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9. 수요예배. 거꾸로 살아가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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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12장(겸손히 주를 섬길 때)

본문

누가복음 14:7–14 NKRV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서론

2016년에 개봉한 ‘Downside Up’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셨을까요? 벨기에에서 제작된 12분 분량의 단편 영화입니다. 제목부터가 참 독특하지요. “Downside Up”이라는 표현은 사실 영어에 없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Upside Down"이라는 단어를 뒤집어서 만든 조어이기 때문에, 영어가 익숙하다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어로 “로꾸거”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쉽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번역하면 "거꾸로 된 세상" 정도가 됩니다.
이 영화 속 세상은 실제로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 세상입니다. 영화 속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이며, 그들이 '보통의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반면, 다운증후군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특별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이런 설정 속에서 주인공 에릭은 유일하게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에릭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고, 그는 어디에서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처럼 외모를 바꾸는 수술을 고려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다름'이 사실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특별함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일까요? 영화 속 세상에서 사람들은 신발 끈을 묶거나 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신발끈이 자주 엉켜 넘어지고, 결국 신발끈을 끊어버리던 신발을 버리던 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에릭은 유일하게 신발 끈을 묶고 풀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에릭과 같은 ‘다름’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손가락질하며, 심지어 박해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스도인의 유별난 삶이야말로 이 세상이 꼭 필요로 하는 특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리 살아가야 할까요? 절대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죄로 인해 본래의 질서에서 거꾸로 뒤집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한 뜻과 질서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말이지요.
그 결과,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높아지기 위해 남을 짓밟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더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선을 행하는 것조차 자신이 받을 보상을 계산하며 합니다. 이렇게 죄로 인해 세상은 거꾸로 뒤집혔고, 사람들은 그 거꾸로 된 세상을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 거꾸로 된 세상 속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의 세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본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모두가 높아지려 할 때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려 할 때 예수님은 베푸셨습니다. 모두가 권력과 힘을 쥐려 할 때 예수님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세상의 상식과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경멸하며 손가락질했습니다. 부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당황하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충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진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저 좋은 도덕과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라는 부르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고, 보상을 기대하며 베풀고, 자신의 유익을 우선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십니다. 바로 거꾸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려 합니다.

본론 1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수많은 마을을 들러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여리고에 도착하시기 전, 아마도 베뢰아라는 지방을 지나실 즈음이었을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을 보면, 이 자가 단순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지도자”였다고 쓰여있습니다. 즉, 그는 지역에서 저명한 인물이었고, 유력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안식일 전통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점심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율법을 논의하고, 서로의 신학적 견해를 나누며,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초대했을까요? 단순한 환대의 마음에서였을까요?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단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4:1 NKRV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예수님께서 들어오가기 전부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잔치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자신들의 전통과 맞지 않음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종병을 앓고 있는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혀 이런 자리에 초대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이 병자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병자를 ‘미끼’로 삼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시험하려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신다면,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비난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자”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눅 1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눅 14:5) 바리새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들통나버렸지요. 어색한 정적이 흐르며 모두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때에, 잔치를 주최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서둘러 분위기를 정리하며 말합니다.
“자, 어쨌든 우리가 함께 모였으니, 식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의 말에 하인들이 분주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새 잔칫상이 차려지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7절에 이렇게 쓰여 있지요.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여기 “보시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단순히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주목해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대단히 불편하게 혹은 기이하게 생각하시며 눈여겨 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왜 그렇게 상석을 차지하려고 노력했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떤 자리에 앉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인정받을 기회가 훨씬 제한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잔치 자리’였습니다.
당시에는 명망이 높고 유력한 사람들이 종종 잔치를 열었고, 누가 초대받았느냐, 그리고 어디에 앉았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명망 있는 사람과 가까운 사이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만약 내가 높으신 분의 지지를 받는 자로 소문이 나면, 당연히 사회적·경제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수 있었겠지요. 잔치 자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출세의 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다양한 처세술을 동원해서 주인의 호감을 사려 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주인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상석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저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 마치지 못했었지요? 여기 가까이 앉아 대화를 이어가 보십시다.”
어떤 이는 주인에게 베푼 과거의 도움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곤경에 처하셨을 때 도와드린 것 기억나시지요? 그 이후에 일이 어떻게 잘 해결되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여기 가까이 앉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주인이 관심 가질만한 귀한 선물을 준비해 주인의 호감을 얻으려 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구하기 어려운 특별한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주인께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감히 작은 선물로 준비해 왔으니 한번 보아주시겠습니까?”
이들의 행동에는 한 가지 공통된 전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잔치를 주최한 주인도 초대받은 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인이 처세술과 아첨이 통하는 사람이어야만 이들의 전략이 먹힐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공명정대하고, 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친분을 과시해도, 아무리 과거의 도움을 들먹여도, 아무리 값비싼 선물을 가져와도, 그 주인은 사람의 외적인 처세술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진정한 가치를 기준으로 자리를 배정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처세술이 먹히는 이유는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죄로 인해 뒤집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이런 방식으로 출세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방식이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눅 14:8)
이 말씀은 당시 잔치 자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당연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자리를 피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눅 14:8-9)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잔치에서 자리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단과 방법이 좋아도 주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만약 주인이 공명정대한 사람이라면요? 사사로운 이익이나 허울뿐인 공치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면요? 그 앞에서는 인간적인 처세술과 계산이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부터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부분에 담긴 깊은 진리를 읽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상에서 먹힐만한 새로운 처세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잔치 자리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잔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고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를 큰 잔치의 자리에 초대하실 것이다. 세상의 잔치에서는 처세술이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아첨에 흔들리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적인 계산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온 자들이 가장 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불의한 방법으로 높아질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만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을 인정하시고 높이실까요?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끄트머리를 자청하는 자입니다.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르며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는 질서에서 벗어나 정직을 선택하는 자요, 겸손을 선택하는 자요, 성실을 선택하는 자요, 희생을 선택하는 자요, 진리를 선택하는 자입니다. 세상은 내게 조금이라도 더 유익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경쟁 논리에서 벗어나 세상과 달리 거꾸로 살아가는 자들을 인정하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대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어떠신가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고 계신지요? 아니면 세상의 질서를 따르고 계신지요?

본론 2

예수님은 잔치에 초대받 자뿐 아니라 잔치를 베푸는 사람의 관점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주최한 바리새인 지도자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12 NKRV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잔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의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잔치를 베푸는 이유 자체가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듯 당시의 잔치는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유리한 관계를 맺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를 받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후에 초대한 사람에게 보답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시대였습니다.
초대를 받았다면, 나중에 잔치를 열어 다시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보답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초대해 준 사람의 명성을 높여주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일종의 보답이었습니다. 때로는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은혜를 갚기도 했습니다. 즉, 잔치에 초대받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빚을 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누구를 초대했을까요? 나중에 내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 초대하는 것이 손해로 끝나지 않을 사람,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될 사람입니다. 초대할 사람들을 고민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내게 이익이 되는 관계’를 고려하여 사람을 초대했던 것입니다. 즉, 잔치는 본질적으로 계산된 관계, 계산된 베풂, 계산된 친절로 가득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식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가복음 14:13 NKRV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누군가에게 초대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자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단순히 ‘약자를 배려하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로 이 땅의 잔치 자리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잔치를 바라보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14 NKRV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초대한 자들에게 갚을 것이 없어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이해타산적으로 베풀고, 관계를 계산하며 살아도 인정받고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만이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받고 영원한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을 인정하시고 갚아주실까요? 잔치를 베풀되, 철저한 계산이 아니라 은혜로 베푸는 자들입니다. 이해타산을 따져가며 관계를 쌓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애쓰는 질서에서 벗어나,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섬김을 선택하는 자요, 대가 없는 나눔을 선택하는 자요,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은 내게 조금이라도 더 유익이 남도록 계산하라고 가르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들에게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보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요, 몸 불편한 자요, 저는 자요, 맹인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풍성한 구원의 은혜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너희도 조건 없이 베풀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반드시 갚아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어떠신가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고 계신지요? 아니면 세상의 질서를 따르고 계신지요?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잔치 자리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겸손한 태도를 가지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이미 죄로 인해 거꾸로 뒤집혀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의 방식이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라. 그렇게 해서 네가 높아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너를 밟고 올라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베푼 것에 반드시 보답을 받아야 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네게 도움이 될만한 자들을 골라서 사귀며 그들에게 베풀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갚을 길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라.” 우리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맞다면 우리는 세상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맞으시다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저 이 세상이 전부라면 무엇이 맞든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 없겠지만,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실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왔을까요? 아니면 세상과 똑같이 살아왔을까요?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의 인정과 성공만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계산적으로 베풀고, 받을 것을 기대하며 사랑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진정으로 닮아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거꾸로 살아가는 자들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세상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기껏 최선을 다해봤자 서로를 짓밟고, 이용하고, 경쟁하며 결국 함께 무너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를 세우고, 섬기며, 품어주어 결국 함께 더욱 풍성하게 살아가게 되는 곳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영화 속 주인공 에릭과 같이 말이지요.
에릭은 남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과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꾸로 살아갈 때,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무 의미없게 생각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거꾸로 된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대우가 불공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행할 때, 오히려 무시를 당할 수 있구요, 대가 없이 베풀고 사랑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본이 되어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친히 먼저 그 길을 가셨고, 아버지께 높임을 받으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를 닮아 세상 속에서 거꾸로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오게 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었던 모든 것이 영원한 상급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잠시 후 사라질 세상의 부귀와 성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께서 친히 갚아주실 상급입니까? 후자를 선택하셨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기 위해 어떤 삶을 사셔야겠습니? 누군가를 계산 없이 섬기고 베풀며,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가장 귀한 벗이여 올라와 앉으라” 그 날에 주의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도록,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거꾸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찬양 - 내가 주인 삼
내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거꾸로 살아가도록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소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맛보며 하늘의 질서를 실천하는 작은 천국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오산 지역에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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