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드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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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2:1–11 NKRV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서론
제 친한 친구가 5월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그 친구의 축가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 5월에 제 친구의 결혼식을 위해 군산에 내려가야 하는데 제게 드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바로 축의금을 얼마나 낼 것인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축의금의 문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무 적게 내면 상대가 실망할 것 같고 너무 많이 내기에는 그만큼 내가 가까운 사이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에게 얼마를 내야 가장 적당할까라는 고민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무엇을 얼마만큼 주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소중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게 되고 덜 소중한 사람에게는 적당히 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예수님에게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시작되기 6일 전에 다시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위해 열심히 음식과 일을 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디있을까요? 마리아는 어디도 보이지 않다가 홀연히 손에 한 옥합, 즉 한 병을 들고 잔치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가 들고 온 병에는 나드라는 향기로운 기름이 들어 있었는데 그 양이 우리 성경에는 한 근, 원어 성경을 보면 약 311g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귀한 병을 들고 예수님께 가더니 병의 밀봉된 뚜껑을 뜯었습니다. 그리곤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전부 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예수님의 발에 향기로운 기름을 정성껏 발라드렸습니다. 그 기름이 얼마나 양이 많았는지 온 집안에 향이 가득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드라는 것은 북인도에서 수입되는 매우 비싼 향유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비쌌냐면 5절에선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의 총 양이 약 300데나리온, 즉 2천만원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드라는 향유는 이렇게 비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28g 정도로 나누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그 10배가 넘는 양을 한 번에 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놀란 또 다른 이유는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부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향유는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발에는 물로 닦아주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거기에 2천만원의 향유를 부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샤넬, 루이비똥과 같은 명품 옷으로 손님이 앉을 방석이나 발깔개로 사용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마리아가 머리카락을 사용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자에게 머리카락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여자의 자존심이자 영광이었습니다. 함부로 다뤄서는 안되고 항상 귀하게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발을 닦는 행위부터 종이나 하는 천한 일인데 종도 하지 않을 머리카락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왕이나 귀족이 와도 하지 않을 마리아의 섬김에 놀랐습니다. 엄청나게 귀한 것을 종보다 더 낮은 자세로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에 수근거렸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감사해도 저 정도까지 해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수근거림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나섰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귀한 나드를 지나치게 낭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어야 했다며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멈추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의 마음 속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짜 가난한 자들을 도우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횡령하지 못할 돈이 아까웠을 뿐이었습니다. 마리아가 2천만원인 나드를 팔아서 예수님께 드렸으면 자신이 그 돈의 일부를 몰래 빼돌릴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아까웠던 것입니다.
저는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교회에서 물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말로는 가난한 자를 위하자, 재정을 아끼자와 같은 말을 하면서 속으론 내게 이익이 되지 않아서 아쉬워했던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목사님에게 헌신을 해서 옷이나 가방을 사주거나, 교회의 차량등을 마련 했을 때 속으론 그 돈으로 내 대출금부터 먼저 갚아주지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진심은 그러면서 말로는 굳이 그런 곳에 돈을 쓸 필요가 있나? 괜히 낭비하는거 아니냐?와 같이 말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저와 같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 이익만 우선시 하면서 겉으론 아닌 척 했던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멈추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은 꼭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도우시기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진짜 헌신할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15:11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Deuteronomy 15:11 NKRV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를 염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가난한 사람 도울 기회는 평생 있으니 핑계대지 말고 지금 밖에 못하는 예수님의 장례를 기념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의 위선적인 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우리의 위선적인 마음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우입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가룟 유다와 같은 태도는 이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와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는 가족과 시간을 우선시 하면서 당장 시급한 교회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모님이 곧 돌아가시는데 아무 문제 없는 자녀와 시간을 가져야 한다면서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성경과 상식을 들어다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결국 자신이 편하고 좋은 일을 선택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11에서는 하나님께 드렸다는 핑계로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자들을 지적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하게 내 것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주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온전히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의 경우 많은 부자들이 기부를 합니다. 2023년을 기준으로 제가 본 자료에 의하면 1035억달러, 한화 143조원에 이릅니다. 이처럼 미국의 부자들의 기부를 보고 우리는 감탄을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선 이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있습니다. 왜 일까요? 이들의 기부가 온전한 기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 부자들은 기부할 때 어떻게 하느냐? 복지 재단을 만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부를 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기부금액에 따라 상속세, 소득세, 양도소득세를 줄여줍니다. 이렇게 부자들은 세금을 절약하고 어떻게 하느냐 자신들이 만든 재단에 이사장으로 자신이 취임을 합니다. 말이 기부이지 계속해서 자신이 마음대로 그 돈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많은 세금을 회피하며 자신들의 돈을 마음대로 씁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이런 일보단 자신이 나온 대학교에 투자, 자신의 건강을 위한 의학에 투자,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 등에 투자를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죽을 때에는 자신의 가족을 재단의 이사로 세워서 불법적으로 세금 없이 많은 재산을 상속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이 과연 온전한 기부일까요? 아닙니다. 온전한 기부는 내 소유권을 포기하고 준 상대의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나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나는 예수님에게 온전히 드렸습니까? 미국의 부자들처럼 주님께 내 물질, 내 시간, 내 인생, 내 가족 다 드렸다면서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한 뜻입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것의 궁극적인 모습은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9-11절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으로인해 영생을 얻고 온전히 드려진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많은 이들이 온전히 삶을 드린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로인해 세상과 사단을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어 복을 받아 내가 이제 깔끔한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월 500은 벌어가면서 살려고 하는 것은 온전히 드린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온전히 드린 그리스도의 삶이란 오늘 나사로처럼 예수님을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살고 그를 위해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나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과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변화의 시기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와 사역도 그러하고 여러분 개개인도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경우 목요 집회를 시작하였고 예배 시간이 변경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 이삭, 지혜 청년 부부는 출산하고, 단이 청년은 성인이 되어 일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사는 장소, 사는 방법, 감당하는 사역 등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 속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한 집이 아니거나, 내가 생각한 직장이 아니거나, 내가 생각한 사역이 아니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맡겨진 교회에서 봉사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역이 내가 너무 하기 싫고, 힘들고,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인생과 목숨까지 온전히 드린 그리스도인 자세로 주어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힘들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신 분이시고 앞으로도 우리를 책임져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걱정 없이 내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결론
제가 강원도 여행을 총 두번을 갔는데 모두 제가 계획을 짰습니다. 같이 가셨던 목사님 두 분은 아무 의문과 불만도 없이 제가 가자는 데로 가셨습니다. 첫 번째에도 그러셨지만 두 번째에는 더 그러셨습니다. 왤까요? 저랑 갔던 첫 번째 강원도 여행이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믿고 두 번째 여행에서도 제가 가자는 곳으로 그냥 가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가자고 해서 갔던 곳이 두 분에게 정말 모두 재밌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백프로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아니었고 생각보다 별로였던 곳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제가 가자는 곳으로 가시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즐겨주신 것은 저를 믿으셔서일 것입니다. 제가 두 분 복사님을 위해 최선의 것으로 일정을 짰을 것이라 믿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가 이러해야 합니다. 목사님 두 분이 저를 믿고 강원도 여행에 드는 시간과 돈을 어떻게 사용할 지 모두 맡긴 것처럼 여러분의 앞으로 시간과 돈을 모두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최선의 것으로 상황을 준비했을 것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목사님께서 제가 짠 계획에 기뻐하고 최선을 다해 즐기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상황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과 생명까지 예수님께 온전히 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미래와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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