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6:29-34,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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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포도원
나봇의 포도원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나봇이라는 농부의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을 다룹니다. 아합과 아내 이세벨의 탐욕과 권력을 이용해 뺐는 장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21장을 시작하면서 특이하게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앞서의 일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연결점을 갖는 의도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지금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시작은 오므리라는 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초대 사울왕 그리고 다윗왕 후에 솔로몬으로 이어지는데 이후에 나라가 분열합니다. 분열된 북 이스라엘과 남쪽의 이스라엘인데 남 유다라고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은 신앙이 빠르게 변질되었는데 그 중심에 오므리 왕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6:22 “22 오므리를 따른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른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고 하면서 북쪽 이스라엘의 7번째 왕이 되고 아들 아합이 8번째 왕이 됩니다. 이때 남 유다는 여호사밧이 4번째 왕이 되고 두 왕은 서로 사돈 간이 됩니다. 아무튼 오므리는 왕이된 후 12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6년을 디르사에서 통치를 하다가 열왕기상 16:24 “24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라고
그렇게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아모리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상 16:25 “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그리고 열왕기상 16:26 “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여기에 중요한 표현은 ‘죄 중에 행하게 했다’는 표현과 ‘헛된 것들’(헤벨, 전1)로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악한 길로 행하게 했고 결국 ‘여호와를 노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6:29 “29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여기에 첫 번째 우리의 오해가 있습니다.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12년 통치 중 사마리아로 옮겨 더욱 곤고하게 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 12년 22년 도합 34년의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도 열왕들 중에 고고학에서 발견된 현재까지 유일한 왕조가 오므리 왕조입니다. 나라가 분열된 ‘여로보암 1세로부터 오므리의 앞 왕인 스므리까지’는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는데 그것도 악한 길이지만 거기에 ‘그들보다 더 해서 백성을 헛된 것들’을 향해 가게 함으로 ‘여호와를 노하시게’했다는 말을 한 번더 말씀을 드립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방인 공주 이세벨과 결혼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6:31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어느 정도였냐하면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 34절인데 큰 의미를 갖는 말씀인데 내용인즉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려다가 맏아들과 막내 아들을 잃게 되는 사건을 여호수아의 성취로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처음 싸움을 한 여리고 성 전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방신 즉 우상숭배에 대한 철저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호수아 6:26 “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는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세상의 성공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살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므리 왕조의 성공에 대해서 잘 알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성공을 최고의 목표로 오므리 왕조와 그로인해 백성들이 따라가는 헛된 일들의 종합판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았는 이야기에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16장에 이어서 나오지 않고 4장과 그 사이에 이야기가 이 사건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장부터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하고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17장에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예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베푸신 사르밧 과부 이야기와 18장에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과 가뭄이 끝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9장에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9:2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리고 엘리야도 이런 상황에서 생명을 위해 도망가는 장면도 다룹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강권으로 엘리사를 만나게 되는 사건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산에 불이 나면 가장 위험한 상황은 큰 불이 잡혔다고 할 때의 방심이라고 합니다. 잔불 정리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다시 불은 거대한 화마를 드러내듯 우상 숭배의 싸움에서 패하고도 정신 못차린 아합에게 아직 2차전이 남아 있는 상황인 것이죠. 이세벨이 이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20장은 시리아와 전쟁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 갑니다. 시리아의 지방 영주 32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시리아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것이죠. 그럼에도 첫번재 공격을 어느 예언자 한사람으로 인해 물리쳐 시리아 왕이 도망했지만 2번째 침공은 해가 바뀐 후 다시 시작 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자그만치 27,000명이 죽고 도망하게 되고 지도부는 이방인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에 자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은 아합에게 있어 최고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 번역에는 ‘그래서 그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목에 줄을 동여 매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가서 ‘왕의 종 벤하닷이 제발 목숨만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자 아합은 ‘그는 나의 형제다’라고 말하며 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선지자가 찾아와 ‘네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을 살려 보냈기에 생명을 대신할 뿐 아니라 백성도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말미암아 20절 마지막에 ‘마음이 상하여 화를 내면서 자기의 궁으로 돌아갔다’는 맺음입니다.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떠난 아버지 아래에서 정치를 배웠습니다. 22년의 통치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이세벨과의 결혼은 오므리 왕의 정략적인 결혼이죠. 당시에는 그런 정략 결혼은 왕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경에는 가장 악한 자로 빌라도를 1순위로 뽑지만 아합과 이세벨이 대표적으로 나옵니다. 특히 계시록에서도 악인의 대명사로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갈라진 배후에는 이런 이방인과 결혼이 자리 잡을 만큰 나라의 전체를 뒤 흔드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면에는 항상 종교적인 면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과 결혼한 결과는 바알과 아세라를 수입해서 사마리아 수도에 이방 성전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오므리 왕조가 악한 길을 걸었고 백성들조차도 헛된 길로 가게 한 것은 완전한 신앙의 변질을 의미합니다. 유명한 티비 프로에 이런 말이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20장에 시리아가 쳐들어 왔을 때 전멸당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국에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데 그 계기 역시 아합의 행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예시가 21장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근처 이스르엘이라는 곳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의 궁 가까이 있으니 나에게 넘겨라 정원을 만들고 그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여기에 우상숭배도, 소위 말해 권력자의 무자비한 폭력도 말 그대로 갖고 싶은 것을 상식선에서 요구하는 모습이 아닌가요? 좀 이야기 해보면 더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 정도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이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이 상했다, 화를 냈다, 궁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삐져 있었다 그래서 음식도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제도는 바꿀 수도 있고 개선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삶의 체계 즉 하나님께서 왕으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을 때 그들이 거주할 약속의 땅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업’이라고 말하는 바는 소위 지금 말하는 회사를 기업이라고 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결이 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따라서 지금 왕이라 불리는 자의 하나님 없음과 포도원 농부의 하나님 있음이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유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아합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상하고, 분나고 그래서 얼굴을 피하고 밥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세벨은 ‘너는 왕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밥먹고 마음을 좋게 가지라고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해결해서 갖고 싶어하는 포도원을 갖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인봉해서 나봇이 사는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내용인즉 ‘금심을 선포하고 나봇을 높은 자리에 앉게 한후 건달 두를 사주하여 그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을 저주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하는 소위 말해 거짓 고발 사주를 이세벨이 작전을 짠 것입니다. 권력은 이런 것입니다. 말을 해서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하셨는데 안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냐면 아합의 자세 때문이죠. 눈에 보이는 권력대로 사람들은 행합니다. 11절 ‘그 성 안에 살고 있는 원로들과 구족들은 이세벨이 편지에 쓴 그대로 하였다’ 여러분은 지금 설교를 들으시면서 저 목사가 지금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성경에 빗대에 하고 있구나 할 것입니다.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미 우리가 미가서를 끝내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오늘 본문을 말씀 드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가는 이렇게 말했죠. 오므리의 율례를 따라 사는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가 6:16 “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미가는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나봇을 성 바깥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고 이 사실을 이세벨에게 전하고 이세벨은 아합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세요 돈을 줄 필요도 없이 이제 이 땅은 당신의 땅입니다’ 이렇게 차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미가서 2장 1절이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주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 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
그러자 본문 17절 엘리야에게 임한 말씀은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재산을 빼앗기까지 한다. 그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라고 예언합니다. ‘내가 너에게 지앙을 내러 너를 쓸어 버리되 너 아합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씨도 남기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없애 버리겠다’ 뿐만 아니라 23절 이세벨에게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 밖에서 이세벨의 주검을 찢어 먹을 것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은 단순히 사마리아 성 안에 바알 신당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그렇게 연결된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26절에 ‘그 아모리 사람이 한 것을 본받아서’라고 하는 것이죠. 앞서 25절부터 ( 괄호가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없다는 의미인데 / 자기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말려든 아합처럼 이라고 시작하는 말은 같은 생각으로 물들어 버린 결과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답답한 장면은 그 뒤에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자 아합은 자기 옷을 찢고 맨몸에 굵은 베 옷을 걸치고 금식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 앞에서 겸손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재앙을 유보 시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라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이 마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방불케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오늘 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아합과 이세벨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시키는 대로 동참하거나 이때에 그동안 감춰있던 역사관이 드러나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야 할 예배당은 바울과 아세라를 찬양하는 듯 세상의 방식이 난무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을 합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자신들 앞에 와 손을 흔드니 착각하고 오히려 더 열을 올리는 것은 갈멜산 위에선 850이나 되는 바알의 추종자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야 그렇다 칩시다. 나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아 절망이다 나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과일나무와 같다. 이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없다. 포도 한 송이도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허기진 것 같은 연속의 기분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 심판이 유보된 적은 있어도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미가서를 앞뒤로 요나와 나훔서가 자리 잡고 있는데 요나서는 잘 알다싶이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자 회개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훔서에서는 그런 니느웨가 망한다는 심판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가서는 소선지서 중심에 그리고도 심판에 대한 유보와 함께 바뀐 삶을 살지 않는다면 심판은 니느웨 뿐만 아니라 아합과 이세벨에게 정확하게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함께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미가 7:18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런 삶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아합과 이세벨의 사건을 통해 그들이 이룩한 오므리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한국의 상황이 미래는 없는 듯 오늘만 살겠다는 이들의 참담한 모습으로 평화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이번주에 올바른 결정을 기대하고 있지만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그래서 방법도 별로 없는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공의’의 실현이야 말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