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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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마가복음 3장 1-6절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설 교: 언제까지입니까? (마가복음 3:1-6)
교회 청년 시절에 저는 한 형을 만났습니다. 그 형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기를 좋아했고 자기가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새가족으로 환영을 받았던 형은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같이 있는 청년들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이 말했던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계속해서 드러났고, 이 사실을 본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그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그 형 곁에는 어느새 저만 남았습니다. 어떤 한 날, 이 형과 같이 청년부 모임을 가고 있었는데 한 장소에 근처에 들어가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그 형제 거짓말하는 것 너무 웃기지 않니? 그렇게 자랑하면서 살고 싶을까?” “아우 별로 같이 있고 싶지 않는데, 웃으면서 대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 너가 한번 얘기해봐.” 그러면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청년부 지체들을 목격했습니다.
제 옆에 있던 그 형은 아연실색을 했고, 그 뒤로 알 수 없는 분노에 찬 소리들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청년들은 그저 조용히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잡는 손조차 뿌리치고 그 형은 그 순간부터 교회에서 사라지고,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분명,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짓고 있기에, 그 모습을 가진 지체를 뒷담화 소재로 씁니다. 그러면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 치부합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 성격이 맞는 사람과는 교제하지만, 내가 불편하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애초에 맞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끼리끼리인 것에 대해서,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교회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성토합니다. 목회자들에게는 그런 이유들을 하소연할 수도 있겠지만, 심판대 앞에서도 예수님께도 그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정죄 받을 만했기에 내 주변에 두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시렵니까?
가족과 목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여전히 내 심기를 건드리고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모습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은 여전히 오늘 본문에서 손 마른 사람을 놓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말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언제까지 ‘정죄하거나 판단만 하고’ 있습니까?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실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것은 기회였습니다. 2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여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고발과 주시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 바리새인들은 두 눈에 불을 켜 부릅 뜨고 예수님을 어떻게 수렁에 빠뜨릴지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이전에 회당에서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도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실 수 있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것으로 시비를 걸 계기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다 아시듯이, 3절에서 오히려 먼저 이 사람을 한 가운데로 일으켜 세우셔서 모두의 주목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잠잠하게 만드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4-5절을 읽어봅시다.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여기에 예수님의 주장을 보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며 이것을 옳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잠잠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 의도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문헌에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은 죄로 여겨졌습니다. 다만 예외가 있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어 다음날로 미루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미쉬나에서는 이 원칙을 요약합니다. “사람이 목에 고통이 있으면 안식일에도 약을 투여해도 된다.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생각되면 치유가 안식일보다 우선시된다.” 이에 따라 분만시 도움도 허용되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인데, 그것은 생명에 직결된 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전통을 고의적으로 깨신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에게 필요한 선과 생명은 지금 당장 치유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잠잠하게 하신 후 손을 내밀라고 하셔서 바로 고쳐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만 혈안이 되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통에 어긋나서도 생명을 살리는 옳은 일을 택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매우 급진적인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의 모습 앞에 그들 스스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손 마른 사람도 불편하고, 예수님도 불편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그들이 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경건의 지식은 충만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율법으로 손 마른 사람을 더 옭아맸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저렇게 된 것이다.” “그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성전에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 사람이 회당에 있는데 왜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곁에 와서 우리가 눈치 보고 거리껴지게 만드는가?” 이런 질문들로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행하지 못하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 그런데 자신들의 공동체에 들어오지는 않고 외려 자신들의 마음에 완악함을 드러내시고 노하시는 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니 그분도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내쫓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공동체에 있을 때, 혹은 가정과 교회에서 이러한 정죄나 판단을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편하고, 나보다 더 사랑받고 칭찬받는 공동체를 살리는 선한 사람도 불편합니다. 그 사람들이 있으므로 인해 내가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하고 배울 점을 찾아야 하고 깨지고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극을 주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기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끼리끼리를 좋아하고 새가족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익숙한 사람들과 서로 가면을 쓰고 적당히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합니다. 아닌 이들은 손절하고 더 이상 이런 상황 때문에 내가 나쁜 사람 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이러한 사람들로 남았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베드로, 빌립, 바울 등 사도들은 정반대로 생명의 복음 안에서 굴레가 될 만한 전통과 제도들에 대해 자유해졌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얻도록 도왔고, 복음에 방해가 되는 날과 절기들은 철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그러한 사도들의 삶을 따라가십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정죄와 비난으로 나의 기준에 따라서 생명 얻을 자를 가리고만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시기도 하지만, 탄식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요, 회개하는 바리새인들을 위한 십자가이기도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되어 여전히 정죄와 비난으로 점철된 우리 삶도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께 나아가 마음과 생각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정말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본문의 교훈 두 번째, 언제까지 ‘손 마른 상태로 오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건강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맹인과 같은 상태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맹인과 같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짚어주시며, 육체의 눈먼 사람을 고치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사실은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손 마른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실 때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라는 말에 주목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실 때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라는 표현은 ‘오그라들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 손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어떤 외경에서는 그가 왕년에 석수였으며, 산업재해로 오른손이 마비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소아마비나 뇌졸증이 왔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는 정상적으로 일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도 살아야 할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파 보신 분들은 압니다. 이 아픔이 언제 끝날지 너무나도 간구하고 하루하루 기다리게 되는데,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한 소외와 고독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병상에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도 하루 이틀이지 점점 무뎌지기 시작하고, 이제는 자신이 찾아갈 수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는 교회에도 신경이 멀어집니다. 하나님도 멀어집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질병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은 아마도 그러한 고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병자로서 완전한 사람이 아닌지라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고 회당에서 그저 근근히 자신의 생계를 위해 구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자기 죄로 저러한 삶에 떨어진 것이라며, 그를 정죄하고 비난하기만 하지 그를 공감하고 그의 삶에 관심 갖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 우리를 귀찮게 하는 한 사람이라 여길 뿐입니다.
그러한 전인적 소외와 고독 가운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자신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로 일어서서 주목시켜 주시고, 그가 회복되는 일이 안식일에 긴급하게 해야 할 치유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옳은 일이 그에게 일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는 결국 치유를 받습니다. 치유는 신체 뿐 아니라, 그의 정신과 영혼에도 회복을 주었을 것이고, 그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치유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약학자 맨슨은 이 점에 대해 적절하게 지적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적을 향한 일격이다. …… 사탄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악의 세력은 7일 내내 일을 한다. 따라서 사탄에 대항한 (영적) 싸움은 6일 동안만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고 손 마른 사람의 치유를 원하지 않는, 그저 안식일 규정만 의롭게 앞세운 바리새인은 사단의 세력이나 다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사단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의대로만 남들에게 주장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안식일의 회복을 누리려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고발하여 주저 앉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만의 상징인 사단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러지 않아야 합니다. 깨어 나십시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바리새인에서 손 마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고 예수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고, 그 즉시 손이 회복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육이 그러한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이 들려 병을 앓아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회당에서 보십니다. 그날도 본문에서처럼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고쳐 주시면서 자신의 치유 행위가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설명하십니다.
누가복음 13:16 입니다.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은혜를 찾으십시오. 언제까지 손 마른 상태, 귀신에 매인 상태로 오래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 시라도 빨리 여러분들을 풀어주시고 회복시키시기 원하십니다. 그분께 나아오면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불신하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내 안의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상처 때문에 거리를 두고 낙망해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내 신앙이 뜨겁거나 차지 않고 미지근하여 쓸 수 없는 상태인데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이것은 안식일에라도 생명을 살리는 옳은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찾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손 마른 사람처럼, 예수님을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로 나아갑시다. 그럴 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던 맹인이 눈을 뜨게 되듯, 우리도 전인격의 치유와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시는 이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언제까지 정죄와 판단만 하고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손 마른 상태로 계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러한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께 겸손하고 용기있게 전심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셔서 오늘 지금 변화의 초석을 밟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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