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1 금요기도회: 사무엘상 2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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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게 하심 참으로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도 지켜주시고 저희를 불러 모아주시니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나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세상은 서로를 헐뜯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비록 내 마음에 안들고, 심지어 원수라도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임을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기도함으로 하나가 되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 모든 이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기도하는 이 교회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그러한 시간이 되게 하시고 이 시간이 천국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26:1-12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한 주도 삶에서 치열하게 사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주를 예배로 시작하고 또 기도로 마무리하게 되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함께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먼저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은 사무엘상 26장의 말씀으로 다윗이 또 한번 사울을 죽일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살려준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장에서 먼저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지 않았고, 오늘 말씀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으나 또 다시 죽이지 않습니다. 그가 왜 죽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분으로 나타내시는지 함께 말씀을 듣겠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오늘 본문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일러주는 것인데요. 십 사람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지만, 다윗을 따르지 않고 사울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23장에서 먼저 한번 이들은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다시 한번 알려줍니다. 이들이 다윗과 같은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아니라 사울을 따르는 이유는 22장에서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하여 이에 대한 두려움이며 사울로부터 총애를 받고자 하는 행동일 겁니다. 더 나아가 이들이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 때문일 겁니다. 다윗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죽인 사울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울은 이 십 사람들의 말에 따라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고자 삼천 명을 대동하여 다윗이 있다는 곳쪽에 진을 칩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탐꾼을 보내어 틀림없이 정말 사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진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보니까 사울이 백성들이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누워있었습니다. 다윗은 더 자세하게 사울의 진영을 탐색하기 위하여 아히멜렉과 요압의 동생 아비새 중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아비새와 함께 밤 중에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진입합니다. 들어가자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서 자고, 사울의 머리 맡에는 땅에 창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밤에 진영 한 가운데로 진입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밤에 갔다가 누군가에게 들켜 신분을 확인하는 와중에 들킬 수도 있고, 다윗을 아는 자가 발견하고 즉시 다윗을 생포할 수도 있고, 사울이 직접 다윗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대담하게 진영 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진영 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다윗은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가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들어가고 있는지 오히려 의문을 가지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영에 들어가자 사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져있다는 것으로 자신이 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나 사울의 머리 맡에 땅에 꽂혀 있는 창을 다윗은 발견하게 됩니다. 사울은 창을 주로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던진 무기도 창이었습니다. 머리 맡에 창을 꽂아둔 것도 언제든 전투를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의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고 있고, 사울의 주 무기인 창도 땅에 꽂혀있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인 모습으로 사울은 다윗의 앞에 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인 것이죠. 심지어 지금의 상황은 처음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상황보다도 더 좋은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사울이 깨어있었고, 아마 손에 무기도 들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울은 자고 있고, 무기도 손에 없습니다. 그때보다도 훨씬 더 좋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행한 아비새는 그때 다윗과 동행한 사람들이 했던 말처럼 8절에서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다윗에게 찾아온 이 절호의 상황은 원수를 넘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와 현재 다른 것은 지금은 아비새가 자신이 사울을 죽이겠다고 다윗에게 청했다는 겁니다. 그때는 다윗이 직접 행할 것을 요청했지만, 지금은 아비새가 다윗을 대신해서 처리하겠다고 요청합니다. 아마 아비새는 다윗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지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대신해서 두 번 찌르지 않고 단번에 찔러서 죽이겠다고 요청했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가 맞이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처음이었던 그때보다 더 좋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동행한 부하가 대신해서 죽이겠다고 합니다. 만일 이것에 대해 누가 책임을 묻는다면 아비새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는 길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누가봐도 절호의 상황 가운데 다윗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다윗의 선택은 아비새의 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때처럼 9절에서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절대로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10절에서 자신이 죽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울을 심판하실 것이라면서 자신에게 사울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 억울한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의 서늘한 칼 앞에 다윗은 그럼에도 자신이 심판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때와 지금 다윗의 행동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때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을 베었고, 그 행동이 마음에 찔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다윗은 사울의 몸에 실 오라기 하나도,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바로 다윗은 사울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사울에게 쫓길 때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찾는 사울을 피해 도망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단, 아히멜렉과 같은 경건한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그를 도우시면서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확신했습니까? 오늘 본문 앞에서 나발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을 그가 경험하고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심판권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윗은 나발을 선대하였지만, 자신의 종들에게 모욕을 준 나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을 막으셨고, 자신이 직접 나발을 심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직접 경험하고 자신이 억울하고 모욕을 당하여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1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라면서 심판권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복종합니다. 바로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심판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니 사울이 이제는 더이상 두렵지 않게 된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대상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이고, 떨쳐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하여 경각심을 느끼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다윗도 결코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울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범죄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를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사울은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아말렉 족속과 재물을 진멸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보가 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왕이 이끄는 백성들 또한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침투한 오늘 말씀의 상황은 모두 하나님의 손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사무엘상 기자는 다윗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울의 진영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기술로 침투했거나 타이밍을 잘 잡아 잠행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굳건히 믿고 신뢰하는 자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이스라엘의 참된 직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과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교회가 진정으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이 자신이 왕이라며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권이 있는 것마냥 떠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진정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섬기지 않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목숨을 빼앗을 것처럼 말입니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돈과 권력과 같이 우리의 현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신앙과 믿음은 누구를 두려워 할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고 주권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게 되니 다른 것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것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는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결코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을 두려워합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얽매고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며, 그 말씀을 지킴으로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주권에 복종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께 심판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능히 멸하실 수 있으신 분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일지라도, 세상이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이 죄라고 하신 것을 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건강한 두려움을 가지는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가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 세상이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죄를 짓지 않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