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6

창세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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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하여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점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인류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조상은 타락했으며 타락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내용 기억나십니까? 가인과 아벨의 예배 전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여자의 후손에 대해 들었고 복음을 들은 자들의 반응은 예배로 드러난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으며 아벨과 그의 예배는 받았습니다. 예배자의 삶은 예배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 나라에 속한 가인입니다. 어거스틴은 오늘 본문을 두고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가인은 장남이었으나 인간 도성에 속한 자였고, 그의 동생 아벨은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였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여러분 굉장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왜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고 말할까요? 여호와의 앞을 떠났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입니다. 즉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리하라는 벌을 지키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에덴 동쪽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즉 가인은 이제 더 이상 에덴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에덴으로부터 멀리 간 것입니다. 에덴 따위 이제는 상관없다, 내 살길은 내가 알아서 찾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놋 땅에 거주합니다.
17절에 보면 가인이 성을 쌓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built a city 즉 도시를 건설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의 성을 건설한 것입니다. 유리하는 자가 되어라는 명령을 가인이 두려워했던 것은 자기를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일 까봐 두려워했는데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가 왕이 되는 나라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 나라의 이름이 에녹이었습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가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자녀가 잘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벌을 줍니까? 그렇지 않죠. 그냥 내 버려둡니다. 나랑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이 잘못을 했을 때 저주하고 벌을 주었습니다. 왜요?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 그냥 교회를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가인은 거룩한 교회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여자의 후손을 믿고 기다리는 약속의 공동체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출교시키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벌을 받고 있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할 수 있도록 그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인 스스로 출교를 선택했습니다. 스스로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더 이상 교회 백성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고 내 스스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떠났습니다.
놋이라는 이름은 방랑의 땅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분명 가인은 거주했는데 그 땅의 이름은 방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 틀리면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 교회가 여기 밖에 없나, 교회 가 봤자 죄인이라고 뭐라하지 필요없다 그냥 내 알아서 살란다 하고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내 인생 내 스스로 세워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자리가 방랑의 땅입니다. 집이 있고 돈이 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성경은 방랑자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가인처럼 혹시 하나님을 떠나서, 내 인생 스스로 알아서 살고 싶어서 인간의 나라에 속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스스로 떠나서 행복하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는 방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로 인간의 나라를 번성케 하는 라멕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7대 손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가인이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기록합니다. 신기하게도 여러분, 가인이 하나님을 떠났으나 가인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불신자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불신자에게 자녀가 태어나도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불신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쉴 수 있는 은총을 받습니다. 여러 은총들을 충분하게 누립니다. 그런데 가인은 다릅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면 그는 분명 이 대목에서 여자의 후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을 되새길때마다 그는 그것을 무시했으며 모른척하고 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그렇게 오래 약속에 대해 듣고 사모하며 살았는데 그 약속의 현상을 보고도 모른척 하죠.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죄가 발전합니다.
물론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라멕의 후손들을 잘 보면 무엇이 등장합니까? 야발. 가축을 치는 자입니다. 정착할 때에 가축은 필수입니다.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육축을 자리잡게 한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음으로 즉 악기를 만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두발 가인. 여러 가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아주 뛰어난 장입니다. 즉 가인의 나라는 문화가 문명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엄청난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뿐입니까? 누이의 이름이 나오는데 나아마 입니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즉 문화와 문명과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그 절정이 라멕인데 라멕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류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가정을 무너뜨린 사람입니다. 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가인의 뒤를 이은 살인자입니다. 23절입니다. 이 부분은 찬송입니다. 노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상처로 사람을 죽이고 상함으로 소년을 죽였다. 여기 나오는 상처와 상함은 심각한 피해와 아픔이 아니라 작은 상처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죽이겠다가 아니고 그냥 죽였습니다. 그런데 살인을 해 놓고도 찬송을 부릅니다. 가인과 얼마나 다릅니까? 아담의 7대 손에 이르러 나라가 얼마나 포악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두려워하기라도 했는데 라멕은 자랑합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7배라면 나를 해치면 77배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77배다 하고 아무도 나를 못 죽인다고 당당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및 군사적 강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문화는 먹고 살기 편할 때 즐기는 것이죠. 먹고 사는 데 바쁘면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나라는 엄청난 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강포한 가인의 나라를 보면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게 좋아 보이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예배하며 살아갑니다. 라멕의 교만한 노래로 본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25절 26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5절 앞에 그리고 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이렇게 발전하고 풍족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존재감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은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발전과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목하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다시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자의 후손이라고 믿었던 그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살인을 저질렀을 때 아담과 하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으악! 에덴동산! 여자의 후손! 자녀가 다 사라졌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했고 가인은 벌 받으면서 회복하면 되는데 스스로 아담과 하와가 속한 교회를 떠났습니다.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소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아담은 다시 하와와 동침했습니다. 왜요? 여자의 후손을 믿으면서 새로운 자녀를 얻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망이 없는 그 때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여자의 후손이 오면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셨잖아요. 그 약속을 믿습니다. 자녀를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은 두다 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자녀를 주셨는데 초대교회로부터 셋을 부활의 자녀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부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했고 가인은 떠남으로서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죽음 가운데 하나님은 셋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뭐라고 했을까요? 살았다!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이 희미하지만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것이 부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세상은 소란하고 강력하고 떠들썩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자신의 죄악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가인의 나라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류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티끌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과 동일합니다. 에노스, 우리는 티끌같은 자들이다, 우리에게는 강함이나 능력 힘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하고 티끌처럼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연약한 자들에게 소망은 강함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에노스때에, 그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숙어입니다.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가인과 다릅니다. 에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배드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셋과 에노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갑니다. 칼빈이 이 구절을 아주 멋지게 주석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주의해 볼 가치가 있으니 그 이유는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사단은 다른 것은 전혀 손대지 않고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타락시키는 데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또한 피조물들의 기원을 들어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백방으로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이 돌을 움직여서 가련한 인간들이 불합리하게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그들 자신들이 허탈감에 빠져 지치게 하려고 끊임없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말라. 즉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이 주요한 점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가 제 아무리 무더기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린다고 해도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말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강력한 삶을 살고 성공한 삶을 살고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하게 살고 탁월한 문화와 문명을 이루고 누리고 살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방랑한 놋의 인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연약하고 어쩌면 세상이 조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을 기억합시다. 고대에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가족의 성을 채택하는 표현입니다. 즉 우리 가족의 성은 조가 아니라 여호와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이 여호와 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표현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탁월하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 겸손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으며 티끌 같은 인생이지만 믿음으로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힘들고 어렵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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