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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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약속

오늘로서 창세기를 7번째 설교합니다. 창세기 4장까지 왔습니다. 창세기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창세기는 어떤 책입니까? 힌트는 숫자 10입니다. 네 열 개의 족보로 이루어져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두 번째 족보입니다. 톨레도트. 족보, 계보, 대랴, 사적 등등으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오늘은 계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계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계보입니다. 오늘 이 계보를 통해서 죽음을 이기는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세 가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째는 살았다입니다. 둘째는 낳았다입니다. 셋째는 죽었다입니다.
첫째 살았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를 통해서 저자는 아담의 계보의 특징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면 이 족보는 후손들을 위함이지 당대의 사람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살아가는데 우리의 인생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어떤 인생인지를 보고 배우고 기억하고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습니다. 셋은 912세를 살았습니다. 에노스는 905년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왜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족보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담겨 있다면 후대에 많은 후손들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들이 기록되면 좋겠습니까? 성경은 왜 이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할까요?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인생보다 10배 많게는 15배 이상 산 사람들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족보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정확하지 않습니까?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아담의 후손들이 아닌가요?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은 아담의 후손들이 아니다. 왜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으나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이어짐을 말합니다. 그것이 3절에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자연 생육법을 통해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가인도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시 질문해 보면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도 살았습니다.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도 살았습니다. 그런데 족보가 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 후반부에 가인의 족보가 나오고 5장에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순서도 아담의 족보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 가인의 족보가 나오면 아~~아담에게서 이어진 가인의 족보구나 생각할텐데 성경은 가인의 족보를 먼저 적고 아담의 족보를 뒤에 적었습니다. 살았으되, 삶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아담의 후손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전혀 다른 아담의 후손과는 섞일 수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하는데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뱀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삶을, 그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살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름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록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과 부패한 가운데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잘 살고 부유하고 문화도 누리고 문명도 누렸지만 조용히 그냥 살았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큰사랑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족보에 소속되어 살아가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질문합니다. 아담의 족보냐, 아니면 가인의 족보냐? 아담의 족보의 사람들의 일평생, 그 긴 시간의 삶을 한 마디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갑니다. 죄인들도 사탄의 후소들도 살아갑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소속되어, 즉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되는 대로, 나이가 먹어가는 대로, 아이고 인생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살면 안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그냥 되는대로 사탄의 후손이든 예수님의 후손이든 상관없이 그냥 살아가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는 답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낳았다입니다. 가인의 족보에도 낳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의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약속에 대한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의 낳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낳았다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900년 가까이 살면서 자녀만 낳았나”하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 반문이 정답입니다. 네 성경은 이들의 삶을 자녀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옛날 드라마인가 영화에서 본 대사인데 “야! 애만 놓으면 부모냐!” 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성경도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낳았다는 말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왜 중요할까요? 인류 역사상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봤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죽음을 자세히 모륵고 살았지만 한 번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살았겠죠. 문제는 셋부터는 죽음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본적이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 이후에 죽음을 모르고 있는데도 아담과 하와와 동일한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 이해되십니까?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보았지만 셋 부터는 자연사라는 것을 인간이 나이가 들어서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본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아주 낯선 개념이라는 사실이죠. 그러니 이 족보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 믿을 때 그런 계기가 있을 수는 있지만 믿고 난 이후에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위해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낳았다는 말은 약속을 믿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아담과 하와아 전수했고, 셋도 전수했고 에노스도 전수했다는 말입니다. 5장의 족보의 사람들은 분명 살아갈 뿐이지만 그냥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자녀 출생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즉 종족 보존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자녀 생산은 항상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창세기를 우리가 살피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져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한 단어로 하면 낳았다입니다.
낳아서 뭐 했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잠시 사진을 한 장 보시겠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를 잘 보셔야 하는게 우리처럼 정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죽음을 제대로 보고 죽음이 흔한 시대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시대입니다. 천지창조하고 타락한 이후의 천년을 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디에 기대어,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갔을까요? 아담에게는 하와에게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러니 이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일생을 건 믿음입니다.
아담이 셋을 130세에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930세에 죽었습니다. 아담이 누구까지 보았느냐?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보았습니다. 그러면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레,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메까지 모두 같이 보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처럼 모여서 뭔가 다른 것을 하거나 문화를 만들거나 문명을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한 구석에서 그저 살았습니다. 그저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담과 셋의 신앙이 900년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신앙이 900년을 흘러간다? 이게 과연 쉬운 일입니까? 부모님들 자녀들 때문에 고민하시죠? 아담과 하와는요? 셋은요? 에녹은요? 이 모든 고민들이 지금 이 사진 한 장으로 보는 5장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들은 우리보다 얼마나 더 깝깝했을까요? 휴대폰도 재미있는 게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기대할게 있다면 딱 하나,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나이가 든 분들도 있고 나이가 젊은 청년 세대로 어린 자녀들도 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뭐했을까요? 이렇게 많은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뭐했을까요?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어떻게요?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지금 몇 세대가 모여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신앙으로 하나 됨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바로 약속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큰사랑교회는 하나입니까? 무엇으로 하나입니까? 큰사랑교회가 지니고 있는 약속으로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몰라도 우리 교회에 주어진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 믿음의 교회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 매 주일 모여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문제는 흩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흩어지고 세상의 문화들을 접하고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휩쓸린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우리 약속하는 겁니다. 토요일에는 내일 주일에 있을 말씀을 같이 읽고 창세기 이야기를 하십시오. 토요일 저녁은 온 가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시간을 내십시오. 그리고 함께 설교 본문을 읽고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 하십시오. 주일에 그 본문이 펼쳐지는 설교를 온 가족이 함께 듣고 토요일에 만나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내었는지 나누십시오. 나이가 들어서 뭘 이런 걸 해야 되냐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라멕까지 노아까지 신앙이 전수된 것은 아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보다 어린 사람들은 모두 하셔야 합니다.
토요일 한 번이라도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하여 자녀들에게, 손주들에게 신앙을 전수하십시오. 신앙을 전수하지 않는다면 자녀를 낳을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셋째 죽었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셋,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도 죽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죽는 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온 몸에 기운이 빠져서 죽으면 자연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지속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아담과 하와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이 죽은 가운데 내 몰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던 없던 다 죽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은 낳았다는 말로 끝납니다. 즉 오늘 본문은 죽음의 장이 아니라 생명이 전수되는 성경입니다. 가인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를 제대로 들었다면 분명 알 수 있습니다. 출발이 다릅니다. 아담의 족보의 출발은 어디입니까? 아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복을 가지고 그들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다른 본문을 한 군데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3:36–38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여러분 이 족보가 보이십니까? 창5장의 족보의 이름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죽었다고 말하는데, 세상 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죽으면 끝입니다. 천국에 가족개념이 없습니다. 창5장은 죽었다고 말하는데 이상하게 생명이 계속 이어져 갑니다. 이 족보는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족보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능력이 이 족보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 끝이납니까? 누가복음 3장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창5장의 족보가 예수님에게 도착하는 순간 이제는 사망이 없다. 죽음의 죽음이다. 죽음이 장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5장의 족보는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는 그 족보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 복음이 아들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지금 이 곳에 있는 여러분에게 이어질 때 까지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아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어도 우리는 주님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드러납니다. 창5장의 믿음의 족보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담이 살아있다, 셋이 살아있다, 노아가 살아있다, 라멕이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죽었습니까? 네 죽었습니다. 11:13절에 믿음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도 죄와 사망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본향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창5장의 족보가 나의 족보가 인 것을 알게 됩니다. 창5장의 족보가 나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그 약속을 제가 소유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처럼 죄와 사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되 그냥 되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가인의 후손들처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내 생명을 내 힘으로 유지하고 짧은 세상에서 편안히 살기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녀를 낳음으로, 즉 약속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 끝은 분명 죽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죽음입니다. 이 족보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며 우리도 살아갑시다. 다시 오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며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며, 교회서 신앙을 전수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노력합시다. 그냥 전수되지 않습니다. 토요일에 모여 안자, 남편과 아내라도 모여 앉아서, 혼자면 혼자라도 앉아서 신앙을 곱씹으며 전수합시다. 당장 안되어도 또 실패해도 포기하지 말고 전수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을 보고 죽으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기대합시다. 예수님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족보를 완성하십니다. 이어가십니다. 약속을 믿으며 주님앞으로 나아오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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