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이, 변함없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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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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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한결같이 여러분을 사랑해주는 대상이 있는가? 누군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학교 선생님 등등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전도사님은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가 있었다. 요크셔테리어라는 영국의 조그만한 강아지인데, 너무 귀엽다. 강아지 이름은 토토였는데, 항상 나를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겨주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줘서 항상 행복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에게 학원가기 싫다고 엉엉 울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 어린 아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내가 바닥에 머리를 쾅쾅 박고 울고 있었는데, 토토가 나에게 달려오더니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너 때문에 산다.”라고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토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시 할머니댁에서 맡겨져서 키웠는데, 어느 날 잠깐 바깥에 있었는데 개장수의 소리와 함께 토토는 사라지고 그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슬픈 일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던 것은 이 땅에 어떤 것도 위로되는 것은 다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강아지도, 어떤 사람도 죽으면 이 땅에서는 더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 하는 친구들이 있을 수 있다. “강아지도 푸바오와 같은 동물들도 죽으면 천국가나요?” 정답은 만날 수 없다. 내가 키웠던 토토도 천국에서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동물은 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 중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영이 있기에 죽고 난 후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에서 만날 수 있지만, 동물들은 죽으면 소멸하게 된다. 왜 그렇게 되냐고 묻지마라.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 모든 구원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 성경에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당했던 모든 슬픔들 아픔들을 천국에서 하나님이 위로해주실 것이다.
본론으로 넘어와서 우리는 정말 힘든 시기때 누구든지 위로받고 싶어한다. 위로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찾아가서 괜찮은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도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서도 위로를 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성적이 간당간당하게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는데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도 같은 대학에 지원했는데 떨어지면 위로가 되는 그런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게 되면 어떤 성경을 읽었는가? 히브리서를 함께 읽었다. 당시에 예수를 믿기만 해도 핍박이 너무나 심했던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이다. 그러한 힘듦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때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 누구인가? 당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여러 각 지역마다 교회를 세운 리더, 요즘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원로목사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시의 성도들은 교회를 세우신 원로목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현재 신앙을 지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힘듦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이전의 리더들이 어떻게 교회를 세웠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 리더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게 교회를 세웠던 리더들이 끝까지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으셨거나 또는 복음 때문에 로마군인의 칼에 순교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한 과거의 지도자들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신실함, 다른 말로는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당시 성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히브리서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행실의 결말은 그들이 복음을 위해 살아온 과정과 마지막 순간까지 어떠했는지 깊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한다. 본받으라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똑같이 복사 붙혀넣기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청출어람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마음인가? 그들보다 더 뛰어나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전에 교회를 세웠던 지도자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하나 같이 누구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어떻게 나의 사건이 될 수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와 약속을 하거나 계약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계약한 대상이 죽으면 계약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으면 나를 사랑했던 것이 지금의 현재진행형이 되지 않는다. 그 분이 이전에 나를 사랑하셨다고 과거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어떻게 되셨는가? 다시 사셔서 부활하셨다! 그 다음에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시고 난 후에 어떻게 되셨는가? 살아있는 다시 부활하신 그 몸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셔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 몸 그대로 다시 이 땅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성경 말씀을 통해 오랫동안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를 사랑하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사람에게 받았던 편지를 읽으면 어떤가? 그땐 나를 이렇게 사랑한다 말해주었다고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사람이 살아있어서 어딘가 멀리 살고 있다면 , 그 편지는 과거 뿐만 아니라 훗날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편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 무엇인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는 편지이다. 왜인가?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의 모든 사람에 마음에 여러분이나 나의 마음에 계신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보게 되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이 등장한다. 아마 당시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예수님이 완성하신 의가 곧 나의 의가 되기에 더 이상에 구약의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훈이라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전통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거짓된 교훈을 말하고 있다. 다른 교훈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게 하는 방법은 7절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주의 깊게 보고, 본받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저자는 은혜와 음식을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서 힘을 얻게 되는가? 음식을 섭취할 때 에너지가 생겨서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힘을 얻게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왜 몇몇 잘사는 부자들이나 연예인들은 무엇이 아쉬운 것이 있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돈도 많고, 명예롭고 인기도 많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전도사님은 중학생 때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잠잠히 생각을 해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집에 산다고 하더라도 누울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다. 맛있고 비싼 밥을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하더라도 먹는 양에 한계가 있다. 아무리 잘 사는 사람들도 어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햇빛, 자연 모든 만물들은 누구의 손으로 만든 작품인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있다.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 안에서 은혜를 누리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은혜는 우리가 어떠한 제사나 유대의 전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제사와 관련된 유대인들이 지켜야 하는 레위기 11장에 나타난 음식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동물을 통해 드렸던 제사와 제물이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가 달려 죽어야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그리스도가 제사의 제물이 되심으로 이루신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힘들고 고난이 찾아올 때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일본은 나름 조선을 존중을 한다고 하여서 일본 천왕에게 절하면서 교회를 다니면 핍박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도사님의 학교 선배님이신 주기철 목사님께서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일본의 압박에도 절하지 않으셨다. 일본은 어느 정도까지 제안을 했었냐면, 신사 앞에 지나갈 때 잠시 묵념하면서 지나가도 된다는 간단한 제안에도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한국의 기독교의 주류는 신사참배는 국가의 의식이기에 참여하자는 설교를 많이 했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세계의 열강이었던 일본제국이 무너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목사님들은 하나님께서 일본을 통하여 한국을 보호하신다고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시다가 온갖 고문을 당하시고 끝내 병원으로 급히 이송 중에 소천하시게 되었다.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시면서 주기철 목사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예수님 붙잡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특히 고3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세상에 많은 유혹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 넘어지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을 놓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넘어지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쓰러지기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예수 없으면 안되는 인생,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