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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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서론
아이가 크다보면 무조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시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지는 시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왜?하면서 묻는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3세가 넘어가면 아이들은 왜?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호기심이 왕성해져서 모든 것에 이유를 묻는 나이입니다. 이 때 부모님들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와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유안이의 경우에도 이제 이유를 묻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먹고 싶은데 못 먹게 하면 왜 못먹게 하는지 물어보고, 칠찰찰 동영상을 보고 싶은데 못보게 하면 이유를 묻습니다. 이런 모습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줄어들기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제가 사역하다보면 청년들이 그러거든요. 왜요? 무엇인가의 이유를 찾는 것은 인간의 특징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유를 찾는 것 때문에 인간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과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이유는 중요합니다. 이유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입니다.
본론
나사로가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다니와 마리아의 집에는 하나뿐인 오빠를 잃었던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나사로가 부활하는 광경을 본 유대인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꼭 모든 사람이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예수님의 기적을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속히 예루살렘에 바리새인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사렛의 예수가 죽은 자를 살렸다고, 이는 분명 큰 위협이라고.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지금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후에는 사단이 바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예수님이 전파될 수록 사단의 공격도 격렬해집니다. 실제로 우리가 가장 큰 난리가 일어나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은혜를 받은 직후입니다. 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이 일하시고 문제가 해결될 때 사단은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뜨리기 위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사단과 같은 악한 세력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에 모였습니다. 공회라는 곳은 지금으로치면 국회와 비슷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중요한 일들을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회에는 주로 대제사장, 바리새인, 귀족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의 소식에 위기감을 느끼고 회의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즉, 지금으로치면 예수님의 사건으로인해 대통령, 국회의원과 재벌들이 다 같이 모여 긴급회의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단한 권력자들이 왜 위기감을 느껴 모여서 회의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권력이 로마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로마에게 협조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권력을 얻었습니다. 언제든지 로마로부터 권력을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특이한 가르침을 주고 인기가 많은 수준이었던 예수님의 위치가 달라졌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전역이 술령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러한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는 상황은 언제든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라 여겼습니다. 더욱이 로마에 복종하고 따르지 않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회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인해 위협을 느낀 로마가 찾아와 자신들의 권력도 빼앗고 로마의 완전한 식민지가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을 위한 선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이러한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48절의 우리 땅과 민족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살펴보면 우리의 땅과 민족이라 나옵니다. 즉, 우리가 다 같이 사는 땅과 민족이라는 뜻이 아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땅과 민족을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땅과 민족을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봅니다. 내 것을 잃기 싫어하는 욕심 때문에 영적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모습을 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게임하고, 유튜브, 인스타, 틱톡을 보는 시간을 잃기 싫어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반대하고 짜증내는 모습 같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모두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내 것을 내놓기 싫은 욕심 때문에 목사님의 말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철저히 살펴보면 결국 내 번지르르한 말이 틀린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공회도 그러했습니다. 신명기 18:22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참 선지자가 누구인지 구별하는 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에 따른 역사가 일어나는 자가 참 선지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기준에 철저히 통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전했고, 그분께 영광을 올렸으며, 모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공회는 내 것을 잃기 싫은 이기적인 욕심에 영적 눈이 가려 이를 부정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넘어 예수님을 적대했습니다. 이처럼 말씀마저 외면하고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고 방해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걱정과 우려속에서 49절에 한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회의의 참가한 사람들을 둘러본 후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가야바의 말에 몇몇은 인상을 찌뿌렸고 몇몇은 의아함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걱정어린 표정과 달리 자신만만한 그의 표정에 사람들은 가야바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는 충격적인 말을 뱉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한 사람을 죽여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죄책감을 덜 수 있도록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도 해주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가려주고 죄착감을 덜어주는 가야바의 말에 공회에 참석한 이들은 앞다투어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 있을지 궁리하고 계획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이전에 살핀 11장 1-44절까지의 예수님의 모습과 극명히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공회와 다르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면서 모든 민족을 위한다는 위선자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항상 진실하시고 모두를 위한 이타적이신 분이셨습니다.
이토록 선하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의 계획이 진행되는 암울한 상황 속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추악한 욕심과 이기심으로인한 계획과 말조차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과 죄악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악함과 죄악조차 하나님을 방해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삼국지와 같은 책을 보면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 나옵니다. 아마 모두 이름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제갈공명입니다. 삼국지에 수많은 똑똑한 사람이 나오지만 제갈공명이 가장 유명하고 대단하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제갈공명이 그런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갈공명의 상대의 욕심과 계획까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계획을 짜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상대는 제갈공명의 팀을 넘어뜨리고 손해를 보게 하려고 했는데 그런 행동까지 제갈공명의 팀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사단과 악한 세력의 공격과 방해조차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지혜자요 능력자이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52절에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교회로 모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누구도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예수님을 혼자 잘 믿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공동체와 관계는 중요하긴 하지만 조금 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 개인이 잘 믿는 것이 중요한만큼 교회에서 하나됨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되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 나 개인의 문제이지만, 믿고 난 후에 믿음의 삶은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로마서 12:5절을 살펴보면 성경은 우리가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몸이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수요예배 때 차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에베소서를 보아도 우리가 한 몸이고 하나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삶에 중요한 요소는 바로 공동체의 삶, 즉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설명하면 구원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원자라 고백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구원을 받는 순간 나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이미 전에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과도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된 예수님의 몸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과 중생하여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교회에서의 삶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 죽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내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올바른 교회는 내 것을 내놓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4:32을 보면 초대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두루쓰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서로의 재산의 차이로인해 분열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서로의 것을 나누고 도움으로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 내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나 가진 게 없는데? 나 이미 다 교회에 드리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 내놓고 계십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온전하게 하고 있진 않습니다. 왜냐? 아직도 내것이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도행전 4:32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시작.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기서 보면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라고 했습니다. 내어놓는 것은 어렵지만 할 만 합니다. 하지만 아예 내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내 것을 내놓은 김에 대접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쓰는 사람들에게 내 것을 주었다고 자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그만해야 합니다. 우리 축복교회는 아주 잘 내놓습니다. 대출까지 받아서 교회와 목사님을 열심으로 돕습니다. 그런데! 그 내놓은 것에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내가 내논 것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내가 애쓴 만큼 교회와 목사님에게 대접 받고자 합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가 하나되게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식사의 문제에 대해 나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최근의 결과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빈부격차가 심했다고 합니다. 무역의 도시였기 때문에 소위 사장님들은 떼돈을 벌었고 노동자들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이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사장님들은 돈이 많으니 돈은 턱턱 내놓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시간이 많기 때문에 일찍 모여 부자방에 모여 흥청망청 먹고 놀았고, 가난한 자들은 늦게까지 일하고 와서 마당에 차려진 음식을 겨우 먹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은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들이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 부자들은 자신의 돈을 내놓아 가난한 자들을 먹였지만 내놓은 돈에 걸맞는 대우와 지위를 누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돈을 내놓지 않는 것보다 더 크게 교회를 분열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자입니까? 교회를 분열되게 하고 있는자입니까? 내 시간과 돈 내놓고서 희생에 걸맞는 대우와 지위를 누리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한 것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까? 오늘부터 내가 받고 싶은 지위와 대접을 포기하십시오. “내 것을 모두 하나님에게 드렸으니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 겸손히 내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다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자주하시는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너! 나한테 준거야 하나님한테 드린거야!” 그렇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목사님과 교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놓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분명히 더 낫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내놓아도 그것에 지분을 주장하고 대접과 지위를 바라는 것은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실컷 봉사하고 책망받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오직 목사님이나, 여기 사역자분들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내 것을 내놓고 아무 말하지 않고 겸손히 자기를 지키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놀아운 돌보심을 체험하는 축복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