기슬 그의 아내 분인 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겐 얼마를 줍니까 자 저를 보세요. 이렇든 저렇든 엘가 나는 누굴 더 사랑했어요. 뭘로 할 수 있어요. 갑절을 준 걸로 봐서 확실해요. 근데 문제는 질문합니다.
그 남편의 갑절의 사랑이 한나에게 위로가 돼야 안돼요. 위로가 안돼요. 하나의 깊은 슬픔의 요체가 뭐예요? 자식이 없어서 성경이 어디 그렇게 써 있습디까 자식이 없어 슬프다고 예 성경이 그렇게 써있어요. 여러분 근까 여러분들이 자 앞을 보세요. 성경을 읽을 때 겉으로 읽지 마세요. 성경에는 한나가 자식이 없어 슬프다는 얘기가 밤마디도 써있질 않아요. 그럼 우리가 어디서 들은 외워 가진 결론이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나의 슬픔의 유체가 뭘까? 성경을 잘 보세요.
5절 한나에게는 갑조를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분인 나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자 이제 저를 보세요. 여러분 여기 지금 동의반부가 나오죠. 그게 뭡니까? 여호와께서 글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글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왜 같은 말을 2번 썼을까요? 빈칸 채울라고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말을 2번 하는 거는 강조법입니다. 여기에 키가 있어요.
이 당시는 이 시대는 어린 아기 어린아이래도 어린아이래도 태중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걸 누구나 다 압니다. 그래서 이 당시 사람들은 의식 속에 어떤 동요가 가능했는가 하면 자식을 갖지 못하면 저주받은 여자로 동의어로 이해를 했어요. 저건 하나님 앞에 버려진 존재야 이게 가능했단 말이에요. 의식 속에 이해가 돼요.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 군인 나가 주제에 본부인을 격분시킬 수 있는 근거가 뭐냐면 저 여자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여자 이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는 말이 2번 나오는 것은 한나의 슬픔이 애가 없어서가 아니라 악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깊은 문제가 있어요. 나는 나는 어쩌면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는 아닐까 에 나는 어쩌면 하나님께 내쳐진 끊어진 존재는 아닐까 이것이 한날을 깊은 슬픔으로 밀어놓은 겁니다. 아이가 없어서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정답이 아니에요. 그건 피상적인 대답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시기한 시대에 각기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에 이런 통증의 심령을 가진 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얼 말하시려는가를 잘 보셔야 돼요. 나는 정말 어쩌면 하나님께 내쳐진 버려진 끊겨진 존재는 아닐까 이것이 하나를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밀어넣은 겁니다. 그래서 그 슬픔을 가지고 성서로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오열을 터뜨리며 통곡을 터뜨리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새로운 통곡으로 책이 시작이 돼요. 그때 저 성전문이 열리더니, 영역이 별로 탁월하지 못한 제사장 하나가 들어오더니, 그 광경을 쳐다봐요. 예예 너 지금 뭐하냐?
어 오늘도 취해 있냐 끊어라 어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그 모양이냐 이거 보세요. 웃을 일이 아니라 희대의 리더들이 제사장들이 영적으로 맑아 있지 않으면 헛소리 하게 됩니다. 그 헛소리예요. 백성들의 가슴에 진짜 고통이 뭔지를 못 본단 말이에요. 딴짓들하고 끊어라 그래서 한나가 기가 막힌 고백을 해요. 역사의 여명을 여는 고백을 해요. 아니야.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오. 하나님과 뭘 통해요.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는 어마어마한 고백을 합니다.
저는 이번 어제부터 시작된 개강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1학기 내내 한 심정을 통하는 경험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은 했는데 그러면 그 심정을 통한다는 게 뭘까? 한나가 고백했던 그 심정을 통했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이 사사기의 종막을 하나님이 어떻게 끊어내는가 기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마지막으로, 한나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몇 조를 보셨냐면 10조를 보세요.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이건 보통 기도가 아니었어요. 자기 전 운명을 건 기도였어요.
통곡하며 서운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 하여 만일 주의 여정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정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해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 그를 여호하께 드리고 사또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 자 앞을 보세요. 자 앞을 보세요. 여러분 이 한나의 유명한 기도를 많이 들여다봤을 거예요. 근데 이 기도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수상한 점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보여집니까 저 이 기도가 이상한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1는 아들 1만 있으믄 게임 끝나요? 그래서 아들을 아들을 달라는 기도까지는 이해가 돼 그죠 그런데 주시면 어떡하겠대요 도로 내놓겠대요 이상하잖아요. 달라는 그 아 네롤노머 아들을 왜 달라고 그래요. 네놀노머 아들은 여기 비밀이 있어요.
자 우리는 보세요. 그러니까 서양 신학자들의 해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부분을 해석 못해요. 그래서 지금은 동서양의 신학이 다시 만나야 돼요. 우린 계속 서양신학을 카피하는 데만 급급했는데 성경을 잘 들여다보세요. 한국 사람의 심성만 이해하고 해석해 낼 수 있는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 심정이 통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통했다. 예 심정이 통했다는 말이 간단합니다. 내가 니 마음 알고 니가 내 마음 알았다. 그 말 아니에요. 그 심정이 통했다는 말 아니에요. 에 내가 니 맘 알고 니가 내 맘 알았다.
한나가 그 기막힌 영적인 고통과 슬픔을 끌어안고 성서로 들어가서 전 존재를 건 기도를 하는데 통곡의 기도 속에 어느 한 정점에 뻑 하고 저쪽 터널에서 이쪽 터널이 맞닿아 뚫리듯이 하나님하고 가슴이 뚫어지는 경험을 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구나 그렇구나 나같이 비탈한 계집도 자식이 하나 없으면 이렇게 운명이 슬프고 인생이 허무한데 허무한데 누구 마음을 알았다고요. 자기 고통을 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어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은 옛 말씀이 끊어진 깜깜한 시절 할아리가 사람이 없을 때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얼마나 기가 막힐까 예 말씀이 끊어졌던 시대예요. 말씀이 선포되지 않던 시대예요. 각기 소견에 오른 대로 행하던 시대예요. 얼마나 기가 막힐까 할아리 선생님 그런 아들 주시오. 내놓겠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역사의 빅딜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네 한 여인의 고통과 통곡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준비하세요. 이걸 역사의 고래라 그럽니다. 심정이 통했다는 게 그거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 마음 알아버렸고 하나님은 내 마음 알아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나가 사무예를 내놓겠다는 기도를 한 겁니다. 그래서 머리에 싹돌을 대지 않겠다는 기도를 한 겁니까? 이렇게 얻은 아들을 통해서 이 총각을 고하던 이스라엘 땅의 어떻게 이스라엘이 부흥이 되고 어떻게 이스라엘이 재건이 됩니까? GDP 사만부를 통해서 4대강 사업을 통해서 아니에요. 달에서부터 부에 제마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가르쳐 지기 시작하니라 하나님 말씀만이 민족을 살리고 하나님 말씀만이 교회를 살립니다. 3년 동안 모든 걸 띄워내고 성경에 창념하는 여러 학우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대 하나의 가슴속에 품었던 인물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어낼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있어요. 아멘 우리 시간 다 같이 한번 기도하십시다. 반주 좀 해 주시고요. 우리 주요 주요 주요 3번 부른 다음에 1가지 기도 제목만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그때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왜 왕이 없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지만 단 한 번도 왕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 하나님은 오늘 그 한 사람을 여러 찾고 있습니다.
한나의 가슴속에 품었던 그 인물 3년 동안 모든 것을 털어내고 비워내고 다시 한번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 오염되고 타락한 조국의 교회 세계 선교를 책임질 한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가슴이 통하는 안악기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요주요 3번 부릅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에게 귀한 시간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끊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꼭 사랑하시는 일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하나님이 자비롭게 하여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