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메시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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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요한복음 1:19-51
누가 메시아인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지난주 신입생 입학식 전도가 있었습니다. 과거와 다르게 긴장된 마음이 없이 평안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설문을 받고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의 공통된 경험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목장을 하면서 믿음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신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길 축복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어린 양(19-34)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탁월한 영성 때문에 그가 메시아일 거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언론을 통해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23). ‘소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소리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증언하는 분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누구일까요?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란 세상 문제의 원인이 죄라는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겁니다. 야고보서 1:14,15은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유혹을 받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끌려 미혹됐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아기라는 죄를 낳고 죄가 충분히 자라면 사망이 됩니다. 그러니까 죄는 유혹, 욕심, 미혹, 죄, 사망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욕심을 정확히 압니다. 마귀는 내 안의 세상 욕심, 돈 욕심, 경쟁심, 인정욕, 성욕 등을 압니다. 마귀가 유혹하면 사람은 그런 자기 욕심에 끌려 죄를 짓고 죽습니다. 그런 유혹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모두 없애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숫양이 이삭을 대신할 희생양이었습니다(창 22장).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 하나님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현관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희생양 때문에 목숨을 건졌습니다(출 12장). 또한 유대인들은 속죄 제사를 지낼 때 희생양을 바쳤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린양을 끌고 성전에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양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죄가 어린 양에게 전가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그 양을 잡으면 제사장이 그 피를 취하여 제단에 바르고, 양의 기름은 불살라 드립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4:35)
이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의 죗성도 죽었습니다. 정죄도 죽었습니다. 내 안의 불안과 슬픔도 죽었습니다. 죽음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누리며 행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양을 믿게 될까요?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주실 때입니다. 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메시아의 지위를 가지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전혀 새사람이 됩니다. 새사람이 되면 원칙적으로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유혹을 받아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과거, 지금 겪는 죄, 상처와 슬픔, 두려움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보라! ~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지금 죄로 인해 불안하다면, 가시방석 같은 내 인생의 의자에서 평안한 예수님의 의자로 옮겨 앉으면 됩니다.
둘째,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35-51)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38a)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따르는 자들인지 묻는 겁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선생님, 사시는 곳이 어디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38b). 이는 사실 “바로 당신을 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라고 초청하십니다(39).
예수님을 최초로 체험한 안드레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형 시몬에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 ‘메시아’란 ‘그리스도’, 즉 구원자를 말합니다. 안드레를 따라온 베드로를 본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요한의 아들 시몬’에서 ‘게바’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길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와 베드로가 같은 동네 사람 빌립을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보자마자 “나를 따르라”라고 요구하셨고 그는 주저 없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들처럼 메시아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은 즉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평소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메시아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그를 전도했습니다. “네가 만나볼 분이 계셔.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어.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야.” 그러자 나다나엘은 비웃듯이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당시 예루살렘 출신은 모두 다 갈릴리 출신을 우습게 보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인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 사람은 늘 다른 동네를 후진 동네라고 멸시합니다. 그리고 멸시당한 사람은 멸시할 다른 대상을 물색합니다. 이런 일들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심지어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같은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같은 낙후된 시골은 함부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남을 멸시함으로써 낮은 자존감을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약점과 실수를 찾아 경멸합니다. 나다나엘도 나사렛 출신자에게 인생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답이 있다고? 나사렛 출신자에게? 그럴 리 없어.” 요즘도 기독교를 나사렛처럼 보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면 조롱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는 나사렛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멸시하는 일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멸시는 해롭다는 겁니다. 멸시는 관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신호는 멸시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실망, 의견 차이, 고통, 좌절은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경멸하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이 없습니다.
둘째로 기독교를 멸시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재능, 재물, 인종, 성별과 무관하게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다는 믿음은 기독교에서 유래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럽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될 당시, 모든 지배층은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미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고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재능이 있고 힘이 강한 사람이 이긴다는 법칙이 지배했습니다. 한마디로 승자 독식, 약육강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르침이 서구 사회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존엄하다는 것, 절대적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빈민과 고아를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늘 나사렛 출신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형제 중에 어린 쪽을 택하셨습니다. 가인 대신 아벨, 이스마엘 대신 이삭, 에서 대신 야곱, 열한 명의 형제 중 요셉처럼, 세상이 우대하는 장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식이 많은 여자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를 택하시고 그들의 태를 여셨습니다. 세상에서 축복받는 여자보다 멸시받는 여자를 택하셨습니다. 사라, 리브가, 한나, 엘리사벳이 그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사상과 구별되는 차이점은 ‘복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기까지 약해지셨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 죄를 속하시고 우리 몫의 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면 다른 모든 종교는 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신을 만나려면 규율을 지키고 생각을 비우고 세상에서 평균 이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타종교와 철학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셨다는 겁니다. 타종교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모든 것의 답이 되십니다.
다른 사상체계들은 성공한 강자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즉 자신이 부족하고 마음이 깊이 병들었고, 자기 힘으로 자신조차 고칠 수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은 신을 찾으려면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핵심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과 멸시를 주의해야 합니다. 교만과 멸시는 우리 삶에 독이 될 뿐만 아니라, 특히 나의 근본적인 인생 문제 해결에 독이 됩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예수님을 멸시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영적 갈망이 있었습니다. 빌립의 “와서 보라.”(46b)는 단순한 초청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을 보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나사렛 사람에게 열리자 성령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왜 사람이 예수님을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봅니까? 자신의 근본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거나, 각자 열심히 추구하는 분야에서 이미 답을 찾은 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피할 없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는 회의론자 나다나엘이 겉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예수님을 탐색하기 위해서 찾아온 이유입니다. 믿을 수는 없지만, 나사렛이라도 봐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의론자 나다나엘의 요구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 우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라고 좋게 평가하셨습니다. 보통 회의론자는 타인의 심기를 잘 건드리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온유하게 대해주십니다. 나다나엘은 깜짝 날로며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가 어떤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아시고도 좋게 보셨다는 것이 중요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급한 그를 다독이십니다. 너무 회의적이던 그가 예수님을 덥석 믿어버리자, 초자연적인 예수님을 만나 감정 체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회의론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면 자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욕구가 채워졌다고 서둘러서 믿으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더 알아가야 합니다.
51절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창세기에서 야곱은 꿈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다리가 있고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죄를 지은 결과 하늘과 땅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되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깁니다. 나의 외로움이 해결되고 자존감이 회복될 것아 좋아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이 분이야말로 유대인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세상의 악을 정복하고 새롭게 하실 분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리고 와서 보아야 합니다. 나사렛에서 기대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인생의 짐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지고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죄짐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우리의 치료자요 구원자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한 주 동안 예배에 오고 목장에도 오고 삶공부에 오면 보게 됩니다. 나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죄와 죽음이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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