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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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고린도전서 16:19-24
“마라나타”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2025. 3. 14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마라나타”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단락인데요. 바울이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인사를 할 때, 크게 세 종류의 공동체를 소개하면서 함께 인사를 하는데요. 첫번째는 아시아의 교회들이고, 두번째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가정교회이고, 세번째는 모든 형제들입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이 세 종류의 공동체가 각각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을 해요.
이처럼 편지 말미에 누구누구가 문안한다고 덧붙이는 이유는, 교회와 교회의 연합과 교제를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함께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함께 예배드리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지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하고도 교제를 해야 됩니다.
19절에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그랬어요. 아시아의 교회들.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가 아닙니다. 한국, 중국, 일본 이런 동양지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로마의 속주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오늘날로 보면 터키 서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이 지역에 교회가 많았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있었고, 또 골로새교회도 있었어요. 이 교회들을 대표해서 바울이 문안을 하는 겁니다. 이 교회들과 연합하여 교제하라는 거예요.
또 19절에 보면 두번째로 누가 문안을 해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문안을 하죠. 아굴라와 브리스가, 이 두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처음 만난 부붑니다. 이들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살았는데, 마침 바울도 그 일을 해서 선교비를 벌고 있었죠. 아마도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고린도에서 하려고 수소문하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를 만났을 겁니다. 그래서 함께 살면서 동업을 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이 고린도교회의 개척멤버가 돼요. 바울을 도와서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같이 떠났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서 바울과 같이 떠나서 에베소에 정착을 해요. 그래서 에베소에서 또 교회를 개척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집이 에베소교회의 초창기 예배처소였을 겁니다. 그 뒤에 에베소교회가 부흥성장을 해서 예배처소가 여러 곳으로 늘어났을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두 부부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계속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에베소교회가 문안을 한다고 하는 것이죠.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지금은 너희를 떠나 있지만, 이들이 여전히 너희를 잊지 않고 문안을 한다. 그러니 너희도 이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20절에 보면,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형제. 이 모든 형제는 현제 바울 곁에 있는 동역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지금 큰 단위에서 점점 작은 단위로 좁혀가고 있거든요. 아시아의 교회들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에베소교회, 그 다음에는 현재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을 돕고 있는 동역자들. 이처럼 큰 공동체에서 작은 공동체로 줄여가면서 문안인사를 하고 있어요. 이는 공식적인 인사에서 점차 개인적인 인사로 흘러가면서 더욱 친근함을 느끼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20절 끝에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입맞춤은 친한 사이의 사람들끼리 나누는 인사였습니다. 지금 교회와 교회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입맞춤을 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랬어요. 이 말은 그만큼 친근하게 서로 인사하고 교제하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적으로 가깝게 지내라는 말이에요.
자, 그러면서 밑에 21절에 가서 보면, 마지막으로 바울이 문안을 하죠. 21절에 보니까,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여기서부터가 바울이 직접 손으로 쓴 내용입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 네 구절만 바울이 직접 썼고, 고린도전서 1장 1절부터 16장 20절까지는 바울이 쓴 게 아니에요. 바울은 입으로 편지 내용을 읊어주면, 옆에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쓴 겁니다. 그러니까 편지 내용은 바울의 편지가 맞아요. 다만 글씨를 다른 사람이 대신 썼다는 겁니다.
왜 바울이 직접 글씨를 안 쓰고 다른 사람이 대신 썼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의 건강 때문이었어요. 아마도 바울의 시력이 많이 안 좋았을 겁니다. 글씨를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눈이 잘 안 보였을 거예요.
성경에 바울의 시력에 대한 언급들이 몇 차례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23장 5절을 보면,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는 바울이 시력 때문에 큰 글자로 썼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시력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대필자가 바울 옆에서 대신 써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그 편지의 대필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데요. 로마서의 경우에는 더디오가 대필자였어요.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더디오가 로마서를 받아서 쓰다가 자기 이름을 집어넣었는데요. 로마서 16장 22절에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 더디오가 이 편지를 기록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바울이 시력이 안 좋기 때문에 더디오가 로마서를 대신 써준 거예요. 마찬가지로 다른 편지들도 다 대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는 누가 대신 썼을까요? 고린도전서의 대필자는 누구였을까?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내가 썼다고 편지에 썼지만, 고린도전서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을 보면, 인삿말에 소스데네라는 이름이 들어가거든요. 1장 1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이렇게 바울과 소스데네가 편지 첫머리에 인사를 해요. 그래서 아마도 소스데네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합니다.
어쨌거나 이처럼 바울의 편지들은 대필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직접 손으로 글씨를 써요. 오늘 본문 21절부터 24절까지 바울이 직접 쓴 겁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낼 때 꼭 마지막 부분은 자기가 직접 썼어요.
직접 쓰는 이유는 이 편지가 내 편지가 맞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섭니다. 가짜 편지가 유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직접 바울이 쓴 거예요. 일종의 사인을 하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2절에 보면, 사도들이 썼다고 하면서 속이는 편지들이 있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2천 년 전에 이미 보이스피싱이 있었던 거예요. 이거 바울이 쓴 편집니다. 베드로가 쓴 편집니다. 이러면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헌금을 뜯어내는 그런 편지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바울이 마지막에 자필로 글씨를 쓰는 겁니다. 이게 있으면 진짜, 없으면 가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썼어요.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내 편지가 맞다는 표시로서 마지막에는 꼭 바울이 친필로 썼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인사를 함과 동시에 내가 쓴 편지가 맞다는 표시로 직접 자기가 손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큰 공동체에서 작은 공동체로, 아시아의 교회들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에베소교회로, 그 다음에 바울 옆에 있는 동역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점점 개인적이고 사적인 순으로 문안인사를 하고 있어요.
자, 마지막으로 바울이 뭐라고 인사를 합니까? 2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아멘.
바울의 마지막 인사에 저주가 들어가요. 보통 마지막 인사에는 좋은 말만 하거든요. 바울이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마지막에는 꼭 축복의 말로 편지를 끝내요. 그런데 고린도전서만 마지막에 저주를 선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말이에요. 저주가 헬라어로 “아나데마” 라는 말인데요. 아나데마는 본래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는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나데마가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희생제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죽여서 몸에 각을 뜨고 불로 태우는 희생제물과 같이 끔찍한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아나데맙니다.
바울은 마지막 인삿말에 이 아나데마를 선포하고 있어요. 이는 그만큼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마지막 인삿말에서까지 경고메세지를 전해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을 뒤에 덧붙였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은 헬라어가 아니에요. 아람업니다. 아람어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아람어를 사용하셨어요. ‘달리다굼, 에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런 말들이 다 아람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도 본래는 아람어예요. 아람어로 ‘마라나타’ 라는 말입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 라는 찬양도 있죠. 마라나타는 ‘마라나’ 라는 말과 ‘타’ 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마라나, 타. 마라나는 ‘주님’이라는 말이고. 타는 ‘오십시오’ 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마라나타는 ‘주님 오십시오’ 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한글 성경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고 번역을 했어요. 번역을 잘했죠.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울이 마지막 인삿말에 넣었단 말이죠.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는 마라나타를 성도들끼리 인삿말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사 할 때 ‘할렐루야’ 하는 것처럼, 고린도교회에서는 ‘마라나타’ 하고 서로 인사를 했던 것 같아요.
마라나타는 다른 편지에는 없어요. 고린도전서에만 딱 한 번 나옵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가면 요한계시록 22장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또 한 번 나오긴 하는데요. 이 말은 아람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아람어를 잘 모르니까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바꿔서 쓴 것 같아요.
이는 고린도교회만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교회들도 재림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라나타를 아람어 그대로 사용했어요.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아람어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한 게 아닙니다. 교인들이 다른 말은 몰라도 마라나타라는 말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한 거예요.
우리가 히브리어를 잘 몰라도 “할렐루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고린도교인들이 마라나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겁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신앙,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교회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나타’ 라고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오셔요. 그것을 바울이 믿었고, 바울 곁에 있는 동역자들이 믿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믿었고, 아시아의 교회들이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마라나타, 우리 이 말로 서로 같이 인사해 볼까요? 마라나타! 아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복된 하루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