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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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 이단이 참 많습니다. 국제종교 문제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현대종교라는 월간지를 보니까 한국 개신교의 약 8%가 이단이라고 합니다. 숫자로 하면 31만명에서 59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오성혜 집사님 회사가 한국에도 있고, 베트남에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생산단지라고 합니다. 회사 홍보를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해서 시찰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나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초청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찰에 참여한 분 가운데 하나가 베트남에 있는 로렉스 짝퉁 가게를 반드시 들려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데리고 갔더니 그곳에서 로렉스 짝퉁 시계를 100만원에 구매를 하더랍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짝퉁 시계를 100만원이 주고 사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짝퉁 시계에도 급이 있다고 합니다. 비싸면 비쌀수록 짝퉁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짝퉁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짝퉁은 아무 제품이나 막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명품이 있기 때문에 짝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명품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에 이단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한국 교회를 통해서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비한 체험들을 이용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 잘 분별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매우 잘 아는 변화산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인 눅 9:28~2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다가 한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라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무엇을 놓고 기도하다가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나셨을까?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문맥을 따라가다가 보면 예수님께서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변화산의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눅9장 말씀을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기 전에 먼저 두가지의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눅 9:17절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눅 9:18절 말씀인데 어떤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옛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동안 한 번도 가르치시지 않았던 말씀을 처음으로 하십니다. 그 말씀이 눅 9:22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지셔야 할 십자가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 16:21절 말씀에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오병이어 사건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는 역사를 행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메시지가 갑자기 바뀝니다. 어떻게 바뀝니까? 사실은 내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방금 함께 봉독한 말씀을 보니까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명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이날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셨는데 어떤 기도를 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 기도를 하셨겠지만 우리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마도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인 눅 9:30~31절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주제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신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였습니까? 방금 함께 읽었던 31절 말씀을 보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마도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보니까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통 변화산 사건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변화산에서 실제로 변화된 것이 있고, 변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변화되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그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옷이 광채가 나더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변화는 경험했지만 변화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주님이 용모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기도하는 내가 변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나를 바꾸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뜻이 있고, 내 계획이 있는데 하나님 나 좀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거 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도 응답을 해 주시지만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게 되면 때로 전혀 다른 방식의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사랑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꼽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유혹을 가져다주는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품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갑자기 제 기도를 바꾸셨습니다. 하나님 참사랑 교회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져도 괜챦습니다. 하나님 참사랑 교회가 지금보다 더 어려워져도 괜챦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게 하나만 허락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하나가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을 허락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처음에 기도할 때는 도망가고 싶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제 기도의 마무리는 아주 엉뚱하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풍랑이 사라지는 은혜를 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상황이나 환경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품어지니까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은혜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환경이나 상황이 어느날 갑자기 바뀌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면 옆사람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 인간 좀 바꿔주시라고 기도하는데 잘 안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도한다고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바뀌는 것입니까? 내가 바뀝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나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전보다 더욱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바꾸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나를 바꾸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다가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모습이 눅 9:32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주님은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셔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서 광채가 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놀라운 상황 가운데 제자들은 깊이 졸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예수님은 깊이 기도하고 있었고 제자들은 깊이 졸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냥 조는 정도가 아니라 자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역을 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도 시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영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지만 또 누군가에게 그 기도 시간은 졸려 죽겠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 시간만 그렇겠습니까? 예배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 은혜가 되어서 밑줄을 긋고, 꿀송이처럼 단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데 누구는 성경책은 부작용 없는 수면제랍니다. 저녁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읽으면 직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똑같은 장소에서 주님은 기도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같은 반에 잠신이라고 불리우는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친구는 수업시간에 자는 것인지 깨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잠을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고 잔다고 합니다. 수없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동을 하지 않고 가만이 앉아 있으면 자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눈을 뜨고 잔 것이 걸려서 그 학교의 전설의 사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여름에 선생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이 잠신이라고 불리우는 친구의 짝궁이 조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잠을 잤던 모양입니다. 이 때 잠신이라 불리우는 친구도 실상은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눈을 뜨고 자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데 짝궁은 누가 봐도 다 아는 것입니다. 선생님 수업을 하다가 몇 번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졸았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계속 뭐라고 하니까 졸다가 짜증이 났는지 선생님을 째려보았던 모양입니다. 열을 받은 선생님이 너 이 자식 이리 나와~ 뺨을 때렸습니다. 그런데 잘못 맞아서 코피가 터진 것입니다. 선생님이 당황해 가지고 화장실 갔다가 오라고, 그 친구가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휴지로 코를 막고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눈을 뜨고 졸고 있던 잠신이 바로 그 때 정신이 돌아온 것입니다. 옆에 짝꿍이 코피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이 친구가 손을 번쩍 들더니 한다는 말이 선생님이 제 짝궁이 코피가 나는데요?라고 하더랍니다. 그순간 교실에 적막이 흘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졸면 곤란합니다.
여하튼 오늘 말씀 가운데 나오는 제자들도 정신없이 졸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이 이렇게 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가막힌 사건입니다. 졸다가도 은혜의 시간에 깨기만 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성경을 읽다가 보면 자리에 중요성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그 자리에 있었던 120명이 다 성령 받았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500명 형제에게 하셨는데 380명은 그 말씀 듣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은 다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졸더라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졸더라고 끝까지 졸면 안되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깊이 졸다가 은혜의 시간이 되었을 때 깨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제 자다가 깰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그 모습이 오늘 본문 말씀인 눅 9:33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오늘 말씀 가운데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베드로가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어서 광채를 내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가 지금 초막을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를 위한 초막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사실이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내 것을 먼저 챙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윤정자매 결혼식 주례를 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윤정 자매 집에 심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 때 윤정 자매가 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누구 사진을 가장 먼저 보았겠습니까? 신랑 신부 사진이 잘 나왔나를 보았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만만의 말씀입니다. 내 얼굴이 어떻게 나왔나?를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아이들 돌사진을 찍을 때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아이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안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사진 셀렉합니까? 노입니다. 먼저 내 사진이 잘 나와야 합니다.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잘나와야 합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인 귀여운 모습입니다. 사역자들이 모이면 교회에 힘든 이야기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몇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화두는 당회이야기입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의 갈등. 정말로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화두가 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식당 봉사입니다. 집에서도 밥을 잘 해먹지 않고 사먹으려고 하는데 교회와서 식당 봉사를 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난리입니다. 식당 봉사자를 세우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은 음식을 누가 가지고 가냐? 하는 문제 때문에 시험에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적당히 가져가면 좋은데 이게 안되나 봅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겨야합니다.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교회가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내 필요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편한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나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출 36:5~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십니다. 무엇으로 성막을 짓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져 나온 것을 가지고 성막을 짓습니다. 그런데 방금 함께 봉독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쓰고도 남을 정도가 되어서 이제 그만 바치라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인간적인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는 상황입니까? 광야입니다. 광야는 사람 이 살기가 어려운 장소입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의식주의 모든 것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아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성막을 짓는다고 하니까 자신이 자기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내놓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눅 9:35~3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신비한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경험하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한순간에 신비한 체험은 사라져버리고 오직 예수만 보이게 되었는데 그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추구해야할 신앙의 요소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신비한 체험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귀신이 들려도 신비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무당이 굿할 때 날카로운 칼 위에서 뛰지 않습니까? 신비한 현상입니다. 신비한 현상을 쫓아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다니시는 신길 교회에서 알파라는 말씀 훈련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알파 코스에 참여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조그만 부흥회 형식의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훈련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인데 갑자기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전도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허락을 받고 집회에만 참여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아말감으로 이한 사람들 나오라고 해서 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아말감 이가 백금으로 변했습니다. 어머니가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금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신비한 현상입니다. 그 때 당시에 한국교회에 알파 코스 붐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금니로 변화되는 역사가 막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말감이 금니로 변화되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아말감이 금니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현상을 추구하고,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순간 예수님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아주 강하게 예수님을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신비한 체험을 했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여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초막셋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변화산에서 변화된 분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언제 변화됩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는 것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신비한 체험이 저와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가운데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신비한 체험을 추구할 때 오직 예수님이 보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오직 예수만 보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시는 삶이 되셔서 변화되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누리는 복된 신앙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내주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며 믿음의 삶을 살다가가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원하는 참사랑 교회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와 그 가정 머리 머리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제목 :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본문 : 눅 9:28~36
1. 눅 9:28~29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3.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4. 눅 9:30~31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5.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6.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7. 출 36:5~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8. 눅 9:35~36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