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하나님 나라 한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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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계에서 하나님 나라 한복판으로
[서론]
저에게도 평생 잊히지 않는 마음의 생채기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치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부끄럽고 외로웠던 경험이었습니다.
폴란드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자리는 교수님들, 목회자들, 교회 집사님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선교팀 전체가 현지 교회에서 찬양 율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몸이 워낙 뻣뻣해서 율동을 잘 못했는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선교팀을 이끄시던 목사님이 유일하게 저만 연습에서 제외시킨 것입니다.
저에게는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고, 저는 혼자 옆방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제 귀에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율동하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하게 웃는 소리만 들려 왔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점점 작아졌고,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외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치 그 자리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작은 거 하나라도 있다면, 제게 맡겨 주세요. 저도 섬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는 현지 교회에 도착해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교회 문 앞에 서서 찾아오는 폴란드 사람들을 맞이할수 있었습니다.
그저 반갑게 인사하고, 미소로 환영했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큰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이방인의 느낌, 그리고 하나님께 드렸던 간절한 기도만큼은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순간은 수치와 아픔이 깃든 자리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과는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본문에도 사람들에게서는 멀어졌지만, 예수님과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몸도 마음도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간 사람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본론]
11절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다는 표현이 첫 문장에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결심하고 가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고난을 향한 길,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아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속 이 사건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장면입니다.
단지 병을 고치는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누구에게, 어디에 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어디입니까?
11절 후반절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마을을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사마리아면 사마리아고, 갈릴리면 갈릴리지,
왜 누가는 굳이 “그 사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사이’는 단순한 지리적 중간 지점이 아닙니다.
‘경계’입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땅, 중심과 중심 사이의 회색지대입니다.
이 표현에는 누가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연히 그 마을을 지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서 반드시 만나야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굴까요?
바로 나병환자 명입니다.
여러분, '나병'이 어떤 병입니까?
오늘날 한센병이라 불리는 이 병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 낫지 않는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하면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 알려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공동체 밖으로 내쫓나야만 했습니다.
사마리아로도 없고, 갈릴리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 밖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은 비참함 자체입니다.
가족도 만날 수 없고, 성전도 갈 수 없고, 아무도 가까이 와주지 않는 존재.
누군가 먹을 것을 던져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시기 위해, 그 곳을 지나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시는 한복판에서, 경계선에 버려진 자들을 구원의 길로 부르십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자립준비 청년들입니다.
미혼모들입니다.
이주민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정서적 경계에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역시 이런 경계에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저처럼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느껴질 때, 속해 있는 듯하지만 외롭고 공허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렇게 스스로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경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경계로 찾아오십니다.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붙잡지 못합니다.
율법에 따라 멀찍이 서서, 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결코 멀지 않았습니다.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침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만이 소망임을 붙드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가 병이 나았을 경우 반드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정결 판정을 받아야만 다시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고, 성전에 들어가 예배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바로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깨끗하게 되었다" 선포하지도 않으시고, "가다 보면 나을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의 몸은 분명 병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병든 몸으로 제사장에게 간다는 것, 율법상 허용되지 않는 행위입니다.
제사장은 그들을 돌려보내거나, 오히려 율법에 따라 심하게 책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왜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순종의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가는 중에 깨끗함을 받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순종의 걸음 속에서 임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쁠까요?
이제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만날 수 있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도 아마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만이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말씀하십니다.
고침받고 예수님께 돌아온 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 하나님 나라의 경계 밖에 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돌아온 건 그 사람뿐 입니다.
그는 예수의 아래 엎드려, 감사하며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돌아온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다.”
여기서 ‘돌아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방향 전체를 전환하는 것, 믿음의 회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치유를 받은 데 그친게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 누구인지 깨닫고, 그분 앞에 돌아와 엎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습니다.
치유는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만 선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갈 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형편없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향했습니다.
아직 나음을 입지 않았을 때, 치유의 약속이 보장되지 않았을 때,
말씀 하나 붙들고 발걸음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대단한 믿음입니다.
인생 최악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삶의 가장 문제였던 나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첫째, 그들은 문제 해결식 복음에만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문제 해결의 믿음일 뿐,
예수님을 향한 관계의 믿음, 구원의 믿음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면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고, 잃어버렸던 일상과 직업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회복을 가능하게 해주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인식은 사라졌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자, 예수님은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도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경제 문제, 관계 문제, 건강 문제 등 삶의 여러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도구처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를 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돌아가는 종종 생략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통로가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문제 해결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예배로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어져야 합니다.
치유만 받고 돌아서면, 거기엔 구원이 없습니다.
감사로 예수님께 나아갈 ,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됩니다.
둘째, 그들은 거짓된 안정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자신이 깨끗해졌음을 보였고, 율법적으로 정결 판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공동체에 복귀하고, 다시 안에 속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경계가 아닌 중심에 있다. 나는 괜찮다. 나는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는 들어갔지만, 예수님께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에는 나아갔지만, 진짜 성전이신 그 분 앞에는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심각한 도전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문제 해결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심 없는 회복은, 결국 구원 없는 신앙으로 끝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온 것일까요?
그는 단지 병이 나은 것에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치유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진정한 제사장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아이심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의 감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끝나는 정도의 땡큐가 아닙니다.
그의 감사는 자신의 삶이 회복된 기쁨을 넘어, 자기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감사를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 즉 예배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는 돌아와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 자리가 곧 성전이 되었고, 그의 행동이 곧 예배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것은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제 해결을 통해 회심이 이루어졌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또한 종교적 행위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예배는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가?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반응하며 살아가는가?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은 경계에 자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방인이었고, 율법상 부정한 자였습니다.
사회와 종교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경계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오늘도 경계에 있는 위태로운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한복판으로 초대하십니다.
반대로,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도전하시고, 그들이 쌓아 놓은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들을 허무십니다.
누가복음 6장 사복사화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배부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은 오히려 삶의 경계에 사람들, 버려진 자들, 소외된 자들, 부족한 자들에게 참된 소망입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 있는 결핍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채워진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부족한 사람은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런 경계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아픔과 절망,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길을 안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
문제 해결만을 위한 복음에 머무르지 말고,
감사로 예수님께 나아가고, 삶으로 예배하며,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돌아온 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사람이 바로 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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