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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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

요즘 날씨가 계속해서 따뜻하려고 하면 추워지고, 추워지려고 하면 다시 따뜻해지고를 반복하는데 여전히 조금 쌀살하지만 조금씩 봄이 오고 있다는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가을 겨울처럼 추운 날씨를 조금더 좋아하는 편인데요, 제가 애초에 몸이 남들보다 더 따뜻하고 땀도 많이 흘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봄과 여름은 저한테는 모기, 나방 같은 벌레들이 많이 나오는 계절이라 좀더 추운 날씨를 선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곤충을 아주 싫어하는데요, 지금도 집에서 벌레같은게 나왔다하면 제가 못잡고 이주혜 전도사님이 대신 잡아줄 정도로 아주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특히 이것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수련회 같은게 열리면 밤에 캠프파이어하는 걸 너무너무 싫어했어요. 캠프파이어하면 다른 아이들은 막 재밌고 좋다고 나가서 놀고 그랬는데, 저는 여름 밤에 캠프파이어하면 거기가 나방 천국이 되는 걸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그랬는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방같은 야행성 곤충들은 빛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제가 시골에서 수련회할때, 휴대폰을 켰는데 그 화면에 나방이 달라붙어서 집어던져가지고 액정이 깨진 기억도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밤에 환한 불빛이 있으면 거기엔 꼭 나방같은 야행성 곤충들이 달라붙습니다.
혹시 왜 그렇게 모이는지 아십니까? 원래 야행성 곤충들은 밤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달빛을 의지해서 빛을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나는 습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빛을 따라서 빙글빙글 돌다보면 앞으로 똑바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향감각을 가진 습성 때문에 달빛보다 더 환한 빛, 예를 들어서 캠프파이어 불 같은 불을 발견하게 되면 거기로 모여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불을 향해서 빙글빙글 돌다보면 어느 순간엔가는 그냥 불 속으로 들어가서 타죽게 돼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나방은 그냥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습성 때문에 불에 돌진한건데 결국엔 그것이 스스로를 타죽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습성을 가진 나방에 빗대서 막 앞뒤 안보고 불에 돌진하는 사람들을 저희가 불나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인 이사야 선지자도 어떻게 보면 참 불나방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앞으로 달려나가면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 없이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타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빛이 있기 때문에 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게 되는 전말을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언제 부르심을 받았는가?

지난 주 본문 말씀과 이번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이사야는 예언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예언자입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이야기할 때에 보통 이사야서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사야서, 총 66장에 달하는 이 방대한 분량을 저희가 다 기억하고 알지 못하다 보니까 이사야 예언서와 이것을 쓴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히할 때가 있습니다.
먼저는 저희가 이사야는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요, 이사야의 가장 첫번째 구절을 보시면
Isaiah 1:1 NKRV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 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은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했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이야기하던 예언자였습니다. 특히 이사야가 처음 활동을 시작한 시기,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서 처음 계시를 받게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데요, 1절 말씀을 보시면
Isaiah 6:1 NKRV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앉으신 보좌를 보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시기가 기원전 740년 즈음이 되는데요, 이사야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때는 아주 전세계가 역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앗수르, 다른 말로는 아시리아라고 하는 왕국이 있습니다. 이 왕국은 거의 기원전 2000년 전,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0년전부터 존재했던 왕국인데요, 저희에게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로 유명합니다. 이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가 처음부터 강대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흥하고 망하고 하는 흥망성쇠를 경험했던 나라였는데, 기원전 10세기 정도에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어버리고 아주 세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883년부터 앗수르나시르팔 2세, 그리고 살만에셀 3세 왕이 앗수르를 통치하면서 1차적으로 아주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앗수르는 당시에 군대적인 사회였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모든 남자들이 군대에 징집되었고, 심지어 나라의 관료들도 대부분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오늘 오후에 예비군 작계훈련 때문에 석수동으로 가는데, 아주 귀찮고 성가시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저희나라는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간다는 의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앗수르의 군대는 약탈하고 빼앗고 정복하는 군인들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남자란 남자는 다 군대에 가버리는데 그 군인들은 무엇을 먹고 살고, 또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군인들만 있어서는 안되고 꼭 노동을 하는 일꾼들도 있어야하는데 그 사람들은 어디서 충당을 했을까요? 바로 정복한 땅에 살던 주민들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땅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로 이주를 시켜서 도시를 세우고 노동을 하게끔 했습니다. 이쪽을 정복해서 다른 정복 지역에 노동꾼으로 보내고, 또 저쪽을 정복해서 이쪽 정복지역에 다시 일꾼으로 보내면서 사람들을 다 자기 고향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또 정복을 나가서 약탈하고 빼앗는 방식으로 이 나라가 성장을 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왼쪽이 출정하는 군대를 묘사한 그림인데 위에 왕처럼 보이는 사람이 보입니다. 앗수르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나라였습니다. 군대를 잔뜩 끌고 가서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은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는 그림인데, 높은 성을 짓는다고 해도 오른쪽에 기울어져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처럼 공성 경사로를 만들어서 침공하는 나라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영향력이 언제까지고 가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기원전 8세기 초반 그러니까 기원전 800년에서 750년 정도 까지는 그냥 겉으로만 앗수르가 정복한 것처럼 보이고, 내부적으로는 그냥 각 지방의 도시 관료들이 알아서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에 뛰어난 지도자 디글랏 빌레셀 3세가 기원전 744년에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뛰어난 통치력으로 앗수르 내부를 재정비하고 반란을 잠재운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북 이스라엘이 있던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사진을 보시면 가장 진한 녹색 부분이 기원전 9세기에 살만에셀 3세 왕이 정복했던 땅인데요, 그 바로 밑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있습니다. 이 때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풍전등화같은 상황이었어요. 아주 강대한 제국 바로 밑에서 있던 상황에 기원전 8세기에는 이제 조금더 옅은 초록색,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 포함돼서 정복을 당하게 되는데요,
저렇게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본문말씀 2-4절 말씀을 보시면,
Isaiah 6:2–4 NKRV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여기서 스랍이라고 하는 단어가 의아하실 텐데요, 이 스랍은 히브리어 샤라프, 복수형으로는 세라핌이라고 하는 단어로 하나님 곁에 서 있는 천상의 존재, 천사와 같은 존재로 언급되는 곳은 딱 이 이사야 6장에만 등장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불뱀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것처럼, “뱀”이라고 하는 단어로도 쓰이구요, 동사로 쓰일때는 “완전히 불사르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러니까 손발이 있고 날개가 달린 불뱀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생김새를 나타낸다기 보다는 당시의 근동에서 특히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사진을 보시면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 목걸이와 유명한 투탕카멘의 가면인데요, 이처럼 뱀들이 왕의 상징들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뱀이 이집트와 같은 국가들의 왕권을 상징한다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스랍들이 3절에 보시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 라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어떤 왕들보다도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아니고 앗수르의 왕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찬양받기 합당하신 진정한 왕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찬양받기 합당하신 이유가 이집트의 파라오나 앗수르의 왕들처럼 그냥 힘이 쎄서, 큰 능력이 있어서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 아니라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받기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죠.

이사야의 속죄

그런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사야가 마주하게 돼버리니까 이사야는 요즘말로 멘붕에 빠집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Isaiah 6:5 NKRV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완전무결한 거룩함, 흠이 없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죄가 많기 때문에 부정한 인간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구절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Exodus 33:20 NKRV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저희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 중에 모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모세 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구요.
Leviticus 10:1–3 NKRV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아들들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부정한 방법으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정한 인간이 서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경우는 달랐죠.
Isaiah 6:6–7 NKRV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스랍 중에 하나가 제단에서 숯을 부젓가락으로 이사야의 입술에 가져다 대고 이것으로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은 단순하게 이사야가 정말 입술이 더러워서, 입술이 부정해서 닦아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대면한 이사야는 분명히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완전무결한 거룩한 인간은 없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런데 이사야는 부정해서 죽었던 아론의 아들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내가 부정한 사람인데 하나님을 만났으니 내가 죽겠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는 것을 저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이유없이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정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Luke 18:9 NKRV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Luke 18:13–14 NKRV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고 낮추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의 모습을 통해서도 저희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원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의 사명

그렇게 정함받은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에
Isaiah 6:8 NKRV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대체 내가 누군가를 보내야할 일이 있는데, 이 일에 누구를 보내야할까? 라고 물으시는데요, 여기 보시면 어디로 무엇을 하러 보낼까 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사야에게 뭘 시키시려는지 말씀하고 계시지 않으세요. 그런데 이사야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Isaiah 6:8 NKRV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내주세요!” 어딘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모습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는데요, 먼저 9-10절 말씀을 보시면,
Isaiah 6:9–10 NKRV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굉장히 크게 진노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예언자들의 말씀은 과장이 들어가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여기에도 과장법이 들어갑니다. 바로 방금 전에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저 백성들이 내 말을 듣고 맘을 고쳐먹지도 못하게 하겠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로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실 정도로 진노해계신 상태임을 나타내고 계신 것이죠.
11-12절을 보시면
Isaiah 6:11–12 NKRV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들을 멀리 옮기실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앗수르가 정복 전쟁을 하고 나서 그 도시와 성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서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모습, 나중에 이사야 사후에 등장하는 바벨론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런 거대한 제국들이 그렇게 이스라엘과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킬 때까지 이 진노를 멈추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불나방

이렇게 저희가 이사야 6장 함께 읽어보았는데요, 오늘 함께 읽은 6장의 말씀은 예언자의 사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줍니다. 이사야가 직면한 현실은 너무나도 암울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백성들이 들어먹지 않는 상황,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진노하신 상황, 곧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온 땅을 황폐하게 만들 정치적으로 절망적인 상황, 그럼에도 태평성대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서 말해도 들어먹지 않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예언자들은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저희야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어휴 그러게 말좀 잘 듣지”할 수도 있지만 가령 만약에 일제에 의해서 국가를 찬탈당하기 전의 조선에서, “이 나라가 죄가 많아서 일본에게 지배당할 것이오!” 라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매국노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아요. “어디 나라가 넘어간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나!”하면서 입을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질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질만한 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이유는 불에 뛰어든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바뀌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거기 있기 때문에 뛰어드는 겁니다. 비록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있으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결론: 예언자는 우리

그럼 이 사명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 이사야는 저런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 저렇게 순종할 수 있는 거지, 우린 아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저희와 크게 다른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저희의 죄를 회개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받은 저희들이 또한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입니다.
본문말씀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Isaiah 6:13 NKRV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지 않고 그 중에 딱 십분의 일 정도만 남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만 그 마저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나무가 베여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이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아도 아주 적은 몇몇의 사람들,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듣고 회개하고 부르심을 받은 저희들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씨앗이 심겨집니다. 비록 작은 것처럼 보여도 이 작은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고, 또한 바로 그 예언자가 될 저희들의 사명입니다.
사순절 2번째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라시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그 죽음이, 처음 복음을 들었던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서 그 복음을 전해들은 초대 교회를 통해서 끝없이 뿌리내려져 오늘날 저희에게도 전해진 것처럼, 정말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씨가 심겨질 것을 믿고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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