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참혹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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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빌라도
‘무리가’ 여기서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가서 당시 예루살렘의 집정관이었던 빌라도에게 재판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기소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백성을 미혹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자칭 왕이라고 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실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어느 때에는 배를 타고 사람들을 피해가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법원에 고소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세금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성전세를 납부하신 사건이 있고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세번째 자칭 왕이라고 한 것이 문제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빌라도가 첫번째와 두번째 내용에 관하여 심문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 한 이후에 3절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셨는데 그것을 직역하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정도이다.
그래서 이것으로 예수님에게 ‘무죄’라고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무리가’ 더 강하게 말하고 소동을 하니 그것을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재판이다.
판사는 법대로 심판을 해야 마땅합니다. 이 당시 로마의 법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법과 정치의 형태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법대로 판결하기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두번째 고소한 내용은 명확하게 무죄입니다. 그러나 첫번째와 세번째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무죄이지만 많은 사람이 소동을 일으키면 그 문제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재판의 특징입니다.
지금 탁핵심판의 국면과 매우 흡사합니다.
재판관들은 내용을 모두 확인한 이후에 법과 상식에 따라 판결하면 매우 간단한 문제 같지만 많은 법과 이해관계 그리고 무리들의 선동때문에 판결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판결한 이후에도 더욱 강하게 소동한 것처럼 탄핵에 대한 판결 이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예수님이 ‘갈릴리’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갈릴리는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관할이라며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버립니다.
헤롯
헤롯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의 심문은 더욱 가관입니다.
빌라도는 로마로부터 정식으로 부임한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헌법의 절차에 관하여 빠삭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절차에 따라 심문하고 그 내용도 적절했습니다.
그러나 이 헤롯은 아버지의 배경으로 왕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법을 집행하기에 소양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재판을 받아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겠습니다.
먼저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소문대로 이 기회에 예수님의 기적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한심한 자의 태도에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태도입니다. 마치 돼지와 같은 사람의 말에 예수님은 대꾸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화라는 것이 어느정도 수준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수준 미달인 지도자는 자신에게 무반응으로 반응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고, 그것을 빌미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더 강력하게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했습니다.
헤롯과 그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합니다.
정말 무지의 끝판왕과 같은 행동들을 합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전에 원수같이 지내던 빌라도와 헤롯이 이 일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원수같이 지내다가도 이익관계에 따라서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를 향해 나라를 무너뜨릴 적이라며 공격했던 사람들이 얼마 후에는 손을 잡고 협력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무리
무리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졌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호소합니다.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면 무죄판결을 하면 끝인데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판결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이 판결로 인하여 또 민란이 발생하면 자신은 집정관으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다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이후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잘못된 재판관들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판관을 만드는 사람은 ‘무리’입니다.
집정관은 22절 세번씩이나 죽일 죄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무리가 계속 소리를 질러서 재촉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정말 한심한 무리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잔혹하고 참혹한 십자가인 이유는 예수님이 채찍과 창과 가시에 찔려 큰 고난을 받아 돌아가신 것도 있지만 그 내면에 참을 수 없는 억울함과 모욕과 멸시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학교에서 자녀가 싸웠는데 재판관이 되는 교사나 교장이 힘있는 부모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직장에서도 헌신적이고 능력있는 사람보다 인기있는 사람이 승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판사들이 판결을 내릴 때 언론에서 보도하여 여론을 움직이면 여론대로 판결하는 일도 많습니다.
내가 그 억울한 당사자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일은 남일이 아니라 내 일입니다.
이 참혹한 십자가는 죄에 대한 결과이며 결국에 내가 집정관이나 유대 지도자들이나 무리가 되지 않는 다면 반드시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를 질 때
우리도 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질 때 누군가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예수님이 쓰러지기 직전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이가 곁에 와서 십자가를 함께 들어줍니다.
우리도 너무나 억울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과 괴로운 길을 걸어갈 때 생각지도 못하게 그 고통을 함께 해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힘껏 기도하세요. 정말 쉽지 않지만 힘껏 기도하세요.
나를 괴롭히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나에게 남은 옷조각마저 가져가기 위해 제비를 뽑는 무자비한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고 승리의 비결입니다. 여기서 폭발하면 민란을 일으키 바라바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라바는 나란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했고, 바라바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결국 죽었고, 예수님은 부활했습니다.
2.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 곁에 두명이 십자가 형을 당했습니다. 한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은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사람은 예수님을 원망하며 비방했고, 한 사람은 예수님께 기억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선행을 사람에게 보이려 애쓰지 말고, 예수님께 기억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예수님께 아뢰세요.
그렇게 하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3.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신 최후의 외침은 ‘영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바쁘고 정신을 쏟아서 ‘영혼’에 대하여 놓칠 때가 한두번 아닙니다. 아니 거의 매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이 땅에서 사람들이 부를 갖기 위해 팔았던 상품들의 목록을 말합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수많은 값비싼 물건들을 거래하며 부를 축적하느라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처참한데 그들이 거래하는 물품 중에서 가장 비싸게 취급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영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파우스트의 일화나 스크루지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동화처럼 치부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할 때에 내 영혼을 부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망가지지 않도록, 빼앗기지 않도록, 병들거나 죽지 않도록 돌보아 달라고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결론
저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선동에 휩쓸린 무리를 보며 지금 우리나라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오버랩됩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어느쪽이 정의인지 어느쪽이 선동하는 쪽인지 아니면 둘 다 마찬가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의 손으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그 참혹한 십자가입니다. 그 비참함, 그 재판, 그 모욕, 그 억울함...말도 안되는 선동과 거짓과 이익에 따라 판단하는 행동들에 의한 피해가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장차 겪게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집정관 그리고 헤롯의 편에 서면 우리는 이익을 적당히 나누며 예수님과 같은 인물들을 죽이라고 무리에 섞여 소리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면 여지없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마다 그 십자가를 함께 질 시몬과 같은 인물을 보내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담대히 지세요.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힘껏 기도하세요.
나의 고통과 억울함과 선행과 인내와 절제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마지막으로 나의 영혼을 부탁드린다고 기도하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죽음의 어두운 터널을 금새지나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