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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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눅 12:13-21)
부제 : 과도한 자기 사랑인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서론>
오늘은 퀴즈로 강론 시작하겠습니다. <image 원숭이 덫> 이 물건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요?(질문)
윌리엄 헨드릭슨이라는 분이 쓴 「성경교리」라는 책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한 부족에서 사용하는 ‘원숭이 덫’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야자수에 작은 구멍을 내서 내용물을 비우고 딱딱한 견과류를 넣어 나무에 고정시키는 간단한 것이지만, 매우 효과적입니다.
욕심 많은 원숭이작은 구멍에 손을 넣어 견과를 한 웅큼 쥐면 절대로 손을 뺄 수 없기에, 결국 원주민의 한 끼 식사가 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손에 쥔 견과류를 손에서 놓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로 살 수 있는 방법탐심을 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하여”(21a)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사랑;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3)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21b)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탐심에 대하여 ‘다만 조금만 덜 욕심 내면 되!’라고 ‘인생살이 조언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17절-19절 읽겠습니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짧은 석 절에서 ‘’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예, 6번입니다.
주님은 ‘재물에 과도하게 욕심내고 집착하는 것이 탐심이다’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탐욕은 치명적인 독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방향하나님과 이웃에게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로 만 향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의 유일한 목적지가 ‘나 자신’라고 여기기에, ‘탐심이란 과도한 자기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만을 극진히 사랑하는 탐심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오늘 본문은 탐심이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본론>
과도한 자기 사랑인 탐심은 이웃 사랑을 좌절시킵니다.
우선, 과도한 자기 사랑인 탐심은 이웃 사랑을 좌절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부모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형이 재산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아 자기 분깃을 받지 못한 것억울해 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재산을 분배할 때 장남은 다른 형제의 두 배를 갖게 되어 있는데, 형이 그 동생의 몫까지 가로챈 것 같습니다.
그는 형이 율법대로 정당한 자기 몫을 주도록 재판을 해 달라고 예수께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그 형제들 간의 근본적인 문제탐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는 흔히 탐심을 부자들만이 갖고 있는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미워하는 가난한 사람들 마음속에도 역시 탐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탐심이 특정 누구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있는 보편적인 죄임을 말씀합니다.
탐심의 문제점; 형제를 형제로 대하지 않고,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오직 자기만을 향하는 생각의 방향성 때문입니다.
17절-19절의 짧은 세구절에서, ‘’라는 1인칭 대명사무려 6번이나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리석은 농부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직역하면, 더 많은 ‘나’가 있습니다.
17a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다
17b 내가 어떻게 할까
18a 내가 이렇게 하리라
18b 내가 창고들을 부술 것이다
18c 내가 더 큰 것들을 지을 것이다
18d 내가 모을 것이다. 거기에 모든 곡식을
19a 내가 내 혼에게 말할 것이다.
19b 내 혼아, 너는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너는 쉬어라. 너는 먹어라. 너는 마셔라. 너는 기뻐해라.
예수님은 탐심이 가득한 농부에 대하여 말씀할 때, 이렇게 모든 문장과 단어마다’라는 것을 지나칠 정도 강조하십니다.
이 농부 삶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젖어(절어 있고, 갇혀) 있기에, 남을 배려하는 것은 고사하고 웃 사랑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해 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듯 탐심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중심의 사고가 무서운 병인 것은, 세상에 중심을 자기에게로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은 나를 위하여 나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덧입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더불어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야 합니다.
사건과 사물을 볼 때 창을 통해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울을 통해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보는 사람자기 노력, 자신의 땀, 자신의 우수함만을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든 것을 누려야 합니다.
반대로 창을 통해서 보는 사람은 이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이웃과 주변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첫 번째 전쟁; 여리고에서 이룬 전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전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주지시키려고, 이 전투에서 발생한 모든 전리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심으로 눈이 먼 아간물건들을 보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자기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물건 중, 시날산 명품외투 1벌, 은 2.4kg, 금 600g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생각한 아간의 탐심은 어이없게도 아간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하게 하였고, 자신과 그 가족들이 몰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간과 그 일가족 은 금 외투 가축들까지 돌로 쳐서 돌무더기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우리 잘 알고 있는 아골(괴로움) 골짜기입니다.
탐심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탐심은 복의 통로로 살아야할 사람이 파멸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내 눈을 통하여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인, 형제와 이웃이 보이지 않으면, 더 소중 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행복은 나만을 위해 사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며, 더 크고 귀한 것; 하나님 사랑이라는 창문을 통하여, 형제와 이웃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탐심은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탐심의 치명적인 독은 따로 있습니다. ‘탐욕은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난을 미덕이 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를 죄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이든 부요든 성경의 관심은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임을 깨닫고 믿는 삶을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탐심으로 눈이 가려지면, 인생의 주인인 하나님을 망각하게 됩니다. 마치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사람이 시각을 먼저 잃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농부는 ‘크게 착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앞에 ‘내 것’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영혼은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심은, 이것이 영원히 내 것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해집니다. 자신이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왜 일까요? 탐심으로 눈이 가려져, 자기 자신에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출발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자극한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 넣은 것입니다. 탐심의 눈으로 선악과를 바라볼 때 그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하와는 탐심에 이끌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올려 놓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조차도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하여 일하게 하려는 욕심에 붙들렸습니다.
탐심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이 민수기 22장에나오는 발람이라는 선지자입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이 모압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발람선지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거부하는 듯했으나 발락이 보낸 금은보화에 대한 탐심 때문에 발락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길 가기를 거부합니다. 담에 그 몸을 대어서 발람의 발을 짓누르기까지 하며, 강력히 길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발람은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반복해서 나귀를 때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합니다. ‘아유~~ 주인님! 오쩐다구 이렇게 저를 이르케시번이나 때린대유~~ 온~제! 지가 쥔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슈? 앞을 좀 똑바로 좀 봐 유~~ 저기 천사가 칼을 들고, 죽이려고 서 있는 게 보이는디, 쥔님 같으면 가겄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탐심은 하나님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독입니다. 이렇게 탐심은 나귀도 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도 안 보이고, 이웃도 안보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렇다면 탐심을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수 주일이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와 헌신을 통하여 생명이 내 것이 아니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10분의 1을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나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강단에서 성수 주일하십시오!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외치는 것은, 하나님이 가난해서, 혹은 목사가 좀 잘 살아보겠다는 호구지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인이시며, 나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삶의 제사이기 때문이며, 나의 모든 것이신 주님을 인정하도록 하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탐심의 최후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허무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탐심을 버림으로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마 5:8) 사람이 진정으로 부자입니다.
과도한 자기 사랑인 탐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함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열방의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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