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다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6 views
Notes
Transcript
Handout
오늘 이 저녁 함께 은혜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2-20절입니다. 화면을 참고하시어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20 NKRV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임마누엘 찬양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시리즈 세번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기성세대들은요.  개인보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세대들입니다.내가 원하는 꿈, 자아성취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세대들이 기성 세대입니다.
꿈이 있지만 생계를 위해 꿈을 포기하기도 하죠. 생계를 위해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아 살아갔던 세대들이 기성 세대들입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어떠할까요?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특징은 분명합니다.
공동체적인 의무보다는 자신들의 꿈과 자아성취, 행복이 굉장히 중요한 세대들입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익숙한 세대인 것이죠.
요즘 엠지세대다 뭐다 그러는데, 제가 청년 사역을 하다 보니 젊은이들은 확실히 집단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그렇죠. 이전에서 가족이나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었지만, 오늘날의 문화는 공동체를 위한 의무보다는, 개인적은 욕구나 바램을 채우는데 의미를 둡니다.
문제는 지나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흘러가게 되고, 개인의 권리만 강조하면서, 어떠한 희생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경향은 교회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공동체를 위한 헌신자가 아닌 누리려고만 하는 소비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다 보니깐, 제약들을 싫어하게 되고, 특히 의무적인 모임들을 싫어하죠. 공동체보다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가 청년들 대상으로 하는 설교라면,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건강한 공동체 관계 가운데로 들어가라, 소비자가 되지 말고 헌신자가 되라’고 설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기성세대이고, 이미 공동체성이 강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달리해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일까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주의가 건강하지 않다라는 전제하에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면에서는요.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적인 의무를 잘못된 방식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면요. 개인의 존엄성과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고, 그것이 억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나치즘 같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 집단만큼 하나됨을 강조한 집단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외친 하나됨은 개인의 개성과 가치를 무시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을 꾸겨 넣어버리는 하나됨이었습니다. 결국 이 하나됨은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획일성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의 개인을 기억하고,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건강한 개인주의는 필요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첫 시간에 제가 하나됨을 이야기하면서
자칫 인간적인 구호를 가지고 하나됨을 말할 수 있는데, 이런 하나됨은 오히려 공동체를 더욱 더 분열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구호와 영적인 단어라 하더라도, 인간의 야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너무나 역설적이지만, 하나됨이라는 기준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나됨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각자의 생각과 경험, 하나됨의 기준을 잠시 좀 내려놓고요.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됨은 무엇일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으로써의 하나됨이 우리 안에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 : 다양성과 연합

첫번째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 다양성입니다.
다양한데,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모두가 똑같아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 공동체의 하나됨은요. 모두가 똑같아 짐으로 하나가 되는 획일성의 하나됨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다르고, 개개인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하나됨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말을 하죠.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은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가 되는 연합을 말합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몸의 비유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 NKRV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자, “몸은 하나인데” 하나됨의 공동체성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지체가 있고”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을 이야기하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이란, 다 똑같아야 된다는 획일성이 아니라 개개인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하나됨이라는 것입니다.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놓치면 안된다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기가막힌 비유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각각의 몸의 기관들인 눈, 코, 입, 손과 발 각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이 기관들은 개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몸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눈이 말하는 겁니다. “난 몸에 붙어있는거 너무 힘들어. 나 혼자 살아갈거야” 이러한 눈은 몸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겠죠. 그래서 빼어 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눈은 홀로 살아갈 수 없을 뿐더러 눈이라는 역할도 못하게 되겠죠.
눈은 오직 몸에 속했을 때, 가장 눈 다울 수 있는 것이고, 눈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몸된 교회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가장 나 다울 때가 언제입니까? 공동체 안에 / 몸된 교회 안에 속해 있을 때입니다.
그 안에 있을 때, 가장 나 다워질 수 있는 것이고, 지어진 목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에 속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우리가 빠트리지 말아야 할 점은 각 기관들의 독특성입니다.
눈은 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요. 손은 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존재하는 것이고, 삼킬 수 있기 때문에 목이 존재하는 거겠죠. 이렇게 각 기관은요. 개별적으로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단과 공동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요. 이러한 개개인의 특성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바울이 말한 몸의 비유는 집단적인 측면, 개별적인 측면 둘 다를 우리에게 너무나 균형있게 보여주는 탁월한 비유죠.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본회퍼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삼켜버리는 공동체를 원하지 않는다. 그분이 보기에 '공동체'와 '개인'은 같은 순간 속에 있으며, 서로를 포함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성도의 공동생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는 공동체에 속하면 속할 수록 개성이 사라지고,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의 개성이 살아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서로를 바라 보십시오. 정말 하나같이 다 다릅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성향도, 재능도 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두가 다 똑같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끔찍할까요.
베스킨라빈스만 하더라도 무려 몇가지의 아이스크림이 있습니까? 31가지죠. 세상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만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재미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호흡하고, 똑같이 말하고, 심지어 똑같은 옷을 입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각을 독특한 맛을 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길 원치 않으세요. 여러분, 자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주시는 겁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죠. 이런 분들은 찬양대를 섬기거나 찬양팀을 섬겨야 하고요.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사역을 섬겨야 합니다.
가르치는 데 능숙하다면 교사가 되어야 하고요. 정리를 잘한다면, 무언가를 정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각자가 받은 다양한 은사를 교회를 위해 섬기고 헌신할 때, 몸된 교회는 건강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며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몸의 비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 된 교회는 달라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달라서 기쁘죠.
옆 사람 보며 고백합시다. “당신의 다름이 나의 기쁨입니다”
저희 교회 교역자실만 보더라도요. 정말 한 사람, 한 사람 너무 다르죠.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담임목사님께서 너무나 복음적으로 교역자들을 뽑으셔서 정말 다양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협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죠.
복음 안에 연합함으로 건강한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 그리스도 안에서

자, 그렇다면, 두번째로 이 다양성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주는가?
출애굽기 6:6–7 NKRV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순서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에서 구원하시죠.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의 시작이 우리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너무나 잘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우리는 자격이 없는데, 죄의 노예 가운데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 이스라엘의 하나됨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우리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오늘 우리가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까? 같은 고향출신이라서? 아니면 같은 학교 출신이라서? 족보가 같아서입니까?
아니죠.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을 믿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여기 모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여기에 모인 것이죠. 이 믿음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인간의 구호도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나름의 공동체가 있죠. “교회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들어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교회를 하나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복음이 우리를 진정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기준을 가지고 남에게 맞추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겠죠.
여러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는데,
각자의 악기들이 지휘자를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연주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불협화음이 나겠죠.
교회는 각자가 다양한 소리를 내는 악기와 같아서 우리가 자신의 소리만 낸다면, 불협화음만 날 뿐입니다.
하지만, 지휘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복음의 악보를 따라 연주할 때, 아름다운 하모니가 울려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 NKRV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보십시요, 얼마나 다양합니까? 문화도 다르고, 국적도 다른 유대인과 헬라인, 신분이 다른 종이나 자유인.
그런데 이들이 모여 불협화음을 내지 않죠. 한 몸이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공통된 멜로디가 이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복음이 역사하는 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불협화음을 내지 않고, 아름다운 은혜의 하모니를 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첫번째는 함께 복음을 연주하지 않기 때문에 불협화음을 내겠죠. 자기 의라는 불협화음, 판단이라는 불협화음. 정죄라는 불협화음, 율법 아니면 방종이라는 불협화음.
두번째는 복음이 아닌 인간의 구호의 의한 하나됨인데, 제가 이렇게 표현할께요. 똑같은 음을 내기는 내는데, 화음이 나지 않습니다. 아름답지 않아요. 복음만이 낼 수 있는 은혜의 화음을 내지 못하는 겁니다.
이러한 면에서 복음 안에서 연합은 일종의 하모니라고 말할 수 있죠.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은혜의 화음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역사의 마지막이 보좌에 계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끝이 나는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하나님을 찬양하죠. 똑같은 언어, 똑같은 음악으로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피부 색이 어떻든, 국적과 지위가 어떠하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고, 오직 복음 안에서만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진정한 연합, 진정한 하모니가 울려퍼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이 화음을 들려주어야 사명이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으로 세상 가운데 이 은혜의 화음을 들려주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청년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깐, 저는 나이가 들고, 청년들은 계속 나이가 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제 아들이 청년부에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을 얘기하면 대부분 못알아 듣고 저를 신기하듯 바라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타워즈를 말해도 이제 못알아듣는 세대인 것이죠. 거의 유대인과 헬라인의 문화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기성세대로 들어가는 나이인데, 나와는 전혀 다른 이 젊은 세대들을 목양할 수 있을까. 교역자실에서도 이제 제가 적은 나이가 아니거든요.
어떤 사역자들은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젊은 언어들을 쓰면서 드라마 얘기하고, 넷플릭스 이야기하고. 청년들의 입장에서 아픔을 공감해주고 재미있게 하던데, 제 설교는 재미 없거든요.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매주 예수님 얘기하고, 매주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청년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거 보니깐, 복음이 그들에게 들린거죠. 그리고, 복음이 아니라면 절대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청년들을 만나게 해주시더라고요.
어느날은 제가 너무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막 청년부로 올라온 신입생들이나 청소년부 애들도 가끔 청년부 예배를 드리길래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여기는 왜 오는거냐. 설교가 어려울텐데,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을텐데, 왜 오는거냐?”
물어보니깐 이렇게 대답하더러고요. “찬양이 좋아서 오는거라고”
제가 이 대답을 듣고 깨달은게 있습니다. “청년들이 나 때문에 예배 오는게 아닌데, 내가 크게 착각했구나” 제 교만을 깨달았구요.
이후에 그 친구들이 말하더라고요. “설교, 전혀 어렵지 않다고. 오히려 궁금했던 것들을 말해주어서 좋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또 깨달은 것은 나이와 세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오로지 복음이구나’라는 거였습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 선생님과 제자와의 관계였는데, 청년부 올라오니깐, 그 선생님이 선배가 되버린 그러한 경우도 있거든요.
그래서, 오빠라고 불러야 할지, 형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러한 애매한 관계가 생깁니다. 여러분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목장 안에서 나눔이 될까요? 처음에는 ‘애네들은 이제 막 대학생 애들이고, 우리는 직장인인데, 어떻게 나눔이 되느냐’ 그렇게 말했는데요.
이제는 나이 어린 친구들과 함께 나눔을 하는 것에 대해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복음을 이야기하니깐, 대화가 되고, 나눔이 되는 것이죠. 오히려 나이 많은 청년들이 후배들을 보고 너무 도전이 되서 깨지기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는요. 그 중심 가운데 복음이 있을 때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이유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복음의 문화가 공동체 가운데 작동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오래된 공동체일수록 어떠한 경향이 있냐면요.
복음이 문화로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너무 경험이 많은거에요.
아예 처음 생겨난 공동체라면 성경에 맞추어서 시작하면 되는데, 여기저기서 들은 것도 많고, “공동체는 이래야 되”라는 자신의 생각과 기준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이 공동체를 하나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것일수도 있는데요.
여러분 제가 모태신앙이었지만, 한참을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뒤에, 변화가 된 케이스입니다.
문제는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친구들이 변화된 저를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예전에 제 놀았던 애인데, 제 어떤 짓하고 다닌지 내가 아는데’ 그런 시선으로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변화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죠.
더 문제는, 제가 찬양인도까지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뭐야, 제가 저기 왜 서. 자격도 되지 않는 거 같은데’ ‘은혜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찬양인도자가 더 나았다’ 별의 별 소리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이 교회를 떠나야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제가 이전에 본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았더 것은 인정은 하지만 (내 잘못), 공동체가 저를 계속해서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죠.
감사한 것은요. 그러한 저를 받아주고, 잘 이끌어 준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지금까지 제가 찬양인도를 계속 할 수 있었던거 같아요.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는 살기와 위협이 가득한 자였죠.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쯤에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온다는 얘기를 듣고, ‘아 나도 결박되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각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죠. 살해자, 박해자인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가 되었으므로, 그 사울에게 가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었지만, 아니아는 사울에 대해서 이미 아는터라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즉각 순종하는데요.
사도행전 9:17 NKRV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아나니아가 사울을 향해 뭐라고 부릅니까? “형제”라고 부르죠. 사울이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건, 무엇을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거에요.
이제 사울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박해자가 아닌 형제인 것입니다. 놀랍죠.
복음은 이렇게 오래된 끈과 같은 편견을 끊어버리고, 하나가 되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아나니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내가 과거에 알던 사울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울로 다시 보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편견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약 그러한 편견이 있다면 여러분의 편견은 복음으로 변화되야 합니다. 과거의 편견에 사로 잡혀서 누군가를 바라본다면요.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변화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보게 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시선과 내 기준, 내 경험으로 과거에 있던 어떠한 고착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렌즈로 서로를 다시 보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복음으로 하나됨을 비추어라

마지막,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설교 때 몇번 이야기했던 것인데요.
저는 어렸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을 때, 교회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너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저에게 “모두가 똑같아지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기에 더더욱 그랬던거 같아요. 제가 교회 안에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왠지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 성향, 다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야 되는 줄 알았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 이러한 율법들을 다 지켜야 되. 너희들의 문화, 다 버리고 우리와 똑같이 되어야 해.”
그러다가 어느날 복음을 깨닫는 그 순간, 저의 모든 고민들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뭐냐면 이방인보고 유대인처럼 똑같이 되라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 탄생한 대표적인 교회가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인데요.
사도행전 13:1 NKRV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러분, 이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라는 유대인도 있었고, 니게르라고 하는 시몬, 니그로라고 해서 흑인입니다. 루기오라는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세레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의 젓동생인 마나엔도 있었고, 예수님를 핍박했던 사울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공통점이 하나도 없죠. 이건 뭐, 만날래야 만날 수도 없고, 어울릴래야 어울릴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었고, 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의 복음의 하모니가 울려퍼진 것이죠.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최초로 이방선교의 빛을 비추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찢으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 말로 나라와 나라를 뛰어넘고, 문화와 문화를 뛰어넘고, 인종을 뛰어넘는, 모든 사람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인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을 짓고, 서로를 악마화하고 비난하는 일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몸된 교회마저도 불협화음을 내고 있죠.
이러한 때일수록 주님의 교회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됨의 하모니를 세상 가운데 비추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이 복음의 독특한 화음, 독특한 하모니를 돈 카슨 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자연스러운 원수들로 구성된다. 우리를 함께 하나로 묶는 것은 공통 교육이나 공통 인종, 공통 소득 수준, 공통 정파, 공통 국적, 공통 사투리, 공통 직업, 또는 어떤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서로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원수들의 모임이다” - 돈 카슨(Don Carson), “어려운 곳에서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은 모든 갈등과 반목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강력한 진리인 줄로 믿습니다.
이 복음으로 하나 되어 세상 가운데 주님의 빛을 비추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주 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하시니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예수님로 인해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용납하기 보다는 서로를 정죄하고, 서로 인내하고, 품어주긴 보단 너무나 쉽게 판단했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지쳤습니다. 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기도하오니, 하나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내가 속한 교회, 내가 속한 가정,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이 아닌 하나가 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더 나아가 이 시간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분열 가운데 있는 이 나라를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서로를 향한 비난과 폭력은 멈추고, 경청과 용납의 마음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먼저 주님의 교회가 본이 되게 하시고, 이 어려움 가운데, 탄식하시는 성령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주님의 교회되게 하옵소서.

기도

하나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이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의 다른점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교회로 모일 수 있게 한 복음을 보고,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복음으로 하나됨으로 세상 가운데 복음의 빛을 비추는 모든 성도,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하나로 부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블레싱기도

이 시간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동기도문을 읽으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가지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혜성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만민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따라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게 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을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을 통해 믿음의 다음 세대가 자라나게 하시고, 교회와 가정, 주일학교와 한아름유치원, 이야기학교, 러빙스쿨, 경신을 비롯한 기독교 사학을 통해 요셉과 다니엘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배출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역과 이 나라에 공의와 질서 안에서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며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해 주옵소서.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복음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이 자리 가운데 머리 숙인 주의 자녀들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