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우리가 믿는 것의 기초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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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믿는 것의 기초 10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사도신경의 개요를 따라 살펴보았죠.
오늘은 교회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에 관한 많은 성경구절이 있죠. 그래서 오늘 본문이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 하나 제가 오늘 나누고자 교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교회는 나와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심지어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상관하지 않죠. 각자의 길을 가면 되는 겁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 상대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연합하여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변화시켜서 교회 안에 평소에는 전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죠.
더 나아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혐오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죠. 그러한 면에서 오늘날 주제는 중요하다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3가지입니다.
첫번째, 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두번째, 복음은 우리의 마음의 벽을 무너트린다.
세번째,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거 같은데요.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교회의 모습을 각자 회복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옆사람 보며 축복하며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이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로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1. 복음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1. 복음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첫번째, 복음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복음이 만드는 새로운 공동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교회를 말하면서 3가지 비유를 듭니다. 시민, 권속, 성전인데요. 먼저 19절을 보겠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시민
시민
먼저 바울은 교회를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죠.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시민권을 가졌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들은 또 다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빌립보서 3장 2절은 말합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은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자라고 말합니다.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이죠.
권속
권속
두번째, 바울은 하나님의 권속이다라고 말합니다. 권속은 가족을 말하는건데요.
여러분, 교회 오니깐, 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걸까요?
우리가 지난번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입양이 된다고 말했죠.
이 사실은 엄청난 사실인데, 입양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의 왕, 상사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로 한 가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은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건물)
성전(건물)
세번째 성전입니다. 21절인데요.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바울은 교회가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한 건물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살아있는 건물과 같은 것이죠.
구약에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셨던 것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겁니다.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것이죠.
자, 이제 이 세가지 비유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서서히 긴밀해지는 것으로 보여주죠.
왕과 백성은 같은 나라에 살지만, 아버지와 자녀는 같은 집에서 살죠.
그리고, 22절에서 말합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 올라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가까이 사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사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시켜 줍니다.
교회 안의 관계가 육신의 가족보다 더 친밀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이유에서입니다.
여러분, 아마 대부분 레고 해보셨을 갑니다. 저는 함께 지어져 올라간다라는 구절을 보며 이 레고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레고가 되어 함께 지어져 올라가는 거죠. 그렇기 서로를 의지해야 하고, 서로룰 붙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강렬한 유대감을 보여주는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관계적으로 친밀하다라는 것이죠.
더디사이플 공동체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와닿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잘 모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공통된 분모가 없기 때문에 만날래야 만날 수도 없는 자들이었죠.
하지만, 지난 3년간 우리는 서로 가족이 되었죠.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마치 형제 자매가 된 것처럼 지냅니다. 이제는 주일에 한번 만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주중에도 계속 만나려고 하죠.
가족들보다 더 자주 만납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강렬하게 묶어준 것일까요?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령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고, 한 성령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들과도 연합됩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요.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엠비티아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교육수준, 소득수준, 문화적으로 다르더라도 한 성령 안에서 한 가족으로 깊은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해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시민으로, 가족으로 성전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서로 그러한 관계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예를 들어 우리가 가족이라면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까지 아는 공동체여야겠죠.
그리고, 내가 스스로 연약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숨기고 있다면, 가족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해줄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서로 권면하라고 말하고 있죠. 권면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강한 단어인데요.
헬라어로 “파라클레오”인데, 조언하고, 논쟁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권면을 매일해서 죄에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해라고 말합니다.
좀 심한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기만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숨기려 하죠. 빛 가운데 드러내려 하지 않고, 어둠 속 나만이 아닌 상자 속에 넣어 꼭꼭 숨김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부인하죠.
하지만,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에 결점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 수 없는 죄들도 말해주죠.
가족이기 때문에 나의 결점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알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보다 가족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제가 자유로운 보헤미안과 같은 사람으로 압니다. 강력한 피. 아무런 계획도 짜지 않는 사람인줄 알죠.
하지만, 저의 아내는 압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하고, 같 같이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다들 못믿는 표정인데)
왜냐하면, 아내는 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요. 친밀하면 친밀해질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서로의 결점은 잘 보입니다.
우리는 함께 예배하고 목장모임 하고, 아웃팅하고, 엠티도 하고, 함께 맛집도 가고, 금철도 같이 드리고, 함께 몸된 교회를 섬깁니다. 가족과 같이 친밀하죠?
이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진짜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아름답고 낭만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서로의 결점을 더 잘 볼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렇죠?
SNS에서는 얼마든지 서로를 속일 수 있죠.
외모도 필터 잔뜩 넣어서 얼마든지 멋지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떻죠? 안타깝게도 필터없이 서로를 봅니다. 와우!! 여러분, 축복합니다. 우리는 서로영혼의 쌩얼을 보여주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냅다 권면만 해서는 안되겠죠. 나도 상대방의 권면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전으로서 서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권면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복음은 우리의 마음의 벽을 무너트린다
2. 복음은 우리의 마음의 벽을 무너트린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어떻게 이런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요?
공통분모가 없는데도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되지 못하게 만드는 벽이 있습니다. 14절과 16절이 이 벽에 대해 말합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 안에 원수된 있다. “원수된 것”은 중오와 적대감을 뜻하는 단어인데요. 이것이 우리를 하나되지 못하게 만드는 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십자가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나와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적대감은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갈등을 말했는데요.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1절. “너희가 본래 이방인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너희들을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12절.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고,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흥미롭게도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적대감의 벽이 생긴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어요.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율법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율법이 좋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율법인데, 그것이 어떻게 나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율법이 적대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온 세상에 사랑과 정의와 거룩함이 넘치는 사회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라고 생각기를 원했던 것이죠. 이게 바로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을 가지고 서로 판단하기 시작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보니깐, 이방인들은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고, 여러 제사법을 지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속되다고 여기고,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있어서 율법은요. 너무나 위대한 것이었고, 그들의 자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로 인해 인해 교만해지게 된 겁니다.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을 보며 나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깐, 이방인들편에서도요. 그렇게 거만을 떠는 유대인들이 좋을리가 없죠. 서로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벽이 생기게 됩니다. 적대감의 벽, 분열의 벽.
그렇다면 이 원리를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적용해 보겠습니다.
자, 보세요.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자랑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율법은 좋은 겁니다. 자랑스러운 원칙이죠.
우리 안에도 이러한 원칙이 있습니다. 나의 자랑과 기쁨이 되는 원칙.
문제는 이게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죄 많은 인간의 마음은요. 나의 좋은 것들을 대해서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멸시함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세워갑니다.
이것에 대해서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긴 것을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_ C.S.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여러분의 직업, 여러분의 학력, 여러분의 경력을 근거로 내 자존감을 세운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뛰어난 기타리스트라고 칩시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연주를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뛰어난 기타 연주자라는 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이고, 여러분의 자랑, 여러분의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뉴욕으로 이사간거에요. 근데, 거기 가니깐, 길거리에서 버스킹하는 기타 연주자가 나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한국에서 연주하면, 사람들이 박수쳐 주었는데, 미국에서는 연주해도 너무나 평범한 겁니다.
자, 이제 어떠한 일이 납니까? 여러분의 자존감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래요. 우리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우월하다라는 것을 통해 내 정체성을 세우려고 합니다.
“나는 너보다 더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어. 나는 명문대 출신이야. 나 특전사 출신이야”
나의 자랑과 기쁨이 남을 멸시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J들은 P들을 보면서 대책없는 사람으로 보지만,
P들은 J들을 보고 유연성 없는 답답한 사람으로 봅니다.
최악은 이러한 다름을 틀린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도덕적인 가치까지 부여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그룹에서는 P들은 죄인과 놀림거리가 되고, 또 어떤 그룹에서는 J들이 죄인과 놀림거리가 됩니다.
P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거라며 은근히 우월감을 가지고, J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거라며 우월감을 가집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적대감과 분열의 벽을 세우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날이 갈수록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죠.
진보와 보수는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진보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고, 얼마든지 보수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를 경멸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적 입장이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치적 입장이 나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나에게 자랑이고, 나의 모든 것의 가치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적이 되겠죠. 멸시해야 하고, 더 심하면 악마화하기까지 하죠.
내가 저들보다 낫다라는 우월감을 통해 내 정체성을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뭐든 맡기면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상으로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합니다. 너무나 귀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면요.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짜증이 납니다. 설렁설렁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어요. 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팀 분위기가 좋아지고, 페이스 조절이 되는건데, 일을 못한다라는 단점만 보고, 경멸합니다.
배짱이를 보며 못마땅해하는 개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 좋은 것을 가지고 적대감의 벽, 증오의 벽을 세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답이 있지 않죠. 복음이 그 해결책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적대적인 벽을 허무는데요.
구체적으로 두가지 벽을 무너트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복음은 교만의 벽을 무너트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믿음도 없었고, 율법도 예배도 없었습니다. 부도덕한 삶을 살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인 것이죠.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이방인들보다 가까웠겠죠. 이들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표현이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셨다라고 말하면서 17절에서 말합니다.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여기서 평안은 복음을 말하는데요. 먼데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자들,
바울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 적대 가운데 있는 자들, 원수된 자들에게 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전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전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복음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멀리있는 부도덕한 자들 뿐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도덕적인 사람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라는 것이죠.
둘 다 하나님 앞에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믿음 없는 자들은
돈이나 직업, 자신의 성취나 업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 합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 노력했고, 이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증명하는 삶을 사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내가 노력해서 세운 정체성은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이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립니다.
왜냐하면, 우선 내 자신이 무엇을 해도 완벽하지 않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죠.
그리고, 얼마나 내가 노력해야 그 일을 이룰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항상 불안하죠.
그래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남과 비교해서 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죠. 나보다 뒤쳐저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우월감을 가지며 안정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도 똑같은 일을 합니다.
종교인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고, 내가 성경을 알고,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딱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바리새인은 세리와 비교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은 성경을 알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휼륭한데, 하나님을 나를 축복하셔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구원자인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실제로는 멀리 있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과 다르지 않아요.
유대인들도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오는 우월감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신 매우 종교적인 언어로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가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에 다니는 우리같은 사람들인데, 여러분들은 이런 기도를 하고 있지 않나요?
만약 그러하면, 여러분이 도덕적인 사람들일지 모르나, 부도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우월하게 여기는 선함과 도덕적인 삶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적대의 벽과 증오의 벽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교만의 벽을 무너트립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너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똑같은 죄인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나 교회 밖에 있는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복음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내 저들보다 낫다고 손가락질 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얍잡아 볼 권리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의 이 교만의 벽을 무너트려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와 동시에 복음은 두번째로 우리 안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 간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소멸하다의 원어 의미는 “죽이다”인데요. 서로 간의 적대감을 십자가에서 죽였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있는듯 없는듯 반주 시작]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가 되신 겁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달리신 거죠. 예수님이 원수가 되신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될 마땅한 판단이에요. 우리는 죄인이고, 원수된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신 겁니다. 죄인으로써, 원수로써,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시죠.
우리가 매달려야 할 자리, 우리가 심판받아야 자리에 예수님이 달리신 겁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입혀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죄가 되셨고, 원수가 되심으로 모든 댓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실 때, 예수님을 대하는 것 같이 대하신다라는 것이죠.
죄인이 아닌 의로운 자로, 원수가 아닌 사랑받는 자로 대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덧입혀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
이전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증명하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증명은 끝도 없는 완성도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증명이죠. 나보다 못한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세워가죠.
하지만,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한없이 쭈그러들고, 질투를 느끼죠. 내 삶에서 그 사람을 지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줍니다.
이 정체성은 “나로 인함이 주가 행하신 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시킨 정체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선물로, 은혜로 주어진 정체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어떠함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앞에 내가 죄인이기에 나를 겸손하게 만들죠. 함부러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기타를 잘 연주하지만, 그것이 나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에, 기타 연주는 단지 나의 즐거움일 뿐입니다. 그것에 의해 내가 좌지우지 되지 않죠.
나는 착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이라면,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티 내지는 않겠지만, 내적으로 손절하겠죠. 그들을 향한 멸시와 증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하겠죠.
하지만, 어느날 나보다 더 휼륭한 누군가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를 따른다면, 여러분은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면,
겸손한 동시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죠. 그 누구도 함부로 내려다보며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이전에 상관 하고 싶지 않았던 집단, 증오하고, 멸시했던 집단을 보며 가졌던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암세포와 같은 우월감과 적대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모여
서로 다른 조각의 레고가 되어 한 성전으로 지어져 올라가는 곳입니다.
나와 다른 이들은 이제 나의 멸시의 대상, 나의 적이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한 또 하나의 조각인 것입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함께 협력하여 지어져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레고를 사서 뜯었는데, 똑같은 조각들만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이런 레고로는 지어져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서로 달라야 우리는 지어져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지어져 올라가고 있나요? 아니면 조각, 조각 파편화되어가고 있나요?
똑같은 조각끼리 모여서 무엇을 하려고요? 같은 조각끼리는 절대 지어져 올라가지 못합니다.
나와는 다른 조각을 찾아 그들과 친구가 되세요.
그렇게 서로 모여 함께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서로 다른 둘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될 때, 주님의 교회는 지어져 올라갑니다.
서로 다른 성격, 다른 정치적 성향,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주님의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올라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줄로 믿습니다.
찬양
찬양
1절)우리는 주의 교회 빛으로 우릴 부르셨네
우리는 주의 교회 주의 핏값으로 세워졌네
그 사랑 입은 우리 주 위해 살기 원하네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 그 크신 사랑 찬양해
프코)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 예배하리
내게 맡겨주신 그 곳에서 주 나타내기 원해
후렴)나의 삶을 드리네 존귀하신 주 찬양해
하나되어 주를 높이네 영광 받으소서
2절)변하지 않는 약속 우리를 인도하시네
어둠의 권세 무너지고 교회는 승리했네
후렴)나의 삶을 드리네 존귀하신 주 찬양해
하나되어 주를 높이네 영광 받으소서 (X2)
브릿지)어린양 예수 찬양하리 승리하신 주만 높이리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영원히 다스리시네 (X2)
기도제목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됨으로 주님만을 높이는 주의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분열의 벽으로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있는 세상 가운데 나아가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과 같이 화평케 하는 자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복음만이 분열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하나되게 하는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되게 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기도
봉헌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성령꼐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연약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몰라 탄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죄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감사함으로 회개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 인생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목장모임을 위해서
이 시간 하나님이 내 삶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예물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을 담은 이 헌금을 통해 이 헌신을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올라가기를 원하는
이곳에 모인 청년들에게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