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핑계를 댄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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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들이 핑계를 댄 진짜 이유는?
[서론]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핑계를 대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핑계’와 ‘변명’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핑계가 많은 사람은 신뢰받기 어렵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멀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게 핑계를 댑니다.
소중한 친구와의 약속을 ‘바빠서’라는 말로 미룹니다.
책을 읽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없다’며 미룹니다.
다이어트를 실패한 이유도 ‘체질 탓’으로 돌려버립니다.
이런 핑계들은 때때로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실수나 부족함을 외부 탓으로 돌리며 자존심을 지켜주는 자기 방어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선한 의도를 유지하려는 본능적 심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핑계가 다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핑계가 습관이 되었을 때입니다.
핑계는 반복되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죠.
운동을 미루다 병이 찾아오고, 관계를 미루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핑계는 죄보다 더 은밀하고, 두려움보다 더 설득력 있으며, 자기기만보다 더 위협적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댈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의 핑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과 마음속의 핑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그분이 정말 어떤 분인지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겉보기엔 믿음의 고백 같지만, 그 속에는 자신감과 특권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종교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유대인 엘리트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부와 지위가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직접 반박하지 않으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잔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누가 들어갈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큰 잔치를 열었다는 것은, 그가 매우 부유하고 명망 있는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초대된 사람들도 당연히 그와 비슷한 수준의 부유층, 상류층일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은 땅에서의 부와 지위로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 기준에 맞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우선권을 가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잔치는 두 단계로 초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미리 초청장을 보내어 참석 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잔칫날이 되면 다시 종을 보내 초대한 사람들을 직접 모시고 오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잔칫날에 초대받은 이들에게 가서 “이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한결같이 핑계를 대며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건 단순한 일정 변경이 아닙니다.
잔치에 간다고 해놓고, 정작 당일에 모두 불참한 것은 당시 문화에서 볼 때 초대한 사람을 향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공개적인 수치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나라처럼 ‘체면’과 ‘명예’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문화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잔치가 준비됐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이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신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잔치를 준비한 주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음식은 다 차려졌는데,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데, 그 누구도 오지 않습니다.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무시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수치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들려준 핑계를 하나씩 들어보면, 기막히고 어이없는 수준입니다.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 참석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변명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밭을 샀으니, 나가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밭이나 땅을 살 때 어떻게 합니까?
먼저 꼼꼼히 보고, 조사하고, 확인한 다음에야 계약을 하죠.
어떤 사람이 밭을 사놓고, 이제 가서 한 번 볼까?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산이며 정체성의 일부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재산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집인지도 모르고 계약서부터 써놓고, 이사 날짜에 처음 가서 확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말입니다.
이건 그저 ‘어리석은 핑계’일 뿐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야 하겠습니다.”
겨릿소 하나는 두 마리 한 조입니다.
그러니 소 다섯 겨리는 무려 열 마리의 소를 샀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소를 운영하려면, 넓은 농토를 가진 꽤 부유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당시 농업 중심 사회에서 소는 농사의 핵심 도구였다는 점입니다.
소의 힘, 건강, 균형 여부는 구입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필수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치 시승도 안 해보고 차부터 계약했다는 듯 말합니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역시 핑계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장가 들었으니, 갈 수 없습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한 이유처럼 들립니다.
결혼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니까요.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를 보면, 이 핑계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결혼은 예정된 일정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초대받았을 때 미리 참석이 어렵다고 말했어야 정상이죠.
그리고 잔치 당일이라면, 이미 결혼식은 끝난 상태일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문화에서는 부부가 함께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함께 잔치에 가야 할 이유이지, 불참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말투입니다.
앞선 두 사람은 그래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정중함의 형식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말조차 없습니다.
아예 갈 마음이 없음을 단호하게 드러냅니다.
“나는 갈 수 없습니다.”
거절이 아니라, 무시입니다.
이 사람들의 핑계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매우 비상식적인 핑계라는 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예로 드셨을까요?
차라리 부모가 위독하다거나 직장을 잃게 생겼다는 식의 그럴듯한 이유를 든다면 좀 더 공감하고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유는 터무니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절은 결코 합리적인 핑계나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초대를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잔치에 관심이 사라졌을까요?
그들은 이미 배부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돈과 지위로 이미 삶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부족할게 별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잔치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의 가정, 직장, 학교,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향기가 희미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바쁘고, 항상 해야 할 일이 있고, 항상 하나님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들의 핑계는 모두 ‘일상적인 이유’라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대단하거나 위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들의 핑계는 밭, 소, 결혼입니다.
다시 말해, 재산, 직업, 가정입니다.
모두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삶에 꼭 필요한 좋은 것들입니다.
재산을 늘리는 것,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가정을 돌보는 것 모두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좋은 것들이 하나님 나라보다 앞설 때, 하나님을 대신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마음에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모두 ‘내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제일 우선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처음에는 초청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처음부터 무시하려 한 게 아니라,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밭과 소와 결혼 같은 일상적인 것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지금 당장 내게 뭔가 보상을 주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지,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하나 더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일상의 이유로 핑계를 댔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일상 속에 임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일에만 임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만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한복판에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그 순간, 내가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 속에 임합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방식, 가족을 대하는 태도, 돈을 다루는 습관 속에 임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상속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을 돌보는 것을 기뻐하시고, 일에 성실한 것을 원하시며,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하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우선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들과 우리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게, 핑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 잔치는 그대로 끝나버리는 것일까요?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했으니, 음식은 썩고, 주인은 분노하며 잔치를 취소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에서, 주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오지 않자, 새로운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인은 종을 보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맹인, 다리 저는 자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저주받은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것은 하나님의 복때문이고, 반면 가난하고,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어떤 잔치에서도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장면입니까?
당시 잔치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잔치는 사회적 신분과 명예를 드러내는 자리였습니다.
누구를 초대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위상과 체면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초대하고 보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아무나 초대하면 명예를 더럽히고 수치를 당한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당대 사람들이 결코 부르지 않을 사람들을 기꺼이 초대합니다.
그들의 신분, 조건, 외모, 경제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수치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초대할까요?
이 잔치는 평범한 잔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거래’가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내가 준 만큼 받아야 하고, 받은 만큼 돌려줘야 관계가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친구 관계조차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릅니다.
보답할 수 없는 자, 갚을 능력이 없는 자를 품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그럼 그들은 왜 잔치에 응답했을까요?
그들에게도 갈 수 없는 이유는 많았을 텐데요.
그들은 자신이 자격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자리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초대가 왔을 때, “내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응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자신이 자격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격이 없음을 아는 사람, 그래서 오직 은혜로 들어간다고 믿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은혜에 목마른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자격 없음을 인정한 사람에게 더 열려 있습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자격 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내 신앙, 나의 삶, 나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는 오늘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다는 고백이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초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 초대는 능력 있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잔치 자리를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빈 자리가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종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길과 산 울타리로 나가서 사람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굳이 억지로까지 데려다가 사람을 채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주인의 열심, 곧 하나님의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주인은 단지 잔치를 형식적으로 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한 자리도 비어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잔치를 준비한 사람입니다.
“어떻게든, 누구든지, 꼭 와야 한다!”
그 열심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잔치를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르고 또 부르시는 분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은 단순한 강압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올 수 없는 사람들임을 주인은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가서 그들을 설득하고, 인도하고, 부축해서라도 데려와야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의 초대는 적극적이고 끈질긴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이 잔치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복음 전도는 단순한 안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하나님 나라에 자리를 채우는 사명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모릅니다. 복음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끈질기게, 더 설득력 있게, 더 인내심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도 잔치에서 빠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잔치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그 잔치를 채우는 일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 함께걷는 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