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 부르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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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2장 1-12절
제목: 친구라 부르시는 이유
주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서론]
대학시절 저는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었습니다.
아마 저랑 함께 신앙생활했던 사람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일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신앙 좋다고 말하는 다섯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을 충족했습니다.
새벽예배를 3년 개근했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일성수하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도 신앙이 참 좋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 복 안주시면 누구를 복주실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 신앙이 빚좋은 개살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4학년 2학기때 어떤 과목 발표를 맡게 되었는데 거의 인터넷을 베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학점을 D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학기라서 교수님이 봐줄거라 생각하고 제 양심을 속인 것입니다.
드러날지 몰랐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
제 신앙의 민낯이 드러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큰 은행 면접을 치려고 이미 취업한 회사에 거짓말하고 첫 출근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종합격한 회사에서 짤리고, 은행 면접에서도 떨어졌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신앙은 유혹과 위기 앞에서 너무나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줄 깨달았습니다.
제가 자신만만해 하던 신앙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유혹과 위기를 신앙의 힘으로 넘어갈수 있을까요?
[본론1]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갈수록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대와 저항은 극심해져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십니다.
앞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나열하시면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동네에 퍼져 수천명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 서로 밟힐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경고하십니다.
왜 하필 이때일까요?
제자들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인 것을 보며 마음이 엄청 높아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며 스스로 바리새인들과 다르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제자들을 보시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이란 어떤 위선일까요?
그 단서가 누룩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누룩은 빵에 넣는 곰팡이입니다.
이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만듭니다.
그만큼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입니다.
제자들이 빠질수 있는 위선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한 타협으로 시작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신앙 전체가 변질되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이게 위선인지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 치명적인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나게 됩니다.
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위선은 가리고, 숨기려 해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밀히 숨기려해도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 케이스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저는 다급한 순간 제 신앙 양심을 속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여겼기에 스스로 합리화하며 위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목회자들도 이런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전에 제 여동생이 대한항공에서 티켓팅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제 여동생이 가장 진상 승객이 누군지 알려줬는데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까다롭고 우기기를 잘하는지 말로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가 충격을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과 함께 마트를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마트에서 일하는 분에게 얼마나 불친절하게 대하는지 너무 놀랐습니다.
작은 일인데 그 분에게 화를 내며 나무랐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누구보다 친절하고 잘 웃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목회자들이 매주 무슨 설교를 할까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낮아져야 한다고 설교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들도 이런데 하물며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도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 충격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충성하시는 분인데 자기 사업장에서는 아주 못된 사장이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욕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는 악덕 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얼마나 밝고, 겸손한 분인지 아십니까?
제가 도저히 믿을수가 없어 여러 사람들에게 확인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위선은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들어와 내 인격을 점차 변화시키고 맙니다.
위선의 치명적인 위험성은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위선적인 모습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두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본론2]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육신을 죽일수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후 지옥에 던질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신앙적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정말 어렵습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눈 앞에 이익과 손해를 가르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의식하며 신앙의 위선에서 벗어날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옥갈까봐 무서워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게 아닙니다.
위선자 되면 지옥간다고 협박하시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신뢰입니다.
6-7절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참새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싸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바로 참새구이였습니다.
그래서 참새 다섯마리에 두 냥에 팔렸던 것 같습니다.
두 냥이면, 한 데나리온의 십육분의 일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이니까 대충 16만원으로 계산할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으로 따지자면 참새 다섯 마리에 이만원정도 하는 돈입니다.
참새 다섯마리에 이만원정도니까 한 마리에 약 사천원입니다.
우리가 먹는 그 흔한 김밥정도의 가격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참새 두마리가 한 냥에 팔린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두냥이면 참새 네마리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여기는 다섯마리니까 한마리는 덤으로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덤으로 준 작은 참새 한마리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귀한 우리들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도 다 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작은 부분까지 다 알고 계시는 지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털이 얼마인지 알까요?
머리카락이 워낙 많아서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많아서 하나 정도는 그냥 버려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물론 대머리분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그 머리카락 하나도 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시고 적절하게 채워주시는 분 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 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4절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특별히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여기 밖에 나오지 않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친구가 누구인가요?
진짜 친구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겪을 고난을 알고 계셔서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고난받을 제자들을 예수님의 동역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친구이기에 믿고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육체적 고난과 고통을 겪더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참새 한마리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이 제자들을 먹여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거 없으면 죽을거 같다고 말합니다.
내 삶에서 제일 귀하게 여기던게 사라지면 죽을 것같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사람 앞에서 두려워 신앙의 원칙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실한 친구이십니다.
[본론3]
두번째 방법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인한다고 하십니다.
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을 중요할까요?
믿음은 반드시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이 곧 위선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행동과 고백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고난 앞에서 그 진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회당과 통치자, 권력자 앞에 끌려갈때 주님을 시인하라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손해와 고통을 줄수 있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목숨을 바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문제는 단지 입으로 고백하는 게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한다고 얼마나 큰 손해를 보거나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삶에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입만 나불대고 삶에서는 믿음을 볼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시인하는 믿음은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도 드러나야 합니다.
과연 내 삶에서 나의 믿음은 무엇으로 증명할수 있을까요?
아무런 고난이 없어도 우리의 믿음이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고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까요?
우리는 작은 것부터 주님을 시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주님때문에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배드리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주님을 시인하는 일은 그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를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주님을 시인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우리 삶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게 그리 쉽다면 한국교회가 이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장 다닐때 부장님 앞에서 식기도를 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부장님한테 불편한 마음을 드릴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삶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까지 예수님은 친절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군가에게 신앙때문에 끌려갔을 때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까에 대해 성령을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고난과 핍박이 심했기 때문에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는게 너무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서면 성령께서 우리가 담대하게 지혜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눈 앞에 이익과 손해가 보이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수석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부인해도 다시 회개한다면 용서받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모독할때 그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묵상하며 하나님말씀의 통치를 받는 것도 모두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 세상에서 믿음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까짓거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 말입니다.
뭔가 중요한 결단을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음대로 살아가다가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기독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겨내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사탄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심판이자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를 두려워하는 종교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은밀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