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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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성한 일꾼
(엡4:1-16)
나에게 어렵고 힘든 것은 나에게 나쁜 것인가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해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바로 이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계시록에서 7교회의 모교회로서 에베소 교회를 들고 있는데, 그들의 믿음이 어떤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익한 것의 기준
찜통에서 찌듯이 습하고 더운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더위가 무조건 나쁜 것일까요? 한여름의 찌는듯한 더위는 곡식과 과일 등의 열매에 속을 가득 채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죠. 만일 이 찌는듯한 더위가 봄철 씨 뿌리는 시절에 있다면, 뿌려진 씨는 땅 속에서 익어버리든지 아니면 떡잎이 나왔더라도 그 잎이 볕에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만일 여름에 뜨거운 날씨가 아니라 선선한 날씨가 지속된다면, 열매는 속이 빈 쭉정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심판 때에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눅3:17),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찜통처럼 뜨거운 날씨와 같이 우리 인생살이 가운데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는 중에도 한편으로는 유익한 면도 있다는 말입니다. 봄철에 우리 눈과 호흡기를 몹시 괴롭히는 황사도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 바닷물이 붉게 물드는 적조현상 같은 것을 해소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현상 가운데, 객관적으로 보아 파괴적이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익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허락해 주신 굴곡진 삶의 여러 상황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 창고에 들어갈 알곡으로 속을 꽉 채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유익하다’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경우에, 자신에게 혹은 자신과 관련된 것에 유익할 때 ‘유익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유익하다’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내가 구원을 얻은 것 감사하고,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여 구원하신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예수님 손해이므로,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나를 반드시 보호하셔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상황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우상’을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다 ‘유익함’의 기준을 두시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닮아야 할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에베소서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권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인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겸손함(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과 온유함(정의를 집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자가 베푸는 긍휼의 마음)을 따라서 행해야 하고, 어떤 일에 대해 용납하기를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묶는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실제 몸을 묶는 행위를 했던 당시의 풍습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의 형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기에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속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같은 성령을 받은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같은 부르심의 소망을 갖고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부르심의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부르심의 목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의 삶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천지만물 모든 것의 아버지시며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1~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값없이 받는 것)의 분량(메트론, 잣대, 표준)에 따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의 잣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재능에 따라서인가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각각에게 주어진 재능의 유무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기에 어떤 경우라도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재능을 불평하며 억지로라도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선물의 잣대’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의 잣대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셔서,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권세를 주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 심판의 주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심판하실 때 알곡은 천국 곳간으로 독보리와 쭉정이는 영원한 불구덩이에 처하는 심판이 바로 그 선물의 잣대가 아닐까요? 8~10절이 그것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로 준비시켜(온전하게 갖추도록 하여) 봉사의 일(ministry)을 하게 하시되, 어떤 사람은 사도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다른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부르셔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11~12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메트론, 잣대, 표준)에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값없이 받는 것)의 분량(메트론, 잣대, 표준)’과 다른 것입니다. 앞에 말씀 드렸던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한다면, 지금 말씀 드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고(달성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달성하고, 동사는 능동형으로 한 번만 사용됨)” 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써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3절).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14절에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신앙인 것입니다. 즉, 영원하고 참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중심을 두지 않고, 세상의 여러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 구원의 주로서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스스로 구원을 줄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다른 거짓 풍조와 거짓 그리스도에게 눈을 두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함으로 믿음으로 인내하고 이겨내도록 이끄시는 보혜사 성령께 마음의 왕좌를 드리기보다는, 모든 환난과 역경을 돌파해서라도 사람의 욕구를 채워준다고 속이는 거짓 영에 마음을 도둑맞은 사람이 바로 미성숙한 신앙의 사람입니다(14절).
그렇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되게 되어(or 참된 것을 말하여) 모든 영역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이르러야 한다.” 이는 우리는 각각 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온 몸이 머리 안에서 어떻게 함께 세워져 가는지에 대해 본문 말씀에는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을 헬라어 원어의 의미에 맞추어 좀 더 자세하게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몸에 갖추어 있는 마디(하페, 근육의 인대)’를 통해 ‘도움을 입고(에피코레기아, 지원해주고)’ ‘서로 연결하며(순나르몰로게오, 함께 형태를 만들어가고)’ ‘결합(숨비바쪼,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함)’하여, 지체 각자의 분량(메트론, 잣대, 표준)에 따라 적절하게 활동함으로 몸이 자라나게 하며 또 사랑 안에서 스스로 몸이 건설되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얼마나 안타깝게 외치고 있는지 그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 같은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