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가 구속주로 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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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요한복음 제 1 강
말씀 요한복음 1:1-18
창조주가 구속주로 오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저번 주 월요일 저와 아내는 하루 안에 먼 곳을 다녀오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 행아웃을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마귀가 죄책감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떠올리고 마귀를 대적하는 순간 순식간에 죄책감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알기 때문에 옆에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우시다는 주제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3)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조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말씀(Logos)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창조 때부터 함께 계셨고 함께 일하셨습니다. 이를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이 특이합니다. 1세기 당시 헬라 사람들은 ‘말씀(logos)’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들 속에도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치를 잘 깨달은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세계에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말씀(davar)’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창 1:1).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헬라인과 유대인이 생각하는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의 주체이셨습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5,16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일하지 않으셨다면 만물과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우리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우리를 생명체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말씀이 성령을 동반하여 우리 안에 들어와 새 생명을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창조될 때도 구원 얻을 때도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이 생명은 ‘영적인 생명’ 곧 영생과 같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숨 쉬며 움직인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엡 2:1).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는 부와 권력과 명성을 다 얻었지만, 그 마음은 밤처럼 어두웠습니다. 4장에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지만 허무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또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만족과 행복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와 인생 목적을 갖지 못한 사람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며 대충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삶의 낭비요 죽음입니다. 또 죽지 못해 그저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도 생명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활기차고 의욕이 넘치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생명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은 참된 생명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4) 사람들은 인간 조건이 좀 힘들면 어두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조건을 개선해서 행복하고 빛 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생명이 없는데, 조건이 좋고 환경이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명의 빛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비춥니다.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면 환하게 비춥니다. 이런 모습은 아침 햇살을 받기 위하여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마음의 창문을 열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려주는 전파자를 보내십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빛을 말하고, 그 빛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빛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의 등불 곧 종교와 철학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빛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은 영생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접’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면 주님은 평생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약속하십니다. 평생 외롭지 않고 안전한 인생을 약속하십니다. 평생 극한 죽음의 순간에도 절대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즘 다들 ‘스펙 쌓기’에 열중합니다. 스펙에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직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수많은 자격증이 필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증입니다. 그 자격증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희망 전도사’로 알려진 ‘닉 부이치치’는 간증했습니다.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전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이니까요.” 그는 호주에서 태어났는데, 또래 아이들이 걷고 뛸 무렵 남들과 다른 자신의 장애를 보며 삶의 기쁨보다 좌절과 고통을 먼저 배웠다고 했습니다. 응석받이 어린아이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10살쯤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의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변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퍼뜨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절망했을 때 자살했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겠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고 깜박깜박 꺼져가는 불꽃을 부여잡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실 겁니다.”
왜 사람들이 어두울까요? 자신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와서 예수님에게로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엄청난 스펙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둘째,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14-18)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신 말씀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오직 한 번만, 한 분에게만 발견되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이를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얼까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는 물론이고 천사들까지 그의 영광을 보고 매료되어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보드’로서 무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 앞에 압도되어 찬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갑자기 몰려드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사실 사람이 하는 정말 많은 행동이 죄책감 때문인 걸 아십니까? 예를 들어 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가 아닌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나 교회 친구가 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러면 문병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결국 문병을 갑니다. 죄책감 때문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결혼을 합니다. 죄책감 때문에 갑니다. 만일 그 사람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을 갑니다. 욕먹기 싫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일들을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 혹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는 사람에게 “네가 무슨 죄를 지었으니 너는 나쁜 놈이야!”라는 식으로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경은 사람을 막 꾸짖고 괴롭히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주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을 거절했고 무시했음을 알고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구약의 욥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죄가 없다고 계속 항변합니다. 그러다가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사람은 깜깜한 방 안에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빛이 미치면 자신의 어두움과 더러움을 알게 됩니다. 누가 죄책감을 심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죄책감을 느낀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닫고 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뜨거운 숯불을 집게로 잡고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이사야는 타 죽을 줄 알았는데, 타 죽은 게 아니라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자신의 삶을 주께 드립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 6:8) 그러자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시며 아주 부정적인 예언을 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사 6:9) 실제로 이사야는 평생 복음을 전했으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고통스럽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은 무겁게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이 강팍하고 냉담했으며, 마침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을 보고 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주’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보았던 그 분이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자마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할 정도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육신을 입어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모습, 심지어 사람들이 만지고 해칠 수 있는 존재로 오신 겁니다. 한 아기로 오셔서 성장하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결국 말씀을 전하시다가 십자가 앞으로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버림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본 영광의 하나님, 곧 그가 보자마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게 할 만큼 두려운 그 하나님이 수백 년 후에 아기로 오셔서 자신이 마땅히 당해야 할 불지옥을 대신 경험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만난 그 영광스러운 분이 자기의 영광을 감추고 사람으로 오실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감추고 쉽게 해침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쉽게 죽임당할 수 있는 존재로 낮아진 것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존재와 영원을 함께 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존재가 된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절정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죄인들을 위해 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거기서 우리의 죄책감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받으실 때 우리의 죄책감이 죽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영광을 볼 때 우리 마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무겁게 들리기를 기도합니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와 충만합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같아지는 사랑을 아무 값없이 받는 게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독생자가 친히 오셨습니다. 그의 영광이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의 악을 보게 됩니다. 악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요 그 극단이 교만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볼 때, ‘나’라는 주인은 형편없는 주인이라서 계속 나를 위해서 살면 나를 망쳐버릴 같아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창조주의 영광을 감추시고 나와 같이 되시고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서 내가 되어 대신 죽으신 덕분에, 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 어떤 은혜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공부를 통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고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