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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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 여리고 성에 도착한 예수님
이야기의 시작: 여리고 성에 도착한 예수님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던 어느 아침, 여리고 성은 여느 때보다 더 분주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서, 사람들은 어디든 길을 메우고 있었지요. 손에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부터 먼 길을 떠나는 순례자, 그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몰려든 무리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그 틈새를 비집고, 작지만 빠른 걸음으로 서성거리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삭개오”였습니다. 뜻은 “깨끗함”이나 “순수함”을 의미하지만, 그는 세리장이며 부자였기에 사람들에게 늘 손가락질받았습니다.
이름대로 살면 억울해서 힘들고, 이름대로 못살면 양심에 찔려서 힘든 삶
결국 이름대로 살아가더라. 하나님도 사람들 이름을 바꿔버리셨다.
아브람 - 아브라함, 야곱 - 이스라엘, 시몬 - 베드로
키 작고 죄 많은 부자, 예수님을 향한 갈망
키 작고 죄 많은 부자, 예수님을 향한 갈망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삭개오는 왠지 모를 떨림과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18장에 청년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말씀을 듣고 난 이후 반응이 중요하다. 무시하거나 기분나빠서 외면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못만난다.
안만나도 아무런 상관 없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인생은 정말 아무 일도 없다. 아무런 반전없이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어쩌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해도 왜 이렇게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이전에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려했을 때에도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교회를 맘먹고 가보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때문에 ‘할 수 없을 때’ 이때가 중요한 때이다.
이런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흔히들 교회에 오려고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다툼이 일어나거나 누가 만나자고 하거나 배가 아프거나 잠이 몰려오거나 할 때
그런 때를 우리는 ‘할 수 없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럴 때가 바로 예수님을 만날 때입니다.
삭개오는 ‘할 수 없을’ 때 예수님을 만나려고 궁리를 했습니다.
키도 작고, 사람들도 많고, 자기를 훼방하는 것들이 주변에 꽉 찼습니다.
안만나도 먹고 사는데 지장없고,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 잘 사는 사람입니다.
“나무 위에서라도 보고 싶다” – 체면을 내려놓은 결심
“나무 위에서라도 보고 싶다” – 체면을 내려놓은 결심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삭개오는 집요하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한 결정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길가에 있던 뽕나무(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체면도, 명예도 내려놓고 말이지요. 아니, 부자면서도 왜 나무를 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했을까요? 그것은 ‘그냥 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삭개오를 향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무슨 꼴이람. 세리장 주제에 나무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겠다고?” 그러나 삭개오는 그 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님이 딱 보시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님이 딱 보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 아래 멈춰서신 주님, 그리고 “삭개오야!”
나무 아래 멈춰서신 주님, 그리고 “삭개오야!”
잎사귀 사이로 내려다보는데, 예수님이 무리를 지나 똑바로 그 뽕나무 아래로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이르러 예수님은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어 삭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삭개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시지? 세리장이라는 사실도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 하며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 음성 속에는 정죄가 아닌 따뜻한 초대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감동과 함께 밀려드는 두려움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천둥번개와 같은 꾸지람이 아니라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유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삭개오가 평생에 바라던 초대에 응해주셨다.
바리새인과 교사들은 삭개오를 멀리했다. 그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생각과 의지로 올라왔는지 또 얼마나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은지 하나님께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런데 초대조차 응하지 않고 자기를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고 루머를 퍼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버리니 그 답답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언제 다른 사람들에게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머물 곳이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서 만나서 친분을 쌓을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앞에서는 비난하고 거리를 두면서 뒤로는 다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리새인들이 거룩한 줄 알고 따릅니다. 그러나 속은 시커멓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는 안아주시고 다른 목적이나 이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을 모두 감당하십니다.
군중의 수군거림: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다니…’
군중의 수군거림: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다니…’
삭개오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무리는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죄인의 집에 들어가실 수 있나?” “세리장이 돈으로 예수님을 매수하는 거 아냐?” 심지어 의롭다 자부하는 이들은 “우리가 보기엔 저 사람 정말 구제 불능이야!”라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길 위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의 비난과 평판을 뛰어넘어 그 영혼을 찾아오십니다.
삭개오의 회개: “제 소유의 절반을…”
삭개오의 회개: “제 소유의 절반을…”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갑자기 결심하듯 고백합니다. “주님,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혹시 제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습니다!”
이 고백은 삭개오가 과거의 삶을 끊어내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겠다는 ‘결정적 회개’를 의미합니다. 레위기의 율법에 따르면 속인 것이 있으면 원금에 5분의 1을 더하여 갚도록 되어 있지만(레6:1-5), 삭개오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배상을 선언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대로 예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삭개오의 회개는 단지 말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재물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는 깨끗하고 순수한(삭개오)”라는 이름의 참뜻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삭개오의 놀라운 고백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많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아무리 거룩을 외쳐도, 정작 죄인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죄인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개가 일어났을 때, 기쁨으로 “구원”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장차 천국에 가는 비밀 키’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삶이 뒤집히고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삭개오가 회개하고 결단하자, 그 집에는 깊은 평안과 기쁨이 깃들었습니다. 그 일은 여리고 거리 어디선가 욕먹고 조롱받던 세리장에게서 일어났습니다.
맺음말: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가는 회개
맺음말: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가는 회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의 이야기는 ‘부자가 회개할 수도 있다’, ‘죄인이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회개란, 내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쌓아온 세상의 잣대와 평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키 작은 삭개오”가 “큰 회개”를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작아 보이는 인생 속에서도 “예수님 앞에 돌이키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이 구체적인 행동,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우리의 집에도 울려 퍼질 것입니다.
나무 위에서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보았던 삭개오를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가 단숨에 뛰어내려 예수님을 모셨듯, 우리도 마음 문을 활짝 열어 회개하고 주님을 맞이합시다. 그 순간, 예수님의 온전한 구원과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심령 속에 충만히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